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4월 10일

二十九世 震龜 字 晦六
字晦六一六九六三六肅宗仁祖丙子五月十八日生一六八二年肅宗壬戌十月 (병자호란이 있던 해)
(格의 長男)
西紀 1636年 肅宗 仁祖 인조 14년 丙子 5月 18日生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발발했던 비극적인 해입니다. 이 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세대입니다.

西紀 1682年 肅宗 8년 壬戌 10月 3日卒 (壽47)

서인이 권력을 독점하고 남인을 몰아냈던 ‘경신환국’ 이후의 정치적 격변기입니다. 1682년 10월 3일 무렵은 숙종이 한창 왕권을 강화하며 당쟁을 조율하던 시기였습니다.


 

강릉김씨 29세 김진구(金震龜) 공의 일생과 17세기 강릉김씨의 생활상

제1절. 김진구 공의 생몰과 가계

강릉김씨 괴당공파 옥가파 29세손 김진구(金震龜) 공께서는 자(字)가 회육(晦六)이시며, 인조 14년 병자년(1636년) 5월 8일에 태어나시어, 숙종 9년 임술년(1682년) 10월 3일에 향년 47세로 별세하셨습니다.

부친께서는 28세 김격(金格) 공이시니, 자(字)는 지재(止哉)이시며, 광해군 계축년(1613년) 4월 25일에 탄생하시어 현종 갑진년(1664년) 12월 1일에 향년 52세로 별세하셨습니다. 김진구 공께서 부친을 여읜 해에 공의 나이는 29세이셨으므로, 이후 가문의 대를 잇는 무거운 책임을 홀로 짊어지셔야 했습니다.

공의 아드님은 30세 김상협(金尙協) 공이시나, 이 분은 계자(系子)이십니다. 세보에 “生父 夏龜”로 명기된 바와 같이, 상협 공의 생부는 진구 공의 아우이신 하구(夏龜) 공이십니다. 진구 공께서 친아들 없이 별세하셨기에, 동생 하구 공의 아들을 계자로 들여 대를 이으신 것이니, 이는 같은 핏줄 안에서 적통(嫡統)을 보전하는 조선 종법(宗法)의 핵심 제도인 계자(系子) 입후(立後)의 전형적인 사례라 하겠습니다.

제2절. 병자호란의 포화 속에 태어나다 (1636년)

김진구 공께서 세상에 오신 1636년은 조선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해 12월, 청 태종이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었습니다. 공께서 탄생하신 5월로부터 불과 7개월 뒤에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이듬해 1637년 1월,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으니, 이것이 삼전도의 치욕이었습니다. 공의 조부뻘 되시는 26세 지봉 김몽호(金夢虎) 공께서는 바로 이 해 3월에 81세의 나이로 별세하셨습니다. 녹둔도에서 외적에 맞서 “힘껏 싸웠던” 무인이, 끝내 국가의 굴욕을 목도하신 뒤 눈을 감으신 것이니, 이 비극이 갓 태어난 진구 공의 요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두 차례의 호란을 거치면서 조선 사회는 ‘대청 사대(對淸 事大)’라는 새로운 질서 속으로 편입되었으나, 이념적으로는 ‘대명 의리(對明 義理)’를 고수하며 조선 후기 사회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창출해 내었습니다. 이 이중적인 정신세계, 즉 현실에서는 청에 굴복하되 마음속으로는 복수설치(復讐雪恥)를 꿈꾸는 시대 정서가 공의 유소년기를 지배하였을 것입니다.

제3절. 전후 복구와 효종의 북벌론 시대 (1636~1659)

공의 유년기부터 청장년기 초반까지는 병자호란의 상처를 봉합하고 국력을 재건하는 시기였습니다. 효종(재위 1649~1659)께서는 송시열 등 산림(山林) 세력과 함께 북벌론(北伐論)을 천명하시며, 군비를 증강하고 군제를 개편하셨습니다. 강릉을 비롯한 강원도 지역은 강릉·원주·양양 진관(鎭管)으로 편성되어 군사적 방비의 일익을 담당하였습니다.

