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도 나이가 들면 저렇게 받고 싶다”는 사회적 연대감
예술과 낭만의 나라 프랑스. 그러나 최근 들려오는 프랑스 경제에 대한 소식은 이런 낭만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멉니다. 세계 최고의 명품 기업 LVMH(루이비통)의 회사채가 프랑스 국채보다 더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는 역설적인 상황은,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경고등입니다.
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이자 유로존의 핵심축인 프랑스가 어쩌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의 위기를 맞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은 의외의 곳, 바로 ‘노인을 위한 너무나 관대한 시스템’에 있습니다. 이 칼럼에서는 프랑스 경제 위기의 본질을 드러내는 가장 놀랍고 충격적인 진실 5가지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 역전된 소득: 일하는 사람보다 더 많이 버는 은퇴자들
가장 충격적인 사실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연금 수급자의 평균 소득이 경제활동인구(15~64세)의 평균 소득을 넘어섭니다. 특히 2010년에서 2020년 사이에는 이 비율이 110%에 육박하며 정점을 찍었습니다. 이후 소폭 하락했지만, 여전히 100%를 넘는 기현상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극히 이례적인 현상입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은퇴 후 소득이 현역 시절보다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상식이지만, 프랑스는 정반대의 소득 역전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래 표는 이 기이한 상황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주요 선진국 경제활동인구 소득 대비 연금 수급자 소득 비율을 보면, 프랑스는 100%를 초과하고 있으며, 이탈리아는 약 95%, 미국과 노르웨이는 약 85%, 영국은 약 80%, 네덜란드와 스웨덴은 약 75%이고, 참고로 우리나라는 약 65%에 불과합니다.
일하는 청년보다 은퇴한 노인이 더 부유한 사회. 이것이야말로 프랑스 재정 위기의 모든 모순을 압축하는, 믿기 어려운 첫 번째 진실입니다.
- 손해 볼 수 없는 마법의 장치: ‘삼중 잠금장치(Triple Lock)’
어떻게 이런 비상식적인 소득 역전이 가능할까요? 그 비밀은 ‘삼중 잠금장치(Triple Lock)’라 불리는 독특한 연금 인상 시스템에 있습니다. 이 제도는 연금 수급자의 소득을 어떤 경제 상황에서도 보호하고 불려주도록 설계된 마법의 장치입니다.
프랑스 연금은 다음 세 가지 지표 중 가장 높은 것을 따라 무조건 인상됩니다.
1. 물가 상승률 (인플레이션)
2. 평균 임금 상승률
3. 고정 상승률 2.5%
예를 들어, 한 해의 물가 상승률이 3%, 평균 임금 상승률이 4%, 고정 상승률이 2.5%라고 가정해 봅시다. 연금은 이 셋 중 가장 높은 수치인 4%가 인상됩니다. 만약 경제가 침체해 물가와 임금이 모두 1%씩만 올라도, 연금은 최소 보장치인 2.5%가 오릅니다. 어떤 경제 상황에서도 연금 수급자는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제도는 영국에도 있었지만, 영국은 그 지속 불가능성을 깨닫고 최근 시스템을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 제도를 유지하고 있고, 그 결과 국가 재정 부담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할아버지는 점점 부유해지고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할 손자 세대는 가난해질 가능성이 커지는 구조인 셈입니다.
- 국가 예산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연금 지출
프랑스의 연간 연금 지출액은 약 4,200억 유로, 우리 돈으로 약 700조 원에 달합니다. 이는 국가 전체 공공 지출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압도적인 규모입니다.
이 금액이 얼마나 거대한지는 다른 예산과 비교해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이 연금 지출액은 프랑스의 교육, 국방, 안보, 교통 인프라, R&D 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도 많습니다. 심지어 세계 2위 군사 대국인 중국의 10개월 치 국방비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이 거대한 국가적 지출은 단순히 추상적인 숫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이는 프랑스 국민 개개인의 주머니에서 나온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면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옵니다. 프랑스 납세자가 세금으로 1,000유로를 내면, 그중 560유로는 연금으로 가고 미래를 위한 국방비에는 고작 30유로가 쓰입니다. 국가의 모든 재정이 과거의 약속을 지키는 데 빨려 들어가는 블랙홀이 된 것입니다.
- 부풀려진 예산: 통계의 착시 효과
프랑스의 재정 문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면, 공식적인 숫자가 현실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보여주는 ‘장부상의 마술’을 마주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국방비입니다. 프랑스는 겉보기에 GDP의 2%를 국방비로 지출하라는 NATO의 목표를 달성한 모범생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내역을 살펴보면, 예산의 상당 부분이 신규 무기 도입이나 전력 증강이 아닌 ‘퇴역 군인 연금’을 지급하는 데 쓰이고 있습니다. 즉, 현역이 아닌 은퇴 군인을 위한 비용 때문에 국방비가 늘어나는 통계의 맹점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육 예산에서도 똑같이 나타납니다. 교육 예산의 상당 부분이 현직 교사나 학생들을 위한 투자가 아닌, ‘퇴직 교사’의 연금을 지급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 결과 프랑스 현직 교사들의 임금은 유럽연합 내 최저 수준에 머무르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미래인 교육과 국방마저 과도한 연금 시스템에 발목이 잡힌 셈입니다.
- 건전 재정 국가에서 위기 국가로, 불과 15년 만의 추락
놀랍게도 프랑스는 불과 15년 전만 해도 재정적으로 매우 건전한 국가였습니다. 2007년 프랑스의 GDP 대비 공공부채 비율은 65%로 안정적인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2024년, 이 수치는 113%까지 폭증했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스웨덴은 부채 비율을 39%에서 33%로 오히려 줄였습니다. 이 극적인 대비는 프랑스의 상황이 얼마나 빠르게, 그리고 심각하게 악화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문제의 씨앗은 1980년대, 미테랑 대통령이 연금 수급 연령을 65세에서 60세로 낮춘 시점부터 뿌려졌습니다.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연금 수급 연령을 64세로 다시 올리고, 경직된 노동법을 완화했으며, 법인세 인하와 외국인 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 체질을 바꾸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에너지 보조금 지출이라는 예상치 못한 파도가 덮치면서, 이러한 개혁의 효과는 모두 씻겨 내려갔습니다. 이는 프랑스의 위기가 단순히 한 정부의 실책이 아닌, 수십 년간 누적된 구조적 문제의 무게가 얼마나 압도적인지를 시사합니다.
마무리
프랑스의 위기는 과거의 풍요로운 시절에 설계된 ‘노인을 위한 나라’가 급격한 인구 구조 변화를 맞이한 현재, 더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일하는 사람보다 은퇴한 사람이 더 많은 돈을 벌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투자가 과거 세대를 위한 연금에 잠식당하는 구조는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는 한 분석은 프랑스가 처한 딜레마를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모든 프랑스 국민들은 ‘나도 빨리 은퇴해서 지금 연금 생활자가 지난 20년 동안 누려왔던 그런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고 싶다’라는 목소리가 너무 높다는 게 이 문제 해결을 좀 어렵게 하지 않나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프랑스의 사례는 더 이상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또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지 않으면서, 세대 간의 약속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프랑스의 위기는 바로 우리에게 던지는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