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27 [조선일보] 자신 삶의 ‘버킷 리스트’ 1호에 ‘자서전 쓰기’를 올려놨다는 분도 있고…

평범한 삶이 바로 ‘살아있는 역사’… 기록 남기기 확산

“20~30대 시절을 떠올려보세요.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군대는 몇 년에 갔고 결혼은 언제 했는지, 취직해서 사회생활 시작했을 때 기분은 어땠는지 간단히 써보세요.”

평범한 삶이 바로 '살아있는 역사'… 기록 남기기 확산
지난 23일 서울 관악구 난곡주민도서관 강의실에서 열린 ‘자서전 교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자서전 글쓰기 강사를 맡은 유명종 희망사업단 대표, 한재영(74)·최대열(73)·김학윤(79)·오명렬(67)씨가 ‘기억 되살리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2011년 ‘어르신 자서전 제작 지원 사업’을 시작한 관악구는 지금까지 34명의 자서전 출판을 지원했다. / 성형주 기자

지난 23일 오전 10시 서울 관악구 난곡주민도서관 5층의 한 강의실에서 열린 ‘자서전 교실’에서 유명종 강사는 이렇게 말했다. 강의실엔 은발(銀髮)의 신사 4명이 앉아 있었다. 이날 열린 자서전 교실은 관악구청이 자기 삶을 책으로 써보고 싶어 하는 65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마련한 프로그램이다. 이날은 4주 과정 중 세 번째 강의가 진행되는 날이었다.

강사가 “6·25전쟁, 4·19혁명 같은 중요한 사건을 떠올려보면 기억 복원에 도움이 됩니다”라고 하자, 수강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바로 종이 위에 뭔가 쓰기 시작했다. 이날 수업에 참가한 한재영(74)씨는 오래간만에 20대 초반 일을 떠올렸다. 4·19혁명 하루 전날인 1960년 4월 18일, 당시 한씨는 서울대 약대 2학년생이었다.

“연건동 캠퍼스에 가운 입고 실습하러 들어갔는데 과대표가 앞에 나와 말했다. ‘나가자, 경무대(현 청와대)로 가자.’ 그래서 모두 흰 가운을 입고 경무대 쪽으로 행진했다.”

전남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학윤(79)씨는 6·25 전쟁 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해냈다. 그는 “피란민이 근처 섬까지 새까맣게 몰려들었는데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역병이 돌았다. 집안 어르신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셨는지, ‘손주를 빨리 봐야 한다’며 나를 고등학교 2학년 때 장가보냈다”고 말했다. 김씨는 “팔순 잔치 때 가족들에게 자서전을 나눠주고 싶어서 이 교실에 참석했다”고 했다.

평범한 삶이 바로 '살아있는 역사'… 기록 남기기 확산
일러스트=김성규 기자

내 인생을 글로 쓰면 책 한 권

평범한 시민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는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흔히 ‘내 인생을 글로 쓰면 책 한 권은 족히 될 것’이라고들 하는데, 그걸 실천해보는 것이다. 관악구는 지난 2011년 ‘어르신 자서전 제작 지원 사업’을 시작했다. 65세 이상 노인들을 위해 자서전 출판에 들어가는 비용 1인당 약 250만원을 구청이 부담해주고, 글쓰기 교육부터 출판까지 전 과정을 지원해주는 것이다.

윤흥규(88)씨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지난해 ‘두 개의 고향, 정주와 관악’이란 제목의 150쪽 분량 자서전을 냈다. 그의 책은 “나는 1927년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성동 726번지에서 태어났다”는 문장으로 시작해 “정말로 통일이 되어 대박이 나는 꿈이 속히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원한다”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윤씨는 “평안북도에 살다 한국전쟁통에 남쪽으로 내려오며 겪은 일을 책으로 써서 다시 읽어보니 ‘내가 이런 인생을 정말 살아왔구나’ 싶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관악구에서만 이런 방식으로 자서전 34권이 출판됐다. 지난 2월 12일엔 ‘제4회 어르신 자서전 출판 기념회’도 열렸다. 최근엔 광주 서구, 강원 인제군도 비슷한 사업을 시작했다. 민간 기업들도 동참했다. 실버 기업 시니어파트너즈는 최근 몇 년 동안 자서전 출판 사업을 벌여 70여명의 인생을 책으로 펴냈다. 이 경우엔 저자가 출판 비용을 부담한다.

교과서에서 살아있는 역사로

김형래 시니어파트너즈 상무는 “의외로 많은 장년·노년층이 자신의 삶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자기 삶의 ‘버킷 리스트’ 1호에 ‘자서전 쓰기’를 올려놨다는 분도 있고, 출판된 책을 두 손으로 잡고 눈물을 흘리시는 분도 있다”고 말했다.

