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15일
03-29-0800

폴 고갱(Paul Gauguin, 1848년 6월 7일~ 1903년 5월 8일)과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on Gogh, 1853년 3월 30일~ 1890년 7월 29일) 는 동시대를 풍미한 화가로 후기 인상파의 주요 인물로, 각각 표현주의와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고흐’의 작품은 한국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의 전시회도 자주 열립니다. 그러나 저와 같은 직업을 가졌던 ‘고갱’에 대한 비판적인 여러 시각에 대해서는 해명이나 설명도 없이 그냥 그런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버리고 지나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고갱은 그렇듯 좋은 그림만 남긴 나쁜 사람이었을까요?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2019년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에서 열렸던 폴 고갱의 초상화 전시회는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잠잠하던 미술계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고갱 프랑스의 화가를 남태평양의 미성년 소녀들에게 매독을 옮긴 식민주의자로 낙인찍힌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화상 (Self-portrait with Manao Tupapau) 》(1892~1893) Musée d'Orsay, Paris 소장
《자화상 (Self-portrait with Manao Tupapau) 》(1892~1893) Musée d’Orsay, Paris 소장

고갱은 남태평양 섬 전역에 걸쳐 미성년자 소녀들에게 매독을 퍼뜨린 프랑스 식민지주의자가 아니었습니까?

이 전시회는 취소 문화의 표적이 되었고, 그의 그림을 불태워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저는 항상 고갱의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저는 그림을 사랑하면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부정직하고 위선적인 입장에 있을 수 없었습니다.

톺아보기 시작했습니다. 목적은 단순히 사실을 발견하여 제 감정을 진실에 대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과로 많은 새로운 측면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1848년 프랑스 혁명 이후 저널니스트 아버지 클로비스 고갱은 신문에 낸 기고문 때문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령을 받았고, 가족은 망명을 강요당했습니다. 고갱 가족은 페루로 출발했습니다. 클로비스는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사망하였고 페루에는 어머니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이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페루에서 어머니 알린을 맞이한 외종조부는 차기 대통령직이 확실한 정치인이었고 알린과 식솔을 환대하였습니다. 훗날 고갱은 페루에서의 시기를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족하고 행복한 때로 회상하였습니다. 그의 생애 처음 7년은 페루에서 보냈지만, 그는 학교에 가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습니다. 적응하는 것은 고갱의 장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먹을 쥐고 으르렁거렸다. “나는 페루에서 온 야생 동물이다.” 친구들은 움찔했습니다.

1854년 후견자가 실각하자 알린 가족은 더 이상 페루에 머무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어머니 알린은 아이들을 데리고 시아버지 기욤 고갱이 살고 있는 오를레앙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오를레앙은 알린의 어머니와 배다른 귀족 형제인 트리스탕 모스코소 가문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었고 알린은 이들의 괴롭힘을 피해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린은 파리에서 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이후 널리 알려진 젊은 고갱의 삶은 생략하겠습니다.

고갱이 매독(Syphilis)에 걸린 것은 사실일까요?

1903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갱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작은 섬 히바오아(Hiva Oa)에서 마지막 3년을 보냈습니다. 2000년, 그곳의 시장이 이 오두막을 원래 위치에 복원하기로 결정했고, 이 작업은 고갱의 사망 100주년을 맞이하는 시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발굴 과정에서 유리병 안에 담긴 네 개의 사람의 치아가 발견되었습니다. 케임브리지의 인간 게놈 프로젝트팀이 이 치아를 조사한 결과, 고갱의 치아임이 밝혀졌습니다. 그 후, 당시 매독을 진단하는 표준 검사 방법인 카드뮴, 수은, 비소 검사를 실시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매독에 걸리지 않았었습니다, 습진(eczema)과 홍반(erysipelas)에 걸렸습니다.

하지만 더 알고 싶었습니다. 매독은 그 섬들에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가장 큰 섬인 타히티(Tahiti)에 있는 그의 주치의가 그 질병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화가는 매독이 아니라 습진과 홍반에 걸렸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다음은 미성년 소녀들입니다. 프랑스와 식민지 지역의 성교 동의 연령(age of consent, 법이 정한 나이)은 13세였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에서는 10세에서 12세 사이, 일본은 그 연령이 16세입니다. 당시의 맥락에서 보면, 고갱의 폴리네시아 연인들은 예외 없이 ‘성인’이었습니다. 비록 역겹기는 하지만, 평균수명이 40세 전후였던 당시로서는 불법적인 일이나 심지어 특이한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중혼죄를 저지른 것일까요?

