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치매’라는 단어는 여전히 가장 두려운 단어 중 하나입니다. 기억이 희미해지고, 이름을 잊고, 가족의 얼굴이 낯설어지는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환자뿐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고통입니다. 그런데 최근 세계적인 제약사 노보 노르디스크(Novo Nordisk)가 비만 치료제로 개발한 약물이 알츠하이머 치료에 효과를 보일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의료계와 투자 시장 모두가 주목하고 있습니다.
노보 노르디스크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비만 치료제 위고비(Wegovy)와 오젬픽(Ozempic)을 개발한 회사입니다. 이 약의 주요 성분은 세마글루타이드(semaglutide)라는 물질로, 원래는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된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 약물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물질이 단순히 혈당을 조절할 뿐 아니라, 뇌의 염증을 줄이고 인지 기능 저하를 늦추는 데도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만 치료제에서 뇌질환 치료제로
노보 노르디스크는 현재 알츠하이머 초기 단계 환자 약 1,800명을 대상으로 세마글루타이드의 효과를 검증하는 대규모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30개국이 참여하는 이 연구는 3년에 걸쳐 진행되며, 그 규모와 데이터의 깊이 면에서 전례 없는 시도로 평가받습니다.
연구의 출발점은 간단합니다. “비만과 치매는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비만은 단순히 체중의 문제가 아니라, 전신 염증과 대사 불균형을 동반하는 만성 질환입니다. 당뇨병이나 고혈압과 같은 대사질환이 뇌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연구로 확인되었습니다. 비만 상태에서 뇌세포는 과도한 포도당과 염증 물질에 노출되며, 이는 결국 아밀로이드 단백질과 타우 단백질의 축적을 가속화해 알츠하이머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GLP-1 계열 약물은 바로 이 지점에서 주목받습니다. 세마글루타이드는 혈당을 낮출 뿐 아니라 뇌 속 염증을 줄이고 신경세포의 스트레스를 완화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즉, 신체의 대사 균형을 회복시키면서 동시에 뇌 건강을 지키는 ‘이중 작용’을 하는 셈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치매 임상시험”
이번 연구의 책임자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횔셔 교수(중국 하난대학교)는 “알츠하이머 분야에서 이렇게 대규모의 임상시험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GLP-1 계열 약물이 뇌 속 염증 반응을 조절함으로써 치매 진행을 늦출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실제로 세마글루타이드를 복용한 집단은 위약(가짜 약)을 복용한 집단에 비해 치매 진단 위험이 53% 감소하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2년 반 동안 21~43%의 치매 위험 감소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수치는 아직 ‘완치’를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알츠하이머 연구 역사에서, 뇌 손상을 멈추거나 늦춘다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나온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횔셔 교수는 이를 두고 “이번 연구가 치매 치료의 향방을 결정지을 ‘결정적 실험(definitive answer)’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엇갈린 과학계의 시선
그러나 모든 전문가가 이 약의 가능성을 동일하게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페리얼칼리지런던의 신경생리학자 이반 코이체이 교수는 “세마글루타이드가 염증을 줄이는 데는 탁월하지만, 알츠하이머의 핵심인 아밀로이드 축적을 직접 막는 효과는 제한적일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즉, 약이 질병의 ‘원인’을 바꾸기보다는 ‘결과’를 늦추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신경학자 존 하디 교수도 “GLP-1이 치매 진행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는 아직 부족하다”고 평가했습니다. 다만 그는 “이 약이 혈관 건강을 개선하고 염증을 줄임으로써 뇌에 간접적인 이익을 줄 가능성은 높다”고 덧붙였습니다.
이렇듯 일부 학자들은 “이번 임상이 성공하더라도, 알츠하이머 자체를 근본적으로 ‘치유’하는 것은 아닐 수 있다”고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인간 수명의 연장, 그리고 뇌의 한계
오늘날 인간의 평균 수명은 80세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수명이 늘어난 만큼, 뇌의 노화가 불러오는 문제도 함께 증가했습니다. 알츠하이머병은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 이상이 앓고 있으며, 2050년에는 지금의 두 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됩니다. 특히 한국처럼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국가에서는 치매 관리가 사회경제적 과제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가운데 노보 노르디스크의 시도는 의료계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깊은 의미를 던집니다.
만약 세마글루타이드가 알츠하이머 발병률을 낮추거나 발병 시점을 늦출 수 있다면, 이는 단순히 신약의 성공을 넘어 ‘치매 없는 노년’이라는 인류의 꿈에 한 걸음 다가서는 것입니다.
약값 논란과 접근성의 문제
한편, 이 약의 상업적 성공 여부도 큰 관심사입니다.
세마글루타이드 계열 약물은 현재 미국에서 한 달 약값이 약 499달러(약 70만 원)에 달합니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선 공약 중 하나로 “오젬픽 가격을 350달러(약 49만 원) 이하로 낮추겠다”고 발표하며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노보 노르디스크는 이에 대해 “가격 인하는 연구개발 지속성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반박했습니다.
가격 논쟁은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닙니다. 알츠하이머 치료제는 수백만 명이 복용해야 하는 약이기 때문에, 가격이 높을 경우 건강보험과 사회 복지 시스템에 막대한 부담을 주게 됩니다.
따라서 과학적 성공과 더불어 공정한 약가와 접근성 보장이 함께 논의되어야 진정한 의미의 혁신이 될 것입니다.
치매 예방의 패러다임 전환
이번 연구가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치매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비만, 당뇨, 고혈압, 흡연과 같은 생활습관이 알츠하이머의 위험을 높이고, 반대로 혈압 관리, 체중 감량, 운동, 금연 등은 발병률을 낮출 수 있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지고 있습니다.
GLP-1 약물은 이러한 생활습관 개선의 생화학적 연장선에 있습니다.
즉, 약을 통해 대사 밸런스를 회복하고 뇌의 염증을 줄임으로써 신체 전체의 ‘건강한 노화(healthy aging)’를 유도하는 접근법인 셈입니다.
노보 노르디스크의 ‘기적의 약물’ 실험은 단순히 한 제약사의 야심 찬 도전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류가 “치매 없는 노년”을 향해 내딛는 새로운 시도이자, 질병과 노화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 실험입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멉니다.
하지만 이번 연구는 “비만 치료제”라는 기존의 한계를 넘어, 신체와 뇌의 건강을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전환점이 될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초고령화 시대로 들어선 지금, 이와 같은 연구의 성과는 단순히 의학의 진보를 넘어, 노년의 품격과 삶의 질을 지키는 가장 근본적인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날이 오면, “치매는 피할 수 없는 노년의 그림자”라는 말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될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