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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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番記者 (バンきしゃ, ばんきしゃ, 반키샤; 당번기자)

막부정부가 무너진 1868년 이전까지 일본에서는 어떤 종류의 뉴스, 비판, 추측도 대중에게 배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근대 이전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정부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는 사고방식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정부가 검열을 하지 않아도 개인이나 단체가 스스로 검열을 하곤 했습니다. 이는 단지 처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자기 검열이 도리라고 믿도록 세뇌되었기 때문입니다.

17세기부터 막부정부가 무너질 때까지, 일본에서 대중에게 발행된 뉴스는 전단지 형태였습니다. ‘요미우리(読売, 읽고 파는)’라는 전단지는 큰 사건이 있을 때만 인쇄되어 거리의 상인이 판매했으며, ‘카와라반(瓦版, 기와판 인쇄)’은 그림과 텍스트가 함께 담긴 전단지로 판매 또는 게시되었습니다.

최초의 정기 간행 신문은 1861년 영국인 A. W. 한사드(A.W. Hansard)가 나가사키에서 창간한 「나가사키 쉬핑 리스트 & 애드버타이저」이며, 이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영어로만 발행되었습니다. 일본어 신문은 1868년 에도, 오사카, 교토, 나가사키에서 주간지 형태로 발행되었으며, 첫 일간지인 요코하마 마이니치 신문(横浜毎日新聞)은 1871년에 창간되었습니다.

초기의 일본 신문은 대부분 정치적 견해나 입헌정부 설립 요구를 담은 ‘정치 포럼’ 성격이 강했습니다. 황실이 국회(의회) 설치를 발표한 후, 이러한 신문들은 정치 정당들의 대변인처럼 기능하게 됩니다.

1930년대 초반까지 일본 언론은 개혁적인 언론, 정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관지, 지역 뉴스와 오락성 기사 및 대중소설을 담은 신문 등 다양한 형태로 공존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에 일본 정부가 군국주의 세력에게 장악되면서 주요 신문은 선전 기관으로 전락했고, 출판에 대한 엄격한 검열이 시행되었습니다.

검열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인 1945년에 연합군 점령 하에 공식 종료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일본 주요 언론이 언론 자유와 객관성에 헌신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980~90년대까지도 대부분의 주요 언론은 자사 편집방향에 맞게 뉴스를 선택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이러한 관행 중 하나가 바로 「 番記者 / Ban Kisha」, 즉 특정 정치인에게만 지정된 전담 기자 제도입니다. 먼저 한자의 뜻을 따라 해석해 보면, 番(번)은 정해진 차례에 따라 일정한 시간 동안 어떤 일을 맡아 지키거나 하는 것을 의미합니까. 따라서 반 키샤는 정치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비공식 정보를 얻는 대신, 특종을 제공하는 관계를 유지합니다. 이로 인해 반 키샤와 정치인은 상호 의존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그로 인한 다양한 폐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반 키샤는 해당 정치인의 기자회견에서 맨 앞자리에 앉아 질문 기회를 통제하며, 불편한 질문을 할 가능성이 있는 기자는 철저히 배제됩니다.

1993년 여름, 새로운 시대의 개혁 정치인이자 리버럴 민주당의 장기 집권을 종식시킨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는 반 키샤 제도를 무시하고 기자회견에서 질문자를 직접 지정함으로써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했습니다. 이는 국제적인 뉴스가 되었으며, 그는 외국 기자들의 질문에도 답한 최초의 일본 총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일본 정치의 기존 세력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고, 그의 개혁 내각은 8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키샤 제도는 여전히 일본 언론의 핵심 구조로 남아 있으며, 이후 등장하는 정치인들이 호소카와의 선례를 따르기를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와 비슷한 기자들의 취재 활동이 눈에 띄이곤 합니다. 러시아 공습 현장을 파리특파원이 파리에서 보도한다거나,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들은 보도자료를 노트북PC 에 입력하기 위해서 고개도 들지 않고 타이핑에만 몰두하는 어처구니 없는 장면 등이 그것입니다.

일본의 속마음을 드려다 보니, 우리네 기자 속마음도 ‘보도자료’에 매달려 길들여져 있음이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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