고갱은 세 명의 진지한 연애 관계를 맺었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파트너인 테하마나(Tehamana)는 13살로 추정되었지만, 최근에 발견된 출생증명서에 따르면 그녀는 15살이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고갱은 현지 관습을 따랐습니다. 성적으로 경험이 많은 소녀들은 가족에 의해 제공되었습니다. 돈이 오간 적은 없습니다. 몇 주 후, 소녀는 새로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인지 결정하기 위해 한동안 가족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세평은 달랐습니다. 당시 고갱은 44세였습니다. 고갱은 메테와 정식으로 이혼한 것도 아니어서 중혼죄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미성년자 약취에 해당하기 때문에 본국이라면 중형을 선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럽 남성이 식민지에서 벌이는 성적 방종은 불문에 부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로마법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테하마나는 고갱에게 돌아갔습니다. 강요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고갱의 후일 연인들처럼 자유롭게 오고 가고, 원할 경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다른 연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머무는 데 있어 금전적인 이득은 없었습니다: 고갱은 해변 오두막에 살았지만, 일반 마을 사람들보다 부유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논란의 여지는 있습니다.

그가 몇 년 동안 파리로 돌아가 그림을 팔기 위해 돌아왔을 때, 테하마나는 재혼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그녀는 옛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몇 주 동안 그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것은 애정을 증명합니다.

고갱은 덴마크인 아내 메테-소피 가드(Mette Sophie Gad)와 노르웨이에 사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두 언어로 된 편지와 아들이 쓴 번역되지 않은 긴 가족 회고록이 있습니다. 가장 확실한 것 중에 하나는 남녀 평등에 대한 고갱의 강한 신념이었습니다.

고갱의 할머니 플로라 트리스탄(Flora Tristan, 1803–1844)은 여성 인권 운동가로서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고갱은 할머니가 쓴 글을 소중히 간직했습니다. 그는 아내를 포함한 주변의 여성들이 독립을 통해 성취감을 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격려했습니다.

이 작품은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테마나와의 복잡한 관계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1893년에 완성된 작품 《테하마나는 많은 부모가 있다(Tehamana Has Many Parents》 (1893)가 있는데, 이는 한 개인의 초상화이지만, 변화하는 문화의 초상화이기도 합니다.

《테하마나는 많은 부모가 있다(Merahi metua no Tehamana [Tehamana Has Many Parents or The Ancestors of Tehamana]》 (1893), Art of Chicago 소장
《테하마나는 많은 부모가 있다(Merahi metua no Tehamana [Tehamana Has Many Parents or The Ancestors of Tehamana]》 (1893), Art of Chicago 소장

테하마나는 선교사 복장을 하고 있지만, 폴리네시아 부채를 들고 있습니다. 그녀 뒤에 있는 벽에는 신비로운 상형문자가 있는데, 선교사들에 의해 파괴된 고대 섬 문화에 대한 언급입니다. 그 아래에는 달과 창조의 폴리네시아 여신인 히나가 서 있습니다. 고갱은 테하마나를 여러 문화와 여러 혈통의 종합체라고 생각했는데, 고갱은 우리가 모두 그렇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마나오 투파파우(Manao Tupapau)》즉, ‘죽은 자의 시선’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고갱의 명성에 가장 큰 타격을 입힌 그림입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1892년에 제작된 이 그림은 타히티의 청소년 테하우라마나(Teha’amana)를 모델로 하여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비평가들은 고갱이 테하우라마나의 두려움을 tupapau로 설명하는 것이 지나치게 단순하며, 실제로는 고갱 자신의 행동이 테하우라마나의 두려움의 원인일 수 있고, 여성 혐오적이고, 착취적이며, 식민주의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죽은 자의 시선 (Manaò tupapaú [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2) Buffalo AKG Art Museum 소장
《죽은 자의 시선 (Manaò tupapaú [Spirit of the Dead Watching]) 》(1892) Buffalo AKG Art Museum 소장

