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상을 둘러보면,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는 오히려 과거로 되돌아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학이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사고를 모방하며, 정보가 손끝에서 쏟아지는 시대에, 왜 사람들은 ‘악마의 흔적’을 이야기하고, ‘음모론’에 매달릴까요?
최근 영국의 칼럼니스트 제임스 매리엇은 《더 타임스(The Times)》에 실은 글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의 유산을 너무 쉽게 잃어버리고 있다. 미신과 광신이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의 글 제목은 도발적입니다. 〈In age of demons, we must fight to enlighten — 악마의 시대에 우리는 깨우침을 위해 싸워야 한다〉.
이 문장은 단순한 수사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꿰뚫는 통찰이기도 합니다.
이성이 밀려나는 시대
우리는 스마트폰 속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감정의 폭풍’ 속에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는 논리보다 감정에 반응합니다.
논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목소리, 가장 분노에 찬 주장, 가장 자극적인 영상이 주목받습니다. 사실과 증거는 점점 뒷전으로 밀리고, “내가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악마’, ‘음모론’, ‘영적 공격’ 같은 단어들이 다시 부활합니다. 정치인조차 이를 이용해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유명 인플루언서들은 ‘우주의 에너지’나 ‘의식의 각성’을 상품처럼 포장합니다.
매리엇이 말했듯, “21세기의 정치적 인간이 중세의 미신으로 미끄러지고 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 현상이 단순히 ‘우스운 현상’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합리적 토대를 흔드는 심각한 징후이기 때문입니다.
계몽주의가 남긴 선물
18세기의 계몽주의는 인류에게 하나의 ‘이성의 나침반’을 선물했습니다. 그 이전의 인간은 신의 뜻, 점괘, 전통, 권위에 의존했습니다.
하지만 계몽사상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감히 네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라(Sapere aude).” 이는 이마누엘 칸트가 남긴 명언이자, 계몽주의의 핵심 선언이었습니다. 그 정신 덕분에 우리는 과학을 발전시켰고, 민주주의를 제도화했으며, 인권과 평등을 보편적 가치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 나침반을 다시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이성이 차갑다’며 기피하고, ‘감성이 따뜻하다’며 미신을 포용합니다. 이성이 논쟁을 낳는다고 회피하고, 감정이 사람을 묶어준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성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마지막 방패입니다. 감정이 사람을 움직이지만, 이성만이 사람을 구합니다.
시니어의 눈으로 본 ‘이성의 책임’
젊은 세대가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들의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정체성은 유동적이며, 확신보다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니어 세대는 다릅니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사회적 격변과 가치의 전환을 겪었습니다. 산업화와 민주화, IMF 위기, 디지털 혁명, 팬데믹까지 — 그 모든 변화를 지나오면서도 ‘공통의 이성’이 있었기에 사회는 붕괴되지 않았습니다. 즉, 시니어 세대는 이성의 경험자이자, 합리의 기억을 품은 세대입니다.
지금 사회가 다시 미신과 음모로 흔들릴 때, 바로 우리가 그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이성은 젊은이의 재능이 아니라, 세월이 길러낸 성찰의 힘입니다. ‘믿음’보다 ‘근거’를, ‘감정’보다 ‘균형’을 중시하는 태도가 곧 시니어의 지혜입니다.
‘과학적 사고’는 교양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
오늘날의 복잡한 세상에서 과학적 사고는 더 이상 학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존의 기술입니다.
가짜 뉴스, 의료 사기, 투자 사기, 정치 선동 — 이 모든 위험은 감정에 호소하며 다가옵니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의심하는 능력”은 우리의 노년을 지키는 방패입니다.
예를 들어, 건강 정보를 접할 때 ‘누가 말했는가’보다 ‘어떤 근거가 있는가’를 먼저 따져보아야 합니다. 재테크 정보를 들을 때 ‘수익률’보다 ‘리스크’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계몽주의의 정신은 이처럼 일상의 판단력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그 정신을 기억할 때, 세상은 덜 혼란스러워집니다.
관용이란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 아니다
볼테르는 《관용론》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관용은 미덕이지만, 진리를 흐릴 만큼 관대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누군가 황당한 음모론을 말할 때, 우리는 예의 바르게 듣지만, 그것을 ‘동등한 의견’으로 인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유는 ‘모든 생각을 동등하게 믿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각을 비판할 자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관용이 진리를 희생시키면, 사회는 거짓의 수렁에 빠집니다. 이성적 비판은 결코 무례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유를 지키는 최소한의 예절입니다.
‘에크라제 랭팜(Écrasez l’infâme)’ — 불명예를 짓밟아라
볼테르가 종교적 광신과 미신에 맞서 외친 말입니다. 그는 논리와 풍자를 무기로, 어둠과 싸웠습니다. 그의 정신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오늘날의 악마는 초자연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지, 편견, 선동, 그리고 무비판적 신앙의 형태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그 악마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이성의 불빛’을 꺼뜨리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이성의 등불을 켜야 할 때
노년은 흔히 ‘세상에서 멀어지는 시기’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노년은 세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시기”라고.
젊은 세대가 분노와 흥분으로 세상을 본다면, 시니어는 분별력과 관조의 시선으로 세상을 봅니다.
이 시대에 시니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지혜로운 목소리로, 이성을 되살리는 일입니다. 감정이 폭주할 때는 “잠시 멈추어 보자”고 말하고, 미신이 유행할 때는 “그게 사실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후세에 남겨줄 가장 고귀한 유산입니다.
우리는 지금 ‘악마의 시대’를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계몽의 불을 지필 수 있는 세대이기도 합니다. 불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양심이며, 미신을 몰아내는 것은 젊음이 아니라 경험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시니어의 조용한 목소리가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다시 이성의 불빛을 켜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