[매일 매일 당신의 가치를 증명하라-45] 또 다시 눈폭풍, 홈스테이 가족께 작별의 만찬을 대접하다.

토요일의 눈폭풍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어서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오마하에 도착한 지 40일 만에 아스팔트 색이 진회색임을 알게 된 것처럼, 봄이 되어야 눈이 녹는다는 이곳의 기억은 그저 하얀 바탕화면이 언제든지 있어서, 마치 산수화를 볼 때 느꼈던 흰 바탕의 여유 같은 푸근함으로 눈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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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도 자원봉사자로 채워진다. 지금 서둘러라 마감은 3월1일이다. 관심 있느냐? 전화해라! ]

눈폭풍이 내려도 도서관에서라면 특히 조용한 토요일 아침이면 더 좋다. 한 주간 배운 것들을 정리하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며 한없이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면서 발끝으로 느끼는 따뜻한 바람. 지금 이 순간이 풍요롭고 한적하며 만족하고 편안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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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테이 앞마당과 함께 나의 애마 ‘코발트’를 카메라에 넣었다.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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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폭풍이 칼로 자른 듯이 오마하 남쪽에서 멈추었다는 기사. 어제는 잔뜩 겁을 주었는데 평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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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아침의 도서관은 이렇듯 여유롭다. 집중과 열정을 담을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셈]

아홉 시에 열리는 도서관 문을 일착으로 박차고 들어가 저녁 다섯 시에 강제로 밀어내는 시간까지 일곱 시간을 짜릿하고 즐겁게 보냈다. 나는 이 시간에 느꼈던 좋은 감정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을 테고, 감정으로 회상하지 못한다면 기록을 통해서라도 잊지 않으려 노력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동영상 16초. ‘눈 치우는 기계(Snow blower)’ 늘 보는 것이지만, 처음에 신기했던 기억을 더듬기 위해]

이제는 이곳에서의 생활을 정리를 시작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피할 수 없는 사실. 그리고 오마하 유학기간의 마지막 토요일이라는 것이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코니’ 아줌마에게 오늘 저녁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데이빗’ 아저씨에게는 저녁을 함께하자고 했다. 옆방 ‘바들’ 에게는 식사를 밖에서 하자고 했다. 네브래스카대학 법학과 3학년 ‘케이’ 학생에게는 동양음식을 먹자고 했다. 여러 명에게 제안한 것이 하나로 모여지는 날이다.

오늘은 동양 음식을 함께 맛보자고 제안하면서 ‘저녁’을 사겠다고 공언했던 날이다. 마지막 토요일. 다음 주 토요일이면 비행기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작별의 만찬 (Farewell Dine-Out). 유독 요란스럽고 특출나도록 보였는지 모르나, 나에게 이 소중한 시간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한국 식당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찾아주세요.” 낮에 ‘데이빗’ 아저씨께 부탁한 전화 말이었다.

어스름한 시간에 집으로 도착하니, ‘케이’가 가쁜 숨을 쉬면서 나를 뒤에 따라 들어왔다. “헨리, 나 못 봤어요? 밖에서 여러 번 불렀는데, 모른척하던데?” 요즈음 이 동네 사람들이 ‘헨리’를 모르면 간첩일 정도로 나의 신상이 오마하 캐스스트리트 동네 사람들에게 다 털린 것 같다.(홈스테이가 캐스스트리트에 있다.) 늦은 밤, 아무도 보이지 않는 길에서 차를 세우고 홈스테이에 들어설라치면 어디에선가 “안녕, 헨리”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그저 허공에 대고 “안녕~”할 뿐인데, 도대체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이 없지만, 그들은 나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형국이니 행동조심은 필수가 아닐까.

춥고 바람불고 눈내린 늦은 밤은 무섭지 않은가? 아마도 그 잠시의 두려움을 피하자는 속셈이 작용한 것이다. 아무튼, 난 오마하가 서울에서 살던 동네만큼 더욱 오마하의 캐스스트리트 동네 사람들에게 더 알려진 것 같다. 어쨌든 이곳의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신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 같다.