그러나 이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도 있는데, 이 경우 고갱이 좀 더 배려심이 많았음을 시사합니다. 테하마나에게 기독교는 대부분의 폴리네시아인과 마찬가지로 표면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여러분의 영혼을 훔쳐가는 악령인 투파파우(Tupapau)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항상 등불을 켜 놓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등불이 꺼졌고 고갱은 그녀가 어둠에 겁에 질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투파파우를 상징하는 노파를 통해 그녀의 두려움을 구현하여 우리를 위해 침대 밑에 서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포착하고 싶었던 것은 테하마나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고 고갱은 말했습니다. 단순한 초자연적 신념을 묘사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사회적 맥락을 담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고갱이 아내인 메테에게 그림을 보내 전시하고 덴마크에서 팔려고 했을 때, 그녀는 그 그림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그 그림을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고갱의 아내 메테 자신도 어둠을 두려워해서 항상 램프를 켜 놓았다고 합니다.

고갱은 문화적 종합을 믿었는데, 오늘날에는 종종 문화적 도용으로 비난받습니다. 그는 인류를 인종, 신념, 색깔의 위대한 종합으로 보았습니다.

그가 타히티에서 그린 첫 번째 그림 중 하나는 ‘Ia Orana Maria’, 즉 《성모 마리아(Hail Mary)》입니다. 이 1891년 작품은 폴리네시아의 성모 마리아가 폴리네시아의 아기 예수를 어깨에 메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전시된 이 그림은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성모마리아 (Ia Orana Maria [Hail Mary]) 》(1891) The Met Fifth Avenue 소장
《성모마리아 (Ia Orana Maria [Hail Mary]) 》(1891) The Met Fifth Avenue 소장

백인이 아닌 성스러운 가족! 비평가들 눈에는 가시가 박힌 그림이었습니다.

1951년이 되어서야 교황의 회칙이 그러한 것을 표현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타히티의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프랑스 식민지 정권에 충격을 받은 고갱은 지역 신문에 기사를 썼고, 나중에 프랑스 관리들의 부패와 불의를 폭로하는 자신의 신문을 창간했습니다. 그는 또한 더 공정한 과세와 대우를 요청하는 편지를 파리의 정부에 보냈습니다. 타히티의 총독은 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했지만, 부패한 식민지 법원에서 고갱이 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800km 떨어진 프랑스 식민지인 히바오아로 도망쳤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유명인처럼 군중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그림 때문이 아니라, 저널리즘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였습니다. 히바 오아(Hiva Oa)는 누드, 일부다처제, 신성한 문신 예술, 에로틱한 우파우파(Upa Upa) 춤의 공연을 금지한 무시무시한 청교도인 마틴 주교가 운영했습니다.

마틴 주교는 모든 원주민 아이가 14살이 될 때까지 프랑스 가톨릭 기숙학교에 보내도록 강요했습니다. 아이들은 프랑스 교과 과정을 배우고 프랑스어만 사용하도록 허용되었으며, 그 목적은 폴리네시아의 언어, 문화, 가족 구조, 국가 정체성을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의 가족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고갱은 학교에서 3km 이내에 사는 아이들만 학교에 다닐 필요가 있다는 법을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시골로 이주했습니다. 언어, 문화, 가족의 단합은 살아남았고 고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인기를 얻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이름을 바꾸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영혼을 바꾼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히바오아섬에서 고갱은 원주민에 대한 더 공정한 대우를 요구하며 파리에 탄원서를 보내고, 현지 법원에서 원주민의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고갱을 사랑했지만, 프랑스인들은 고갱을 미워했습니다. 총독은 고갱이 “원주민의 악행을 옹호하고, 법의 지배를 파괴하며, 위험한 무정부주의자”라고 파리에 보고했습니다.

고갱은 감시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한 경찰관이 뇌물을 받았다고 비난하자, 지사는 명예훼손죄로 대응했습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지방 판사가 심리했고, 고갱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500프랑의 벌금형과 3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습니다. 1년 후, 이 사건은 재심에 회부되었고, 고갱의 고발이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러나 그 무렵, 작가는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습니다. 오랜 병마와 약물 중독에 시달리던 폴 고갱은 1903년 5월 8일 사망했던 것입니다. 진실은 이렇게 묻혔습니다.

수 많은 논쟁의 중심에서 떠나지 못하는 화가 폴 고갱.

폴 고갱, 톺아보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