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원인이 유전적 요인이 아닌 문화적 특수성에 따른 결과다
지금 유럽은 조용하지 않습니다. 이민자 범죄를 둘러싼 논쟁이 정치권을 넘어 일상의 광장으로 번지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이민자는 위험하다”는 낙인이 거세게 달아오르고, 반대쪽에서는 “이민자를 범죄자로 모는 것은 혐오”라는 방어막이 단단하게 쳐집니다. 두 진영 모두 감정이 앞서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습니다. 팩트보다 진영 논리가 먼저인 세상에서, 데이터를 들고 나온 한 정신과 의사의 목소리가 주목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30년의 현장이 낳은 불편한 질문
독일과 스위스에서 30년 이상 폭력 범죄자 및 성범죄자를 상담해 온 법정신의학자 프랑크 우르바니오크(Frank Urbaniok) 박사는 최근 저서 《이민의 어두운 면: 숫자, 사실, 해결책(Schattenseiten der Migration: Zahlen, Fakten, Lösungen)》을 통해 유럽 사회에 불편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2026년 4월 9일 자 오스트리아 일간지 《Die Presse》 10~11면에 실린 그의 인터뷰는 유럽 언론 사이에서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우르바니오크 박사는 스스로 “무소속이며 모든 종류의 극단주의에 반대한다”고 전제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내놓은 분석은 날카롭습니다. 특정 국가 출신 이민자들이 강력범죄 분야에서 현지인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높은 비율로 과잉 대표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제시한 수치는 구체적입니다. 오스트리아 경찰 범죄 통계와 수감자 기록을 분석한 결과, 세르비아 출신 이민자의 위험 상해죄 유죄 판결율은 현지인보다 234% 높았고, 시리아 출신은 480% 높았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살인 및 상해 관련 수감자 비율은 1,023%, 알제리 출신은 12,618%의 과잉 대표를 기록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 독자 여러분께 한 가지를 분명히 밝혀 두어야 합니다. 위 수치는 우르바니오크 박사 개인의 분석과 주장을 인용한 것이며, 그 기반이 되는 오스트리아 경찰 통계의 구체적인 산출 방식이나 표본 조건은 현재까지 공개된 자료에서 명확히 확인되지 않습니다. 수치 자체가 아닌 그 수치가 가리키는 방향—즉 구조적 원인에 대한 질문—이 이 칼럼의 핵심입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화가 각인됩니다
이민자 범죄를 설명하는 기존의 논리는 대체로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빈곤과 사회적 배제입니다. 낯선 땅에서 제대로 된 교육과 일자리를 갖지 못한 이들이 생존의 벼랑 끝에서 범죄로 내몰린다는 설명입니다. 둘째는 전쟁과 트라우마입니다. 분쟁 지역 출신 난민들이 심리적 상흔을 안고 이주하면서 폭력 성향이 강화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설명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르바니오크 박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이 두 요인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빈곤 조건, 같은 난민 신분이라 하더라도 출신 국가에 따라 강력범죄율이 수십 배, 수백 배씩 벌어진다는 사실이 그 근거입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문화적 특수성에 따른 각인입니다. 특정 사회에서 오랫동안 작동해 온 가부장적 여성관—여성을 독립적 인격체가 아닌 가문이나 남성의 소유물로 바라보는 시선—이 폭력 행사에 대한 정당성을 내면화시킨다는 분석입니다. 여기에 종교적 극단주의가 결합될 때, 폭력은 ‘잘못’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 혹은 ‘신성한 의무’로 재코딩됩니다.
이 각인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집단의 문화적 서사 속에서 형성됩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이민 1세대가 새로운 사회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 각인은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그것이 2세대, 3세대로 전달된다는 데 있습니다. 부모의 언어, 가족 안의 위계 질서, 종교 공동체 안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모든 것이 이민 자녀 세대의 세계관을 조형합니다. 현지 학교를 다니고 현지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더라도, 가정 안에서 작동하는 문화적 코드는 별개의 회로로 살아남습니다.
유럽의 여러 연구자들이 우려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이민 2~3세대의 범죄율이 1세대보다 낮아지지 않거나 오히려 높아지는 현상이 일부 국가에서 관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 적응 실패의 문제가 아닙니다. 문화적 통합의 실패입니다.
