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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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치과 의사 부족이 주는 교훈

영국에서 치과 의사 부족 사태가 장기화되며, 고령층의 치료 접근성이 심각하게 저하되고 있다는 소식은 우리 사회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한 영국 의원이 “87세 노모가 치과 예약이 어려워 스스로 펜치로 이를 뽑으려 했다”고 밝힌 사례는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제도적 병목이 개인의 기본적 의료 권리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문제는 단순히 의사의 숫자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영국에는 해외에서 치과 면허를 취득하고 충분한 경력을 갖춘 전문 인력이 수천 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영국 치과청(GDC)이 운영하는 ‘해외 등록 시험(ORE)’이 극도로 제한된 구조를 유지하면서, 거주 중인 전문가들이 실제 의료 현장에 투입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의료 인력은 ‘부족’하지만 동시에 ‘있어도 활용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세계 여러 나라가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구조적 문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전문 인력을 검증할 필요성은 분명 존재하지만, 제도적 절차가 현실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면 결국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옵니다. 특히 고령층은 병원 접근성의 변화에 가장 민감한 계층이기 때문에 제도적 병목은 곧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관료주의적 절차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장벽’

영국의 문제는 단순히 시험 정원이 작은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시험이 연기·취소되면서 대기 인원은 8천 명에 육박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정원 확대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아 병목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응시자들은 시험 접수 페이지에 0.1초라도 빨리 접속하기 위해 유선 인터넷을 사용하는 등 극심한 경쟁을 벌여야 하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절차적 과부하는 고급 인력을 낭비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에콰도르에서 면허를 취득하고 스페인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은 치과 의사가 시험을 치를 기회를 얻지 못해 ‘치과 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도가 현실을 얼마나 따라가지 못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의료계에서는 “대기 기간이 길수록 임상기술이 퇴화해 시험 합격 가능성도 낮아지는 악순환이 벌어진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전문 인력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구조는 개인의 커리어 손실을 넘어 국가적 손실이 됩니다. 실제로 영국 통계에 따르면 비EU 출신 고학력 이민자의 약 30%가 자신의 자격보다 낮은 수준의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비효율을 넘어, 국가 전체의 인적 자원 활용도 측면에서 심각한 비용을 초래합니다.

NHS(영국 의료보험)의 구조적 문제… 시험 확대만으로는 해결 안 돼

영국 치과청(GDC)은 제도 개선을 약속하며 새로운 시험 운영기관 모델을 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호주처럼 특정 해외 치대 학위를 인정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더 깊습니다. 영국의 공공 의료체계(NHS)가 치과 의사들에게 충분한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어, 설령 시험을 통과하더라도 많은 의사들이 민간 진료나 해외 취업을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즉, 인력 공급의 병목만 해결한다고 해서 의료 접근성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공공 진료 인력의 수요·공급 구조를 보다 근본적으로 개선해야 하며, 그 중심에는 ‘합리적 보상체계’가 자리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가 얻어야 할 교훈

이 사례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전문 인력을 검증하는 절차는 필요하지만, 과도한 행정 장벽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의료 서비스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국민 생활의 기반이라는 점을 정책이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가

고령층이 의료 시스템의 변화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만큼, 정책 설계 시 시니어의 관점이 얼마나 고려되고 있는가

한국 역시 의사 인력 확충, 필수 의료 강화, 지역 의료 격차 해소 등 비슷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특히 치과의 경우 고령층에서 치주 질환, 신경 치료, 임플란트 치료 수요가 급증하고 있어 의료 접근성은 삶의 질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영국 사례에서 보듯이 의료 인력 문제는 단순히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와 운영의 문제’입니다. 제도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면, 의료 서비스는 공급이 있어도 국민이 접근할 수 없는 공백 상태가 됩니다. 정책적 목표는 늘 ‘안전한 진료’와 ‘높은 전문성’이지만, 그 과정에서 지나친 행정적 장벽이 생긴다면 오히려 국민에게 피해가 돌아갑니다.

시니어에게 필요한 의료 접근성의 재설계

고령층은 병원 접근성이 떨어지면 치아 건강뿐 아니라 전신 건강까지 악화될 수 있습니다. 씹는 기능이 약해지면 영양 섭취가 불균형해지고, 이는 근감소증·체력 저하·만성질환 악화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치과 접근성은 단순한 ‘구강 관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건강 수명 전체를 좌우하는 요소입니다.

따라서 의료 정책은 시니어의 특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합니다. 예약 인프라 개선, 지역별 치과 의료 격차 해소, 전문 인력 확대 등 실질적인 정책적 노력이 병행될 때 고령층의 삶의 질은 실질적으로 향상될 것입니다.

영국 사례는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전문 인력이 있어도 제도가 받쳐주지 않으면 의료 공백은 더 커진다.”

우리 사회가 이를 타산지석 삼아, 보다 체계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의료 접근성 정책을 마련하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