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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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5월 23일 개막하는 한 전시회가 시니어 세대에게 묵직한 질문 하나를 던지고 있습니다. 영국 월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이 11월 29일까지 선보이는 〈윈스턴 처칠: 화가(Winston Churchill: Painter)〉 전시가 그것입니다. 영국 일간지 더 타임스(The Times) 2026년 5월 21일 자에 실린 미술 평론가 로라 프리먼(Laura Freeman)의 리뷰에 따르면, 이번 전시는 처칠이 50여 년에 걸쳐 남긴 500여 점의 유화 가운데 50여 점을 한자리에 모은 자리라고 합니다. 정치가로서의 처칠이 아니라, 이젤 앞에 선 한 사람의 화가로서의 처칠을 조명하는 기획입니다.

하나, 처칠의 또 다른 인생, 캔버스 위에 있었다

전시장 첫 방에는 마할스틱(mahlstick·그림 그릴 때 손을 받치는 막대)을 왼손에, 붓을 오른손에 든 처칠의 모습이 서 있다고 합니다. 입에는 시가를 물고, 스튜디오 안에서도 중절모를 벗지 않은 채입니다. 더 타임스의 리뷰는 처칠이 공직에 있을 때나 물러나 있을 때나, 본인이 “블랙 독(black dog)”이라 부르던 우울증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50여 년간 붓을 놓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평론가는 처칠의 예술적 위치를 냉정하게 짚습니다. 거장 반열에 오른 화가는 아니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기꺼이 배우고자 한, 결코 지치지 않는 아마추어”였다는 평가입니다. 그가 존 레이버리(John Lavery), 윌리엄 니콜슨(William Nicholson), 월터 시커트(Walter Sickert) 같은 당대 거장들에게 직접 가르침을 청했고, 모네의 수련과 반 고흐의 붓꽃에 오마주를 시도했다는 사실은 이번 전시의 곳곳에서 확인된다고 합니다. 정물화 속에는 그가 좋아한 조니 워커 레드 라벨 위스키가 등장하고, 정원과 풍경을 그린 그림 다수는 자신을 환대해 준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그려졌다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습니다.

둘, ‘배후지(hinterland)’라는 단어가 품은 지혜

이번 전시에서 가장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은 그림의 수준이 아니라, 처칠 자신이 남긴 한 마디입니다. “자신의 지역구, 자신의 도시, 자신의 국가에 100% 전념하고 있다고 말하는 정치인을 조심하라. 취미와 자신만의 배후지를 갖는 것에는 아주 많은 장점이 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한 단어가 바로 ‘배후지(hinterland)’입니다. 원래는 항구의 후방, 즉 도시의 뒤편에 자리 잡은 내륙 지역을 가리키는 지리학 용어지만, 영어권에서는 ‘한 사람의 공적 역할 뒤편에 마련된 사적인 정신의 영토’를 의미하는 비유로 자주 쓰입니다.

처칠은 “그림 그리기가 없었다면 나는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헤쳐 나간 지도자가 남긴 이 고백은, 인간이 감당해야 하는 중압감의 무게와 그 무게를 견디게 해 주는 사적인 영토의 가치를 동시에 증언합니다. 공적 삶의 광장이 클수록 사적 삶의 배후지가 깊어야 한다는 통찰입니다.

셋, 아마추어라는 단어의 위엄

처칠의 그림 가운데 상당수는 거실 한쪽이나 정원 풍경을 담은,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쾌한 그림 엽서” 같은 것들입니다. 받으면 기쁘되, 굳이 돈을 주고 사지는 않을 정도의 작품이라는 솔직한 평가도 함께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전시의 진정한 미덕은 바로 그 지점에 있습니다. 처칠은 작품을 팔기 위해 그리지 않았습니다. 새로 나온 ‘카드뮴 로즈(cadmium rose)’ 물감 한 튜브를 요청하기 위해 전보를 보내고, 다음 작품에서는 더 잘해 보겠다는 희망으로 캔버스 앞에 다시 앉았던 사람입니다.

아마추어(amateur)라는 단어는 본래 ‘사랑하다’라는 라틴어 ‘아마레(amare)’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보수를 위해 일하는 직업인이 아니라, 그 행위 자체를 사랑하기에 행하는 사람이 곧 아마추어입니다. 시니어의 취미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위엄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넷, 한국 시니어의 ‘취미 빈곤’이라는 그늘

한국 사회의 시니어들이 처한 현실을 돌아보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평생을 직장과 가족에 헌신한 결과, 정작 은퇴 이후에는 자신만의 배후지가 비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일이 곧 자아였고, 직함이 곧 정체성이었던 세대가 그 갑옷을 벗었을 때 마주하는 공허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이때 취미는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아닙니다. 처칠이 그러했듯, 그것은 우울이라는 검은 개를 다스리는 정신적 방파제이고, 자신이 여전히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거울입니다. 보수적인 시각에서 보더라도, 취미는 사회 안전망 가운데 가장 비용이 적게 들면서도 가장 효과가 큰 자기 돌봄의 수단입니다. 국가나 자녀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정신을 지켜 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섯, 두 가지 취미, 그리고 정중한 권유

저 또한 두 가지 취미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글쓰기이며, 또 하나는 관악기를 배우는 일입니다. 현역 시절에는 사진을 찍었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도구는 달라졌으나 마음은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사랑하여 거듭 서툴게 시도해 보는 자리, 그것이 곧 저의 배후지입니다.

처칠의 전시가 우리에게 일러 주는 결론은 명료합니다. 시니어의 품격은 이력서의 마지막 줄이 아니라,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거장이 되시라는 권유가 아닙니다. 다만 한 자루의 붓이든, 한 권의 노트든, 한 개의 악기든, 작은 카메라든 손에 잡아 보시기를 권합니다. 잘 그릴 필요도, 잘 쓸 필요도, 잘 불 필요도 없습니다. 처칠도 그러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사랑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사랑이 시니어의 후반전을 지켜 줄 가장 든든한 배후지가 될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캐어유 뉴스 편집장 김형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