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베카 소퍼’의 18년 전 떠나보낸 어머니와 함께 살아온 시간
요즘은 슬픔도 어느새 성인이 되었습니다. 투표도 할 수 있고, 입대도 가능하며, 아마 운전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 인생이라는 자동차에선, 슬픔이 꽤 오래전부터 조용히 조수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제가 핸들을 잡고 있다고 착각할 때조차 말이지요.
18년 전, 저는 어머니를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때부터 시작된 슬픔은 한순간 폭풍처럼 밀려오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습기처럼 스며들어 일상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생각 없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려다 통화 연결음도 없이 멈추는 날이 있고, 아이들이 책을 읽는 모습을 보다가 눈물이 고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종종 슬픔은 시간이 해결해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슬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변해갑니다. 날카로운 고통은 언젠가 무뎌지지만, 그것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잠시 숨어 있다가, 어떤 향기, 멜로디, 혹은 문득 마주친 광고 한 장면에 다시 떠오르곤 합니다.
슬픔은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게 말 걸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조용히 속삭이고, 때로는 소리를 지릅니다. 그 존재를 무시하려고 애써도, 결국은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문득 깨닫게 됩니다. 아, 이것이 나와 함께 살아가는 슬픔이구나.
슬픔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것’
우리는 종종 ‘슬픔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회적 기대에 시달립니다. 특히 은퇴 이후에는 ‘이미 오래된 일인데, 이제는 잊을 때도 됐지 않느냐’는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마음이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슬픔과 공존하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저는 그 방법을 ‘함께 살아가기’라고 표현합니다. 매일 아침, 슬픔은 제 옆에 앉아 있습니다. 그것은 저를 억누르지 않지만, 결코 떠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슬픔은 저의 일부가 되었고, 저는 슬픔을 통해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우리 사회는 슬픔에 충분한 공간을 허락하고 있는가
슬픔은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회적 장치는 부족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수많은 이들이 가족과 지인을 잃었지만, 미국에는 아직까지도 그들을 위한 공식 추모일이나 연방 차원의 장례 지원 제도조차 없습니다.
슬픔은 시간과 지지가 필요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예산 감축으로 인해 정신 건강 서비스는 축소되고, 상담 대기 시간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시골 지역이나 청소년 정신 건강 서비스는 더욱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우리가 슬픔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제가 만난 3,000명 이상의 유족들은 말합니다. “슬픔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로 살아가는 것이다.”
어머니의 날, 아버지의 날, 형제의 날, 명절과 같은 특정한 시기가 되면 우리는 더욱 그 빈자리를 실감합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극복’이 아니라 ‘공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그날이 여전히 슬픔이 솟구치는 날이라는 것을 인정해주는 사회,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나의 끝나지 않은 여정
슬픔과 함께 한 지난 18년 동안, 저는 수많은 도구를 배웠습니다. 명상, 글쓰기, 이야기 나누기, 조용히 걷기. 하지만 어떤 날은 그런 것들이 전혀 통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선명하게, 너무도 갑자기, 그 슬픔이 다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도 그리움과 함께 살아가고 있어.”
그리고 그런 저를 안아줍니다.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아직도 진행 중인 내 인생의 한 페이지로서.
✨ 편집장 한 줄 정리
슬픔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그 슬픔이 나를 완성시키는 여정의 일부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