‘포용’이라는 이름의 무책임
유럽 각국은 오랫동안 이민 정책의 핵심 가치로 ‘포용(inclusion)’을 내세워 왔습니다. 낯선 이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다름을 존중하며, 사회적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 아름다운 원칙입니다. 인구 감소와 노동력 부족이라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한 유럽 국가들에게 이민은 단순한 인도주의적 과제를 넘어, 경제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포용이 무조건적 수용과 동의어가 될 때, 그것은 포용이 아니라 회피입니다. 이민자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가져오는 문화적 전제—특히 인권과 법치에 정면으로 충돌하는 전제—에 대해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는 것은, 장기적으로 이민자 본인에게도 수용 사회에게도 이롭지 않습니다.
우르바니오크 박사가 제안하는 개념은 ‘지원(Fördern)과 요구(Fordern)의 균형’입니다. 언어 교육을 제공하고, 직업 훈련을 지원하고, 주거 기반을 마련해 주는 것—이 모든 지원은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회가 쌓아 온 법과 질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권리, 폭력에 대한 절대적 금지라는 원칙을 받아들일 것을 분명하게 요구해야 합니다. 이 요구는 차별이 아닙니다. 공동체 구성원이라면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는 조건입니다.
인력 부족, 이민이 답이라면 어떤 이민이어야 하는가
우리 사회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저출생과 고령화의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 중 하나인 대한민국은 이미 이민 정책의 전환을 진지하게 모색하고 있습니다. 제조업 현장부터 의료·돌봄 영역까지, 내국인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늘고 있습니다. 이민을 받아야 한다는 논의는 이미 ‘가능성’의 단계를 넘어 ‘시기와 방식’의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단순해집니다. 어떤 이민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유럽의 경험은 이 질문에 값비싼 교훈을 제공합니다. 단기적 노동력 수요에만 집중해 문화적 통합의 과제를 뒷전에 두었을 때, 그 비용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유럽은 수십 년에 걸쳐 지불하고 있습니다. 이민자들이 노동 현장에서는 기능적으로 통합되었지만, 사회의 기본 가치 체계 안으로는 통합되지 못한 채 고립된 문화 공동체를 형성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민을 논할 때 반드시 전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민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의 노동력만을 수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가치관, 그들의 가족 문화, 그들의 세계관도 함께 들어옵니다. 따라서 이민 정책은 입국 이전 단계부터 이 사회가 요구하는 핵심 가치—법 앞의 평등, 여성의 권리, 폭력의 절대적 금지—를 명확히 전달하고, 수용 이후에는 이를 내면화하도록 돕는 체계적인 과정을 갖추어야 합니다.
무조건적인 수용은 따뜻해 보이지만 무책임합니다. 사회적 안전망을 지키기 위한 기반을 갖추지 않은 채 문을 여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민자도 기존 시민도 모두를 불안 속에 방치하는 일입니다. 진정한 포용은 기준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전통적 질서와 안전 가치, 우리가 지켜야 할 것
현재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우리 대한민국민은 전쟁의 폐허 위에서 질서를 세우고, 법치를 다지고, 공동체의 안전을 가꾸어 온 경험을 몸속에 간직한 세대입니다. 그 경험이 가르쳐 준 것이 있다면, 사회의 안전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지키고 가꾸지 않으면 균열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됩니다.
우르바니오크 박사의 분석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반이민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제대로 된 이민을 위한 냉철한 준비’에 대한 촉구입니다. 이민자의 범죄 통계를 혐오의 도구로 삼자는 것이 아니라, 그 통계가 가리키는 문화적 충돌의 구조를 직시하고 정책으로 응답하자는 것입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의합니다.
전통적 질서와 안전 가치를 수호한다는 것은 낯선 것을 무조건 배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사회가 오랫동안 공들여 쌓아 온 가치 체계—법치, 인권, 공동체의 상호 존중—를 지키면서 새로운 구성원을 맞이한다는 뜻입니다. 그 가치 위에서라면, 어디서 왔든 함께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가치를 뿌리째 흔드는 폭력과 극단주의에 대해서는, 어디서 왔든 단호히 선을 그어야 합니다.
감정적 혐오도, 무비판적 포용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답이 아닙니다. 필요한 것은 팩트를 직시하는 용기와 그 팩트 위에서 합리적 기준을 세우는 지혜입니다. 유럽이 뒤늦게 깨닫고 있는 그 교훈을, 우리는 미리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 본 칼럼에서 인용된 범죄 통계는 법정신의학자 프랑크 우르바니오크 박사의 저서 및 인터뷰에 기반한 주장을 인용한 것으로, 해당 수치의 산출 근거가 되는 오스트리아 경찰 통계의 구체적인 표본 조건 및 산출 방식은 현재 공개된 자료만으로는 확인되지 않음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