자서전 쓰기 강사로도 일하는 공익 출판사 ‘희망사업단’의 유명종 대표는 “어르신 수십명과 함께 자서전 수업을 진행하면서 ‘교과서가 역사의 전부는 아니었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며 “이런 개인 자서전은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소중한 역사적 자산”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은 무엇보다 자신의 삶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소설가 이남희씨는 ‘자기 발견을 위한 자서전 쓰기 특강'(2009)에서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삶의 의미를 캐내고 자기를 발견하는 일”이라고 했다.

동영상으로 기록 남기기도

최근에는 인터넷과 SNS 발달에 힘입어 동영상과 사이버 공간을 통해 기록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 ‘메모로(Memoro) 운동’이 대표적이다. ‘메모로’는 ‘기억하다’ ‘일깨우다’라는 뜻의 라틴어. 메모로 운동은 2008년 이탈리아에서 시작돼 프랑스·영국 등 유럽 국가로 퍼져나갔다. 일본은 2009년 동참했고, 우리나라에선 지난해 한국교육개발원 홍영란 박사가 시작했다.

메모로 운동에 참여하는 전국 35개 중·고등학교 학생들은 주변에 사는 노인들을 찾아가 그들의 삶을 구술(口述)받아 5분 분량 동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린다. 홍 박사는 “어르신들은 ‘살아 있는 기억 저장고’다. 한국 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어오신 이분들의 삶을 기록하는 것 자체가 귀중한 역사(歷史) 쓰기”라고 말했다.

홍 박사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는 평범한 가장이었지만 그가 겪은 굴곡 많은 인생에 1000만명이 넘는 국민이 감동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독거노인 말벗 해드리기, 스마트폰 가르쳐드리기 같은 정책은 노인을 시혜(施惠)의 대상으로 볼 뿐 한때 격동의 현대사를 겪어낸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라며 “고령화가 세계 최고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한국에서 메모로 운동은 세대 간 단절·갈등 문제를 극복하고 사회 통합을 이루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서울 송곡여고 2학년인 강혜진(17)양은 이웃에 사는 김계봉(79)씨를 인터뷰했다. 강양은 “할아버지에게 일제강점기 얘기를 들었다. 학교에서 우리말이 아닌 일본말만 써야 했고 우리말을 쓰기라도 하면 벌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강양은 “조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살아서 그런 얘긴 태어나서 처음 들어봤다. 교과서로 읽는 게 아니라 당시를 직접 겪은 할아버지에게 들으니 신기하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작은 개인의 큰 역사

보통 사람의 일상적 기록은 유용한 역사 연구 자료로도 쓰인다. 조선시대 양반이 기록한 일기나 문집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희춘(1513~1577)이 쓴 ‘미암일기(眉巖日記)'(1568~1577)는 아내와 나눈 편지, 매일 꾼 꿈의 기록, 쌀·젓갈·해산물 등 선물 내역 등 일상의 세세한 내용이 담겨 있어 한국 일상사 연구의 필독서로 꼽힌다.

프랑스 아날 학파의 거두 필립 아리에스가 책임 편집을 맡은 ‘사생활의 역사’는 고대 로마에서 1980년대에 이르는 수천년 동안 황제·귀족·장군 같은 역사의 주인공이 아니라 병사·시민·노예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를 조명했다. 일본군위안부 피해 여성과의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거나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생존 노병(老兵) 인터뷰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 있는 작업이다.

신문기사나 정부 공식 기록이 아닌 자서전·일기·편지 같은 개인의 사적(私的)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역사 서술 방법론을 미시사(微視史)라고 한다. ‘미시사란 무엇인가'(2000)를 엮은 곽차섭 부산대 사학과 교수는 “지배 엘리트의 관점으로 서술된 역사가 동시대를 살아갔던 무수한 사람의 삶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느냐는 문제의식이 미시사의 핵심”이라며 “최근 우리 사회의 ‘기억 보존’ 운동 역시 사료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확보하려 한다는 점에서 미시사적 역사 서술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과 한국국가기록연구원은 2013년 ‘인간과 기억 아카이브’ 사업을 시작했다. 매년 5월 12일 학생·직장인·주부 등 평범한 사람이 쓴 일기를 향후 2113년까지 100년 동안 모으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1500여명의 일기를 수집했다.

임진희 명지대 교수는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 서술은 대통령·정부 중심의 공공 영역에 국한돼 있었다”며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동시대인들의 내면이 어떠했는지, 시대적 사건에 우연히 말려든 개인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등을 100년 뒤 사람들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26/2015062602129.htm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26/2015062602129.html

본 기사는 조선일보 2015년 6월 27일(토) 발행 기사 중 일부로 김형래 본인이 인터뷰이로 원선우 기자와 인터뷰 한 사실이 있기에 게재하며 무단복제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있으면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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