공의 가문은 이미 조부 김몽호 공께서 공조참의(정3품 당상관)까지 오르신 뒤 강릉에 세거(世居)하신 명문이었으므로, 진구 공께서는 유교적 충효 이념과 북벌의 시대 정신 아래에서 성장하셨을 것입니다. 부친 김격 공의 문하에서 사서삼경을 읽으시며, 강릉향교에서 동문 유생들과 학업을 닦으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강릉향교 명륜당은 1623년과 1644년에 크게 중수되어 이미 공의 유년기에는 당대 전국 최대 규모의 향교 명륜당으로 교육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제4절. 현종 치세와 예송논쟁의 격변 (1659~1674)

효종이 승하하신 1659년, 공의 나이 24세 때부터 현종 치세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5년 뒤인 1664년, 공께서는 29세의 나이에 부친 김격 공의 상(喪)을 당하셨습니다. 조선 사대부에게 부친상은 3년간의 시묘살이를 의미하였으므로, 공께서는 강릉 선영(先塋)에서 여막(廬幕)을 짓고 효도를 다하셨을 것입니다.

이 시기 중앙 정계에서는 서인과 남인이 효종의 상복 문제를 둘러싼 1차·2차 예송논쟁(禮訟論爭)으로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강릉김씨 가문이 율곡 학통과 연관된 기호학파 계열의 성향을 지닌 점을 감안하면, 이 당쟁의 여파는 강릉 향촌 사회에도 적지 않은 긴장을 조성하였을 것입니다.

제5절. 경신대기근: 공의 장년기를 강타한 대재앙 (1670~1671)

김진구 공의 35세 때인 1670년, 조선 전역을 뒤흔든 경신대기근(庚辛大飢饉)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로, 조선 팔도 전체의 흉작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으며, 당시 인구 1,200만~1,400만 명 가운데 최소 15만에서 최대 85만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었습니다.

1670년 7월에 전국에 때 아닌 우박과 서리에 이어 눈까지 내렸고, 계란만 한 우박이 쏟아져 성한 곡식이 없었습니다. 이상 저온으로 우박과 서리, 폭설이 그치지 않았고, 가뭄과 홍수까지 덮쳐 백성들은 초근목피로 겨우 연명하였으며, 인육을 먹는 참상이 도처에서 벌어졌습니다.

이 대기근은 16세기에서 19세기에 걸친 전 세계적인 소빙기(Little Ice Age)의 영향으로, 17세기 중후반 조선에서 기상이변과 재난이 집중적으로 발생한 결과였습니다.

강릉은 동해안에 위치하여 어업과 해산물 채취가 가능한 지역이었으나, 전국적인 흉작 앞에서는 이마저도 한계가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향촌 양반들은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으나, 흉년에는 어느 누구도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다만, 김진구 공의 가문은 경포 가남촌에 세거하는 강릉의 대표적 토반(土班)이었으므로, 비축미를 풀어 일가친척과 노비를 구휼하는 동시에 향촌 질서를 유지하는 사족(士族)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기근은 정치적으로도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백성 구제에 필요한 재원 마련을 위해 납속(納粟)과 공명첩(空名帖) 발행이 성행하면서 전통적인 신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고, 재력으로 신분을 바꿀 수 있는 세상이 처음 열렸습니다. 이러한 신분 질서의 동요는 명주군왕의 후예로서 혈통적 자부심이 강했던 강릉김씨 문중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제6절. 숙종 초기와 환국 정치 (1674~1682)

공의 말년은 숙종(재위 1674~1720) 치세의 초반부와 겹칩니다. 숙종은 즉위 직후 갑인예송(2차 예송)의 결과로 남인을 등용하였다가, 다시 경신환국(1680년)으로 서인을 복권시키는 격렬한 환국 정치를 전개하셨습니다. 강릉김씨는 숙종조에서 영조조를 거치면서 28세 김홍주, 김홍권의 아들과 손자 대에서 정승, 판서 등 고관이 한꺼번에 10명 가까이 배출되면서 가문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문의 중흥은 진구 공 별세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공께서 생존하신 1636년부터 1682년까지는 오히려 강릉김씨 옥가파가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고 종법 질서를 재확립하며, 경신대기근의 참화를 극복해 나가는 인고(忍苦)의 시기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7절. 당대 강릉김씨의 향촌 생활상

