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05일
11-4-0600#163

“항우울제는 위험할까?”

이 질문은 많은 중장년층이 정신건강 상담을 받거나 우울증 진단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고민입니다.

특히 은퇴 전후로 사회적 역할이 줄고, 가족·경제적 변화가 겹치면서 불안과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항우울제 처방이 권유되면 대부분은 “중독되는 거 아니냐”, “기운이 더 빠진다던데”라며 망설입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필립 코웬(Philip Cowen) 교수는 최근 발표한 연구에서 “항우울제의 부작용에 대한 공포는 대부분 과장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대신, 어떤 약을 선택하느냐보다 개인별 신체 반응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항우울제는 뇌의 화학적 균형을 바로잡는 도구입니다

우리의 기분은 단순히 마음가짐의 문제가 아니라, 뇌 속 신경전달물질의 균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항우울제는 그중 ‘세로토닌(Serotonin)’과 ‘노르에피네프린(Norepinephrine)’이라는 물질의 흐름을 조절해줍니다.

우울감, 무기력, 불안, 불면 등은 세로토닌과 관련된 신경의 흐름이 약화될 때 나타나는데, 이를 정상 범위로 회복시키는 것이 항우울제의 핵심 작용입니다.

특히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는 부작용이 적고 안전성이 높아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처방됩니다. 대표적인 약으로 세트랄린(Sertraline), 플루옥세틴(Fluoxetine), 시탈로프람(Citalopram)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약 복용 초기에 메스꺼움, 소화불량, 불면, 피로감, 성욕 감퇴 등의 증상이 일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대개 1~2주 내 사라지지만, 이 시기를 견디지 못해 복용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문가들은 “부작용이 불편하더라도 의사와 상의 없이 중단하면, 오히려 우울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간 기능이 좋지 않다면 약 선택이 더 중요합니다

코웬 교수는 “간 효소 수치가 높거나 간 질환 병력이 있는 사람은 세트랄린(Sertraline)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합니다.

SSRI는 간에서 대사되기 때문에, 간 기능이 약한 사람은 약물이 체내에 오래 남아 부작용이 커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플루옥세틴(Fluoxetine)**처럼 간 대사 부담이 적은 약을 택하거나, 용량을 낮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복용 전 혈액검사로 AST, ALT, ALP 수치를 확인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한국에서는 건강검진에서 기본적으로 측정하므로, 최근 수치를 반드시 의사에게 공유하는 습관을 들이는 게 바람직합니다.

항우울제와 체중 변화 — “살이 찔까?”

시니어들이 항우울제 복용을 주저하는 또 다른 이유는 “체중 증가”입니다.

SSRI 계열 약물 중 **파록세틴(Paroxetine)**은 장기 복용 시 체중이 늘 수 있으며,

반대로 **세트랄린(Sertraline)**이나 **플루옥세틴(Fluoxetine)**은 체중 변화가 거의 없거나 오히려 줄기도 합니다.

이는 항우울제의 항히스타민 성분이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복용 초반에는 식습관 조절과 가벼운 운동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항우울제 복용자 중 체중 증가를 호소하는 사례의 70% 이상이 운동 부족과 관련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약 때문만이 아니라 생활습관 변화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SNRI와 TCA — 오래된 약이지만 여전히 사용되는 이유

SSRI가 효과가 충분하지 않을 때는 **SNRI(세로토닌·노르에피네프린 재흡수 억제제)**로 변경하기도 합니다.

SNRI는 두 가지 신경전달물질을 동시에 조절하므로 SSRI보다 강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지만, 혈압 상승이나 발한, 불면 등의 부작용이 조금 더 많습니다.

대표 약물로는 **벤라팍신(Venlafaxine, 이펙사)**과 **둘록세틴(Duloxetine, 심발타)**이 있습니다.

특히 둘록세틴은 당뇨성 신경통이나 만성 통증에도 효과가 있어, 고령자에게 자주 사용됩니다.

다만 간 기능 수치(AST, ALT)가 높거나 간 질환이 있는 경우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더 오래된 TCA(삼환계 항우울제) 계열은 효과가 강하지만, 부정맥, 어지럼증, 구갈(입마름), 변비, 시야 흐림 등 부작용이 많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주로 신경통, 불면, 만성 통증 완화용으로 저용량만 사용됩니다.

예컨대 **아미트립틸린(Amitriptyline)**은 하루 20mg 정도만 복용해도 신경통 완화에 도움이 되며,

이는 일반 항우울제(50mg)의 절반 이하 용량입니다.

복용 중 나타나는 이상 신호, 그냥 넘기지 마세요

항우울제 부작용 중에는 간 수치 상승, 손 떨림, 불규칙한 심장 박동 등 심각한 증상도 있습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신호가 있다면 즉시 의사와 상담해야 합니다.

피부나 눈이 노랗게 변함 (황달)
메스꺼움, 복통, 소변색이 짙어짐
심한 어지럼증이나 실신 감각
불안, 초조, 수면 완전 상실

이런 증상은 대부분 복용 초기나 약물 간 상호작용에서 나타납니다.

따라서 기존에 복용 중인 고혈압·당뇨약, 진통제 등을 반드시 함께 알리는 것이 안전합니다.

“약 없이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이 가장 위험합니다

정신과 진료에 대한 오해는 여전히 깊습니다.

약을 먹는다는 사실이 약점처럼 느껴지거나, 주위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병원을 멀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항우울제는 마음을 약하게 만드는 약이 아니라, 회복의 속도를 조절해주는 안전장치입니다.

코웬 교수는 “항우울제의 효과는 약 그 자체보다 꾸준함에서 나온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환자는 4~6주 이상 복용해야 효과가 나타나며, 증상이 호전되더라도 최소 6개월은 유지해야 재발 가능성이 낮습니다.

중간에 ‘괜찮아진 것 같다’고 임의로 중단하면, 약효가 떨어지고 증상이 오히려 악화될 수 있습니다.

시니어에게 더 중요한 ‘마음 건강의 복합 관리’

시니어 세대에게 우울증은 단순한 기분 문제가 아닙니다.

은퇴, 상실, 질병, 관계 변화 등 복합적인 원인이 얽혀 있습니다. 따라서 약물만으로 완전히 해결되기 어렵고, 심리치료·사회활동·규칙적 운동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다음 세 가지는 시니어 우울 관리의 ‘기본 처방’으로 꼽힙니다.

하루 30분 이상 햇빛 아래 걷기 – 세로토닌 분비를 활성화
규칙적인 식사와 수면 리듬 유지 – 뇌의 안정성 회복
누군가와 이야기 나누기 – 감정 해소를 통한 인지적 안정

항우울제는 이 과정의 ‘도움손’일 뿐, 주인공은 여전히 당신 자신입니다.

약보다 중요한 것은 ‘꾸준한 관계’입니다

항우울제는 뇌의 화학적 균형을 회복시켜주지만, 진짜 회복은 인간 관계와 의미 회복에서 시작됩니다.

가족과 대화하고, 친구를 만나고, 취미를 이어가는 일은 약물 이상의 치료 효과를 줍니다. 우울은 고립에서 깊어지고, 대화에서 완화됩니다. 우울증은 나약함이 아니라, 몸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그 신호를 무시하지 말고, 전문가와 상의하며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야 합니다.

항우울제 부작용에 대한 과도한 공포는 오히려 회복의 기회를 늦춥니다. 정확한 정보와 의료진과의 신뢰가 동반될 때, 약은 삶의 균형을 되찾는 강력한 조력자가 됩니다. 마음의 통증도 신체의 통증처럼 치료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두려움 없이 이야기하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