‘데이빗’ 아저씨는 난감한 표정으로 나에게 ‘한국 식당’ 고르기에 실패했음을 알린다. 한국 음식을 만들어 드리지는 못했지만, 맛도 보여 드리고, 설명도 해 드리고 싶었던 마음에 부탁했지만, 전화번호부에서 애써 찾다가 결국 불가능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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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마켓’에 있는 일본 식당 ‘히로 88 (HIRO 88)’가 우리 홈스테이 가족 전부가 마지막 만찬을 나눈 장소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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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들’과 함께 먼저 도착해서 ‘코니’ 아줌마와 ‘케이’를 기다리고 있다. 바깥 풍경도 나즈막이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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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음식을 시켰지만, 실내가 너무 어두워 단 한 장의 사진만 이날 음식으로 찍혔다. 너무 어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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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업원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했다. 플래시가 작동했어도 신통치 않지만, 아마도 이별 준비라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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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들’은 5월에 시카고에 있는 대학원으로 떠난다. 홈스테이에 새 학생이 들어와야 할 상황이다.]

그나마 찾은 것이 퓨전 동양음식을 파는 ‘히로 88(HIRO 88)’이라는 오마하에서 꽤나 유명한 식당을 찾았다는 것이다. 음식값이 비쌀 것 같다는 걱정으로 다른 식당을 고르고 있다는 말씀이셨다. 음식값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다. 비록 신용카드를 쓸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머니에는 두둑하게 $100과 $20짜리가 몇 장씩이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불과 1주일이면 서울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될 예정이라, 오마하에서 마지막으로 대접하는 저녁을 소홀히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제 작별의 만찬 대접을 받아주세요.”

식당은 아주 어두침침했고, 기념사진을 찍으려 애를 썼지만, 하늘의 뜻인지 제대로 찍힌 사진은 단 한 장도 없었다. ‘데이빗’ 아저씨가 다녀온 경험이 있다고 해서 여쭈었었다. “실내가 밝았었나요?” “그럼, 아주 밝았어” 의심없이 밝을 것으로 생각해서 카메라 렌즈를 망원 줌으로 선택했었는데, 셔터가 눌리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었다. 식당에서 재차 여쭈었었다. “실내가 많이 어둡네요? 언제 다녀가셨어요?” “아… 한 6개월 전이었던가? 점심때 친구 두 명과 왔었지, 그날 어찌나 눈 부시도록 해가 났었지.” “아… 네. 그랬었군요.”

이것저것 한 가지씩 주문하라는 ‘코니’ 아줌마의 지시에 따라 조심스럽게 음식이 식탁에 자리를 잡았는데, 모두 젓가락을 포크만큼 잘 사용하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 이곳 식당에서는 ‘불고기’라는 유사 불고기가 있어서 한국 음식 근처에 가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코니’ 아줌마는 ‘불고기’를 많이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고 했고, ‘케이’ 역시 할머니의 ‘불고기’ 솜씨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시안 마켓’이 집 가까이 있고, ‘홈스테이’ 학생 중에서 한국 학생이 14년 전부터 있었다니 그럴 만도 할 것이다.

만찬은 즐거웠고, 내가 오마하에 도착해서 겪었던 좌충우돌에 대해서 ‘데이빗’ 아저씨는 즐거움으로 ‘코니’ 아줌마는 놀람과 걱정으로 받아주셨다. 맛있고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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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음식을 시켰기 때문인지 ‘케이’ 손에는 박스가 들려져 있다. 이제 4학년이겠지?]

다음에 오마하에 오면 꼭 한국식당을 찾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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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오른쪽에 내가 쓴 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내일부터 작별의 선물로 하나씩 전할 예정이다. ]

홈스테이로 돌아오니 뱃속이 많이 허전하다. 음식을 많이 먹고도 이렇게 허전한 것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인데. 여러 사람이 모일수록 가족 생각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한다. 아들 녀석의 대학교 입학도 멀지 않았는데, 구두라도 하나 사 주어야 할 텐데 하는 마음뿐. 가족들도 나 없는 생활이 익숙한지 통 연락도 없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말이 맞을까?

애매한 8주간의 미국생활, 살짝 맛만 보고 떠나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고단하게 생활하기도 더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비타민도 거의 다 먹어서 바닥을 보이고, 면도 거품도 이젠 요란한 소리만 난다. 더 사야 할까? 아니면 대충 버티다 떠날 것인가?

TV를 켜고 뉴스를 보니 어제 뉴스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오마하는 그만큼 시큰둥한 곳일까? ⓒ김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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