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극 『마조리 프라임』이 던지는 노년의 질문
인공지능 기술이 일상의 여러 영역으로 스며들면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일을 기계에 맡기고 있습니다. 일정 관리, 길 찾기, 건강 기록은 물론이고, 최근에는 대화와 정서적 교류까지 기술이 보조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브로드웨이에서 다시 공연되고 있는 연극 『마조리 프라임(Marjorie Prime)』은 이러한 변화가 노년의 삶과 가족 관계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를 차분하게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연극의 중심에는 80대 중반의 여성 마조리가 있습니다. 그녀는 기억을 점차 잃어가고 있으며, 가족은 그녀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이미 세상을 떠난 남편을 본뜬 인공지능 홀로그램, 이른바 ‘프라임’를 곁에 둡니다. 프라임은 과거의 기록과 대화를 학습하며 점점 더 남편과 닮아갑니다. 반면 인간인 마조리는 하루하루 기억이 흐릿해집니다. 이 대비는 노년기에 많은 분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점점 기억을 잃어가지만, 세상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저장하고 축적합니다.
노년기에 기억은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기억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증명하는 정체성의 토대입니다. 배우자의 얼굴, 자녀의 어린 시절, 함께 나눈 대화와 갈등의 순간들은 모두 기억을 통해 현재와 이어집니다. 『마조리 프라임』은 기술이 이 기억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는지, 혹은 대신하는 순간 어떤 균열이 생기는지를 묻습니다.
딸 테스는 프라임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녀는 기술이 관심과 공감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진짜 마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지점은 오늘날 시니어 세대가 디지털 기술을 대할 때 느끼는 양가적 감정과도 닮아 있습니다. 스마트폰이나 인공지능 서비스가 분명 편리함과 안전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인간 관계를 대체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불안도 함께 존재합니다.
그러나 연극은 기술을 단순히 비판하지 않습니다. 사위 존은 프라임이 마조리에게 일정한 안정과 위안을 제공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실제로 노년기에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고립과 외로움입니다.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자녀와의 왕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말벗이 되어주는 존재는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이 점에서 기술은 분명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도구의 역할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입니다. 『마조리 프라임』은 기술이 인간을 대신해 기억하고 말해 줄 수는 있어도, 인간이 지닌 불완전함과 예측 불가능성까지 담아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대화에는 때로는 침묵이 있고, 말실수가 있으며, 감정의 과잉과 결핍이 공존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인간 관계를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이기도 합니다.
연극 후반부에서 마조리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를 본뜬 프라임은 남습니다. 그리고 마조리와 갈등이 많았던 딸 테스조차 결국 어머니의 프라임과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이 장면은 기술이 사랑을 대신한다기보다, 상실을 견디기 위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노년의 삶에서 우리는 점점 더 많은 이별을 경험합니다. 그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입니다.
시니어 세대에게 『마조리 프라임』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기술은 삶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삶 그 자체가 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기억이 흐려지는 순간에도, 인간은 여전히 감정의 주체이며 관계의 중심입니다. 기술이 제공하는 편리함과 위안을 지혜롭게 활용하되, 그것이 인간 관계를 대신하도록 내어주지는 말아야 합니다.
결국 이 연극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만약 나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남고 싶은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싶은가. 노년은 기술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는 시기이지만, 동시에 인간다움을 가장 단단히 지켜야 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마조리 프라임』은 그 사실을 조용히, 그러나 깊이 있게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