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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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전 반려견의 진드기 집게, 그리고 비울수록 늘어나는 ‘마법의 케이크’

서랍 속에서 발견된 1990년대의 흔적

오스트리아 일간지 디 프레세(Die Presse)가 지난 5월 22일 자 14면 ‘나의 금요일(Mein Freitag)’ 섹션에 칼럼니스트 프리데리케 라이블(Friederike Leibl)이 기고한 에세이 한 편이 잔잔한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라이블 씨는 어느 날 서랍 깊숙한 곳에서 플라스틱 진드기 제거 집게 하나를 우연히 발견했다고 합니다. 주황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흔한 디자인의 그 물건은 1990년대 초에 세상을 떠난 반려견을 위해 마련했던 도구였다고 하니, 그 사이 흘러간 세월은 어림잡아 삼십여 년에 달합니다.

형태가 변하지 않는 일상의 작은 사물들

라이블 씨가 주목한 지점은 단순한 추억담이 아니었습니다. 그 진드기 집게의 형태가 수십 년 동안 단 한 차례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약국이나 생활용품점에 가면 지금도 똑같은 모양의 제품을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와 비슷한 사례로 머릿니를 빗어내는 서캐 빗(Läusekamm), 옛 시절 어느 가정에나 놓여 있던 흰색 손톱 솔, 주황색과 초록색이 칠해진 플라스틱 물조리개를 함께 떠올렸습니다. 어떤 물건들은 더 이상 개선될 여지가 없거나, 혹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듯하다고 그는 적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좀처럼 부서지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플라스틱 제품의 질긴 수명, 즉 사물의 불멸성에 대한 조용한 성찰이기도 했습니다.

비울수록 늘어나는 ‘마법의 케이크’

칼럼은 이어 정리정돈의 기묘한 역설로 이어집니다. 라이블 씨에 따르면 세상을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반려견을 추억한다는 명목으로 진드기 집게 같은 잡동사니까지 간직하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가족의 따끔한 시선이 있었고, 결국 대대적인 집안 정리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물건을 자루에 담아 내다 버려도 집안은 좀처럼 비워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치우면 치울수록 숨어 있던 물건들이 화수분처럼 모습을 드러냈다고 그는 묘사했습니다. 잡동사니란 결국 다 먹어 치울 수 없는 마법의 케이크와 같다는 비유가 이 칼럼의 중심 이미지였습니다.

한국 시니어가 마주한 ‘물건의 무게’

이 외신 칼럼이 시니어 독자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까닭이 있습니다. 은퇴 이후 살림 규모를 줄이거나, 자녀의 출가 이후 집을 정리하거나, 시니어 주거 시설로 이주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시니어가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합니다. 이웃 일본 사회에서 이미 자리 잡은 슈카츠(終活) 즉 인생의 마지막을 정돈하는 활동이 한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받고 있고, 정리수납 컨설팅이 시니어를 주된 고객으로 삼는 시장 또한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손에 익은 물건 하나하나를 처분하려 할 때, 거기에 깃든 시간과 사람의 기억은 단순한 부피로 환산되지 않습니다. 진드기 집게 한 자루가 한 가정의 1990년대를 통째로 불러오듯, 시니어의 서랍 속에는 가족과 동료, 떠난 이들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 있기 마련입니다.

기억은 마음에, 공간은 가볍게

질서 있는 살림과 단정한 공간은 시니어의 안전과 직결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좁은 통로에 쌓인 물건은 낙상의 원인이 되고, 정리되지 않은 약품은 자칫 복용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 오래 간직하려는 습관 자체는 검소의 미덕이자 살아온 시간을 존중하는 태도이므로 가볍게 부정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모든 기억이 반드시 사물의 형태로 남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진 한 장, 메모 한 줄, 가족과 나누는 짧은 회상만으로도 충분히 보존될 수 있는 추억이라면, 그 자리를 조용히 비워두는 선택이 결코 무정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디 프레세 칼럼이 던진 마법의 케이크 비유는 결국, 비우는 일이 한 번에 끝나는 사건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작은 결심의 연속임을 일러줍니다. 시니어 세대의 살림에는 오래된 질서가 깃들어 있고, 그 질서를 지키는 일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다만 안전하고 단정한 공간을 마련하는 합리적 정리 또한 살아온 시간을 헐값에 처분하는 일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위한 정성스러운 준비라 보아 마땅하겠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