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07일
11-21-1800

– お見合い (オミアイ, 오미아이, 사랑은 뒷전으로, Love Takes a Backseat)

혼인을 현대적 의미로 이해하는 관념은 일본 역사에서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헤이안 시대(794–1185)에는 ‘결혼’이 영구적 제도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상류계급의 남성은 생애 동안 여러 배우자를 두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하류계급 남성은 경제적 부담 때문에 한 번에 한 명의 아내만 둘 수 있었으나, 상대 여성의 집안 지위가 낮아 정치적 압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경우에는 비교적 쉽게 아내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남성은 배우자를 본가로 들이지 않거나 독립된 별채를 마련하지 않음으로써 특정 배우자에게 ‘묶이는’ 것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은 개인 간의 결합이라기보다 ‘가(家)’ 중심의 제도였으며, 자녀 역시 부모 개인이 아닌 가문에 속하는 존재였습니다.

11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일본의 혼인 제도는 더욱 정치적으로 변모해 지방 권력에 의해 통제되었습니다. 혼인의 목적은 단순히 자손을 잇는 데서 가문의 지속, 사회적 지위 보전, 상호 협력 확보 등으로 이동했습니다. 상류층에서는 다처가 점차 줄고 혼인은 정치적 동맹의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에도 시대(1603–1868) 초기, 막부는 사회를 철저히 관료화하여 신분을 사무라이·장인·상인·농민으로 고정시켰습니다. 각 가문은 지방 관청에 등록해야 했고, ‘호적(戸籍, こせき, 코세끼)’을 통해 신분이 확정되었습니다. 혼인은 먼저 중매 역할을 하는 관리가 신분 적합성을 검토해 승인한 후 상급 기관의 재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농민의 자녀만이 전통적으로 상대적으로 선택권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여러 사전 교제 관계를 유지하다 임신이 발생했을 때 결혼으로 이어지는 방식이 존재했습니다. 젊은 남녀는 ‘젊은이들의 숙소(若者宿, わかものやど, 와카모노야도)’에서 만났고, 남성이 여성의 집을 야간 방문하는 ‘夜這い(よばい, 요바이)’ 관습도 있었습니다. 여성의 허락하에 이러한 방문이 지속되어 임신이 이루어지면 결혼이 성립되었습니다.

1868년 막부 체제가 붕괴되고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혼인은 공식적 정부 승인 대상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호적 제도는 유지되었고, 가문은 계속해 자녀들의 혼인을 스스로 주선하였습니다. 초면에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관습을 ‘미아이(見合い, みあい)’라 했고, 보다 정중한 표현으로 ‘오미아이(お見合い)’라 불렀습니다.

오미아이 만남은 친척, 고용주 또는 전문 중매인이 양가의 사회적 수준을 면밀히 조사한 후 사진을 교환하고 조율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오미아이 결혼(お見合い結婚)은 1960년대까지 일본에서 혼인의 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서양식 데이트 문화가 대중화된 것은 1950년대 중반 이후이며, 그제야 연애결혼(恋愛結婚)이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특히 상류층에서는 경제적·사회적·정치적 결합의 성격 때문에 오미아이 방식이 여전히 널리 남아 있습니다. 현대에는 대규모 결혼정보회사와 IT 기반 매칭 시스템이 전통적인 중매인과 다방·호텔 라운지에서의 오미아이를 대부분 대체하고 있습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는 풍습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은가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만남으로 결혼까지 이어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