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08일
12-08-0600#197

— 영국 Hallam Street Hospital 사례가 한국 시니어에게 주는 메시지

얼마 전 영국에서 일어난 두 건의 안타까운 사건이 한국의 고령사회에도 깊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33세의 젊은 남성이 정신건강병동에 ‘걸어서 들어갔다가’ 불과 열여덟 날 만에 스스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사망한 사실, 그리고 21세의 여성이 관찰 의무가 단 몇 시간 소홀해진 사이 목숨을 잃은 사건은 의료 체계의 가장 기본적인 절차가 무너졌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건을 조사한 결과, 해당 병원 조직 안에는 오래전부터 쌓여 온 문제가 있었습니다. 직원들은 문제를 제기하기 두려워했고, 일부 의료진은 자신이 뭘 해야 하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다는 증언을 남겼습니다. 기록은 부실했고, 환자의 상태 변화는 제때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협력하고 도와야 할 조직에서 오히려 ‘침묵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이 이야기가 유독 마음에 남는 이유는, 이것이 단지 영국의 처참한 의료 사고가 아니라, 한국에서도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문제여서입니다. 시니어 인구가 늘어나고, 치매·우울증·만성 질환 등 돌봄이 필요한 환자가 많아지는 상황에서 의료와 돌봄 체계는 이미 상당한 압력을 받고 있습니다. 병상은 늘 부족하고, 의료 인력의 피로는 누적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압박이 큰 환경일수록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기본 안전입니다.

의료 현장에서 기본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환자를 관찰하고, 기록하고, 변화가 있을 때 빠르게 대응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기본일수록 지키기 어렵습니다. 영국 사례에서 의료진이 15분 간격으로 관찰해야 했던 환자를 한 시간 넘게 보지 못한 이유는 게으름이 아니라, 인력 부족·교육 부족·조직의 무기력함이 겹친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시스템적 결함이 환자의 생명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양병원이나 정신건강 병동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사고의 상당수는 기록 누락, 인력 부족, 의료진의 경험 부족, 그리고 문제를 제기해도 반영되지 않는 조직 분위기에서 비롯됩니다. 겉으로는 시스템이 잘 갖춰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현장은 훨씬 취약합니다. 특히 치매 환자나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처럼 자기 의사를 전달하기 어려운 분들에게 안전 절차는 생명과 직결됩니다.

이 지점에서 시니어 여러분께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은 의료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참여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종종 “병원에 맡겼으니 잘 알아서 하겠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가족이 병원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환자의 평소 모습과 특징을 설명해야 의료진도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작은 변화라도 기록해 두고 질문해야 하며, 중요한 의사결정은 문서로 남겨야 합니다. 의료진이 많고 체계가 촘촘할 것 같아도, 결국 한 사람의 생명은 그를 가장 잘 아는 가족의 관심 속에서 지켜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영국의 사건을 통해 또 하나 더 분명해진 것은 조직 내 문화의 중요성입니다.

영국 병원에서는 ‘문제를 말하면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작은 위험 신호들이 무시되었고, 결국 큰 사고로 이어졌습니다.

한국 의료계에서도 내부고발이 쉽지 않은 이유는 비슷합니다. 병원과 요양 시설에서는 불편한 진실이 감춰지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구성원이 거리낌 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환자 안전 개선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환경은 필수적입니다. 의료기관의 신뢰는 시설의 크기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드러내고 고치는 문화에서 비롯됩니다.

영국 사례를 지켜보며 우리는 다시 한 번 의료 안전이 ‘선택’이 아니라 ‘권리’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앞으로 한국의 시니어들이 의료·돌봄 환경에서 더 안전해지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 고위험 환자에 대한 상시 이상징후 감지 시스템 강화
▷ 최소한의 인력이 아닌 ‘충분한 인력’을 기준으로 한 인력 배치
▷ 기록·관찰·응급 대응을 강화하는 디지털 시스템 도입
▷ 가족 참여형 의료 의사결정 체계 확대
▷ 내부고발자 보호 및 투명한 정보 공개 문화 정착

안전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존엄을 지키는 기반입니다.

시니어가 많은 사회일수록 우리는 안전의 기준을 더 높게 잡아야 합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일은 우리에게 불안만을 전달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의 시스템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계기입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막기 위한 노력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개선을 요구하며, 서로 협력할 때 비로소 더 안전한 고령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