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07일
12-02-0600#191

— 우크라이나 전쟁이 던지는 진짜 질문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유럽과 서방 국가들은 오랜 세월 잊고 지내던 단어를 다시 꺼내 들고 있습니다. 바로 ‘억제(Deterrence)’입니다.

러시아가 2022년 2월 전면 침공을 감행한 이후, 나토(NATO) 국가들은 국방비를 크게 늘리고, 방위산업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며, 심지어 징병제 부활까지 검토하는 등 전반적인 안보재편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가 제기됩니다.

“억제가 과연 전략이 될 수 있는가?”

즉, 억제만 강조하는 것이 우리에게 진정한 안보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이 글에서는 서방이 겪고 있는 전략적 혼란을 짚어보고, 한국을 포함한 시니어 독자들이 장기 안보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 교훈을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억제란 무엇이며, 왜 다시 등장했는가

억제란 상대에게 “적대적 행동을 하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확신을 주는 정책입니다. 핵무기 시대가 열렸던 냉전 시기에는 억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모두 핵전쟁이 가져올 파국을 뚜렷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냉전 이후 약 30년 동안 억제라는 단어는 점점 잊혀졌습니다. 유럽은 평화의 시대라고 생각했고, 러시아는 더 이상 큰 위협이 아니라는 인식도 퍼졌습니다.

그러나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 그리고 2022년 전면 침공은 이러한 낙관을 모두 깨뜨렸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억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상대가 ‘위협의 진정성’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토는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직접 방어할 의지가 없었고, 러시아는 이를 정확히 파악했습니다.

이 순간 억제는 더 이상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억제가 실패하는 세 가지 이유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억제의 실패 요인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상대가 방어 측의 의지를 신뢰하지 않을 때

아무리 강력한 무기를 보유하고 있어도, 상대가 “저들은 절대 쓰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면 억제는 무력화됩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러시아는 바로 이 판단을 했습니다.

② 상대가 ‘합리적 행위자’가 아닐 때

억제는 ‘손익 계산’을 하는 상대에게만 통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극단주의자나 사생결단식 지도자에게는 억제로 위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심리학적으로 사람은 ‘잃을 것’이 있다고 느낄 때 더 극단적으로 행동합니다.궁지에 몰린 국가 지도부도 마찬가지입니다.

③ 억제가 결국 ‘위협’에 기반한다는 사실

억제는 본질적으로 협박과 동일한 구조입니다. 따라서 상대는 이를 공격적 정책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국 상호 불신만 키워 갈등을 장기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즉, 억제는 결코 대화의 대체물이 될 수 없습니다.

현재의 서방 전략 논쟁: 혼란과 모순

지금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략 논쟁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나토는 막대한 자원을 들여 억제력을 강화하고 있지만, 동시에 서방은 가장 가능성이 낮은 러시아의 공격 시나리오를 반복적으로 걱정하며 두려움이 과도하게 확대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부 정치 세력은 ‘러시아가 영구 전쟁을 원한다’는 전제를 세우고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이런 접근은 균형 잡힌 분석이 아니라 공포의 확대재생산에 가깝습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질문들이 오히려 외면됩니다.

▶ 유럽은 전쟁 이후 어떤 안보 체계를 구축해야 하는가?
▶ 러시아와의 장기적 긴장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 억제에 의존하는 것만으로 평화가 유지될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모두 유럽의 미래를 위해 반드시 답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논쟁은 이보다 즉각적인 공포와 억제 강화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억제가 ‘전략의 대체물’이 될 때 벌어지는 일

지금 일부 서방 국가들은 억제를 정치 전략의 대체물, 즉 ‘전략 부재를 감추는 포장지’처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기 위한 대화나 중재를 시도하면, 곧바로 “유화정책(appeasement)”이라는 비난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정치적 해결책 없이 전쟁이 끝날 수는 없습니다.

외교 없는 억제는 벼랑 끝 전술의 반복이며, 결국 모두에게 해로운 결과를 낳습니다.또한 몇몇 서방 정치인들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결정적 패배를 겪어야만 유럽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달성하기 어렵고, 양측 모두 체면을 지킬 여지가 없는 위험한 접근입니다. 억제만으로는 갈등의 근본 원인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억제가 시간을 벌어줄 수는 있지만, 그 시간을 대화, 협상, 구조적 해결에 활용하지 못한다면 억제는 스스로 목적화된 빈 껍데기에 불과해집니다.

전쟁 이후 유럽의 현실: 새로운 안보 구조가 필요하다

전쟁이 끝나면 유럽은 완전히 달라진 안보 환경에 맞서야 합니다. 군사적 자주성은 분명 중요하지만, 억제만으로 유럽의 평화를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유럽이 직면할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러시아와의 장기적 공존 전략
▶ 동유럽과 서유럽 간 안보 부담의 재조정
▶ 미국의 역할 축소 시 유럽 자립 가능성
▶ NATO의 구조적 개편
▶유럽연합(EU)의 군사적 통합 문제

이 문제들은 단순한 억제 강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유럽은 억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정책적·외교적·지정학적 해답을 스스로 마련해야 합니다.

한국 시니어 독자를 위한 핵심 교훈

우크라이나 전쟁은 유럽의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한국 역시 매우 높은 안보 위험을 안고 있는 국가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① 억제력은 필요하지만, 만능이 아니다

한국도 북핵 위협 속에서 강력한 억제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억제만으로는 전쟁의 위험을 줄일 수 없습니다. 장기적 대화 채널, 위기관리 체계, 지역 안보 협력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합니다.

② 상대의 심리·동기·손익 계산을 이해해야 한다

상대국 지도부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억제 정책은 오히려 갈등을 키울 수 있습니다.

③ 안보정책은 감정이 아니라 이성에 기반해야 한다

두려움은 정책 판단을 흐리게 합니다. 어떤 국가든 공포와 분노를 기반으로 한 외교는 전쟁 가능성만 높입니다.

억제는 필요하지만, 전략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하나의 본질적 교훈을 남깁니다. “억제는 전략이 아니다. 전략의 일부일 뿐이다.” 억제는 위험을 관리하고 시간을 벌어주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각 국가의 정치적 지혜와 도덕적 책임에 달려 있습니다. 전쟁 이후의 세계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공포에 기반한 억제 강화가 아니라, 장기적 비전·외교·전략적 인내·이성적 판단입니다.

시니어 세대가 지닌 경험과 통찰은 이와 같은 큰 흐름을 이해하고, 현 세대가 올바른 방향을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