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3월 02일
03-01-2355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던 1457년 김시습은 단종이 유배된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를 찾아가 굳게 막힌 유배지를 향해 멀리서 절을 올리며 신하로서의 예를 다하는 애통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당시 김시습은 23세였습니다.

김시습은 단종의 유배와 죽음, 세조의 왕위 찬탈 등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겪은 후 다음과 같은 행보와 문학적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 유랑 생활의 시작: 어린 시절 ‘오세신동’으로 불리며 장차 조선을 위해 큰 뜻을 품고 삼각산 깊은 곳에서 공부하던 그는, 세조의 왕위 찬탈 소식에 3일간 통곡하며 보던 책을 모두 불살라 버렸습니다.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설잠’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어 세상을 등졌습니다.
    • 사육신 시신 수습: 1456년(22세 무렵), 단종 복위 운동을 하다 처참하게 거열형을 당해 거리에 버려진 사육신의 시신을 아무도 수습하지 못할 때, 김시습이 나서서 몰래 거두어 노량진 근처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 방랑과 집필: 단종이 유배되던 1457년 전후로 그는 전국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으며, 24세가 되던 해(1458년 무렵)에는 관서 지역을 유랑하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탕유관서록』이라는 시집을 엮어냈습니다.
    • 초혼제와 제단 마련: 영월을 떠난 김시습은 충남 공주의 계룡산 동학사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사육신을 위한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을 위한 제단을 마련하여 그들의 넋을 기렸습니다.
    • 방랑과 시집 집필: 김시습은 세조가 다스리는 불의한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머리를 깎은 채 전국 팔도를 유랑했습니다. 그는 10여 년간 관서, 관동, 호남 지역 등을 떠돌며 450여 수에 달하는 시를 지었고, 이를 모아 『탕유관서록』,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등의 책으로 엮어냈습니다.

단종이 유배되던 1457년에 김시습은 23세였으며, 부조리한 세상에 분노하여 입신양명의 뜻을 꺾고 막 길고 험난한 방랑을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 전기의 학자이자 문학가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강릉김씨(江陵金氏) 가문에서 매우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1. 계보상 위치: 강릉김씨 23세손

김시습은 강릉김씨의 시조인 명주군왕(冥州郡王) 김주원(金周元)의 23세손입니다.

    • 시조 김주원: 신라 태종무열왕의 5세손으로, 원래 왕위 계승 서열에 있었으나 폭우로 인해 궁에 들어가지 못해 원성왕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명주(지금의 강릉)로 은거하여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 김시습의 직계: 그의 증조부는 안주교수 김윤주, 조부는 오위부장 김겸간, 부친은 충순위 부사 김일성입니다.


2. 가문에 미친 영향

김시습은 강릉김씨 가문을 빛낸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꼽히며, 가문의 정신적·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가문의 도덕적 위상 확립 (생육신): 수양대군(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평생을 야인으로 살았던 그의 절개와 지조는 강릉김씨 가문이 ‘충절과 의리의 가문’이라는 명성을 얻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훗날 숙종과 정조 대에 이르러 국가적으로 그의 충절이 공식 인정받으며 가문의 명예가 더욱 드높아졌습니다.

    • 학문적·문학적 성취: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하는 등 당대 최고의 천재로 불렸던 그의 학문적 깊이는 강릉김씨 가문을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각인시켰습니다. 선조는 이이(율곡)에게 명하여 그의 전기를 쓰게 할 만큼 그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 문중의 구심점: 현재 강릉시 성산면에 있는 청간사(淸簡祠)에서 매년 그를 기리는 다례제가 봉행되고 있습니다. 이는 강릉김씨 문중이 결속하고 조상의 정신을 계승하는 중요한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참고: 김시습은 생전에 “나는 본래 강릉 사람이다”라며 자신의 뿌리가 강릉에 있음을 잊지 않았고, 그의 저서 《매월당집》 등에도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투영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