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제빵사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유럽연합(EU)은 단일 시장을 표방하며 국경 없는 경제 활동을 약속해 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서비스업 분야에서 국가 간 장벽이 여전히 견고하고, 그로 인해 새로운 삶을 꿈꾸는 개인과 기업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최근 프랑스 제빵사 한 사람이 독일에서 빵집을 열기 위해 18개월 이상 규정과 절차에 막혀 고군분투한 사례는, 단순한 개인의 고난을 넘어 유럽이 직면한 구조적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비단 유럽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령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집니다.
사랑을 따라 국경을 넘었지만, ‘자격’이라는 보이지 않는 장벽
프랑스 제빵사 뤼도빅 제르보앵 씨는 독일 여성과 결혼해 바이에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가 가진 프랑스의 정식 제빵 자격증은 오랜 교육과 수련을 통해 취득한 것이었지만, 독일에서는 이를 그대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격 인정 절차를 포기하고 독일의 ‘베커마이스터’ 시험을 다시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례는 단순히 제빵이라는 기술적 차이에 대한 문제를 넘어, 국가마다 다른 제도와 기준이 한 개인의 삶을 바꿔 놓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기술과 경험이 충분해도, ‘서류’와 ‘제도’가 그 가치를 무력화하는 현실. 이는 우리 사회에서도 반복되는 장면입니다. 직장을 옮길 때, 지역을 바꿀 때, 혹은 정년 이후 새로운 분야에 도전할 때 우리는 종종 ‘자격증’이라는 문 앞에서 멈춰 서야 합니다.
서비스업의 비중은 커지는데, 이동성은 여전히 낮다
EU에서 서비스업은 GDP의 70%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입니다. 그러나 역내 서비스 무역 비중은 GDP의 8%에 그칩니다. 상품 무역(24%)과 비교하면 극도로 낮은 수준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유럽 내부 서비스 규제가 “사실상 11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고 분석했습니다.
경제의 중심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옮겨가는 시대에, 이런 이동성의 부족은 성장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 요인입니다. 이것은 50대 이후 새로운 커리어를 고민하는 많은 시니어들에게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나이와 경험이 풍부해도, 국가나 지역의 규제가 움직임을 제한한다면 인생 후반부의 기회는 쉽게 닫혀 버립니다.
‘품질 보증’이라는 명분, 그러나 지나친 규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독일의 마이스터 제도는 오랜 길드 전통과 장인정신을 기반으로 한 제도입니다. 독일 정부와 지지자들은 품질 보증과 소비자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이 제도를 통해 독일의 숙련 노동력은 글로벌 수준의 경쟁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동일한 논리가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까요?
경제학자들의 분석은 다릅니다. 현실에서는 이 제도가 외부 인력 진입을 차단하고 기존 시장 참여자에게 유리한 구조를 고착시키는 효과가 크다는 것입니다. 2024년 EU 전체 외국 자격증 인정 신청의 25%가 거부되고, 10%는 추가 시험을 요구받았습니다. 이처럼 높은 장벽은 가치 있는 경쟁을 막고 소비자 선택권을 제한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특정 분야에서는 민간 자격증, 국가 자격증, 협회 자격증이 뒤섞여 복잡한 체계를 이루고 있으며, 경력과 경험이 충분한 사람들도 서류 절차 때문에 재도전을 망설이곤 합니다. 시니어 세대가 경험 기반의 직무로 이동하는 데 필요한 ‘전환 자격증’도 체계적으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글로벌 경쟁 시대, 내부 장벽을 허물지 않는다면 미래는 없다
유럽은 지금 글로벌 경쟁력 약화에 대한 위기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의 관세 정책 예고 같은 외부 압력이 커지는 상황에서, 역내 규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세계 시장에서 뒤처질 것이라는 우려가 큽니다. EU 지도자들도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하면서도 각국 내부의 이해관계 때문에 개혁에 소극적입니다.
이 장면은 한국의 상황과도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급속한 고령화와 인구 감소, 그리고 기술 변화 속에서 한국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노동 이동성과 직업 전환이 훨씬 더 유연해져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가 ‘새로운 도전’을 막는 구조를 재편하지 않는다면, 시니어 세대는 물론 젊은 세대도 미래의 기회를 잃게 될 것입니다.
시니어에게 주는 메시지: 국경을 넘는 것은 공간이 아니라 ‘기회’다
제르보앵 씨의 경험은 시니어 세대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나이는 장벽이 아닙니다. 진짜 장벽은 제도와 규제, 그리고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적 관성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다음의 현실 역시 직시해야 합니다.
제도 변화는 느리고 복잡하다.
국경을 넘는 듯한 인생의 전환은 개인적 결단이 필요하다.
규제 장벽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우회하거나 극복할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기반의 기술 습득, 민간 인증의 활용, 시니어 친화적 창업 모델 등은 종종 기존 규제의 영향을 덜 받습니다. 더욱이 디지털 기술의 확산은 국경을 의미 있게 희석시키는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가상 수업, 디지털 컨설팅, 온라인 기반 창업 등은 자격의 벽을 넘어 활동할 가능성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마무리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 필요한 것은 ‘탄력성’
프랑스 제빵사의 여정은 유럽의 구조적 문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인생 후반부의 도전에 대한 상징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삶의 2막, 3막을 열어가려는 시니어에게 필요한 것은 완벽한 제도 환경보다 ‘포기하지 않는 태도’와 ‘지속적인 학습’입니다.
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개인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이 노력해도 한계가 있는 부분은 사회가 바뀌어야 합니다. 이는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풀어가야 할 과제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유연하게 대응하는 능력, 그리고 변화의 흐름을 읽고 한 발 앞서 준비하는 태도는 시니어에게 가장 강력한 자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