1. 종법 질서의 확립과 문중 결속

17세기는 조선 전체적으로 종법(宗法) 질서가 본격적으로 확립되던 시기입니다. 강릉김씨는 현존하는 족보 중 세 번째로 오래된 을축보(乙丑譜)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초간본이 1714년의 갑오보, 1743년의 계해보 등 무려 13종에 달하는 후간 족보 편찬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진구 공의 생존 시기에도 문중에서는 명주군왕릉을 중심으로 한 시제(時祭)와 족보 정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이며, 이는 병자호란의 혼란 속에서도 조상의 위패를 지키는 것을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세대의 과업이었습니다.

2. 향청(鄕廳)과 향교에서의 역할

향촌 사회에서 사족(士族)은 향안(鄕案)을 작성하고 향규(鄕規)를 제정하였으며, 향안에 이름이 오른 사족은 향회를 통하여 결속을 다지고 지방민을 통제하였습니다. 강릉김씨는 강릉의 대표적 토반으로서 향청(鄕廳)의 좌수(座首)나 별감(別監) 등 요직을 맡아 강릉부사를 보좌하거나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입니다.

또한 강릉향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며 교육과 제사 기능을 겸하였으며, 강릉김씨 문중은 향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유생 교육과 성리학적 가치 전파에 기여하셨을 것입니다.

3. 경포 일대의 풍류와 정자 문화

경포대는 관동팔경의 하나로,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자연 풍광을 음미하며 학문을 닦고 마음을 수양했던 유서 깊은 장소였습니다. 경포대는 풍류를 즐기는 곳인 동시에, 달과 호수와 바다와 송림을 조망하며 심성을 가다듬고 수양하던 곳이었습니다. 경포 가남촌에 세거하던 진구 공의 가문은 이 경포호의 누정 문화권 안에서 시회(詩會)를 열고 학문을 논하였을 것이니, 비록 전쟁과 기근의 상흔이 깊었으나, 동해안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유교적 소양을 기르고 정신적 위안을 얻는 삶을 영위하셨을 것입니다.

4. 경제적 기반과 어려움

강릉김씨는 남대천 유역의 농경지와 동해안의 어업 경제권을 기반으로 한 대지주 사족이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에는 어느 누구도 가난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다만 동성마을의 족적 기반을 상실하지 않았다면 양반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진구 공께서도 경신대기근 등의 재앙 속에서 가산(家産)의 어려움을 겪으셨을 가능성이 있으나, 종가와 동성마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가문의 체면과 지위를 지켜 나가셨을 것입니다.

제8절. 47세의 짧은 생애가 남긴 것

김진구 공께서는 47세의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사셨습니다. 병자호란의 포화 속에 태어나시어, 효종의 북벌 시대를 청년기에 거치시고, 예송논쟁의 정치적 격변을 목도하시며, 35세에 경신대기근이라는 전대미문의 천재(天災)를 몸소 겪으셨습니다. 부친을 29세에 여의시고, 친자 없이 세상을 떠나시어 동생 하구 공의 아들 상협 공을 계자로 들이는 것으로 대를 이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조용한 생애가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공께서 지키신 가통(家統)은 30세 김상협 공, 31세 김인진(寅鎭) 공으로 면면히 이어져, 마침내 36세 김태경(泰卿) 공께서 고종 18년(1880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시는 등 가문의 학문적 전통이 끊이지 않고 계승되었습니다.

김진구 공의 일생은, 전쟁과 기근과 당쟁이 끊임없이 몰아치던 17세기의 격랑 속에서, 명주군왕의 후예로서 혈통의 자부심을 지키시고, 강릉 경포의 세거지에서 종법 질서를 보전하시며, 후손에게 뿌리를 물려주신 묵묵한 수호자의 삶이셨다고 존숭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