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는 ‘예의 바른 나라’로 불립니다. 지하철에서도, 식당에서도, 학교에서도 “예의 있게 행동하라”는 말을 수없이 듣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온 그 예의란 과연 무엇일까요? 겉으로는 공손해 보여도 속에서는 서로를 경멸하고, 불의에 침묵하는 것이 진정한 예의일까요?
미국의 작가 록산 게이는 「예의는 환상이다(Civility is a Fantasy)」라는 칼럼에서 “예의는 종종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만들어 낸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단지 미국 정치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의’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시니어 세대가 살아온 한국의 근현대사는 예의를 중시하는 문화로 가득했습니다. 부모에게, 스승에게, 윗사람에게 예를 갖추는 것은 미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의가 종종 권력자의 방패로 작용했다는 점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윗사람에게 대드는 건 무례하다”, “사회가 정한 틀을 어기면 버릇없다”는 말은, 때로는 불의와 부조리에 침묵하게 만드는 마법의 주문이 되어왔습니다. 정치권의 부패, 기업의 갑질, 사회의 차별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예의의 신화’가 우리를 억눌러 왔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공손하지만, 속으로는 불편함을 참으며 웃는 태도 — 그것은 진정한 존중이 아닙니다. 진짜 존중은 서로를 동등하게 대하는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상대의 지위나 나이와 상관없이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중한 폭력’이라는 또 다른 얼굴
록산 게이는 말합니다. “정중한 말로 차별을 속삭이는 사람들은, 사실상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그의 지적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도 뼈아프게 다가옵니다. 겉으로는 부드럽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배제하는 언어들이 넘쳐납니다.
“나이 들어서 뭘 해?”, “이 나이에 공부는 무슨 공부야”, “그냥 조용히 사는 게 예의지.”
이런 말들은 친절한 조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나이 든 이들의 가능성을 지워버리는 언어의 폭력입니다.
진짜 예의는 누군가의 도전을 막지 않는 것입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사람에게 박수를 보내는 것, 그것이 존중입니다.
예의 없는 세상이 아니라, 진실한 세상
게이는 “무례함(incivility)”을 사회를 바꾸는 힘으로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무례함이란 욕설이나 폭력이 아닙니다. 그것은 침묵하지 않는 용기,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행위입니다.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침묵하는 그날부터 끝나기 시작한다.” 그는 정중했지만, 결코 순응적이지 않았습니다. 예의 바르게 보이기보다는, 정의롭게 행동하기를 택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도 ‘무례한 용기’가 필요합니다.
노인복지 제도의 허점, 고령층 일자리의 현실, 세대 간 불평등 같은 문제들은 “괜히 나서지 말라”는 예의의 이름 아래 쉽게 묻히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시니어 세대의 새로운 역할
오늘의 시니어 세대는 전쟁, 산업화, IMF, 디지털 혁명 등 격변의 시대를 모두 거쳤습니다. 이제는 침묵의 세대가 아니라, 말하는 세대가 되어야 합니다.
“예의 바르다”는 말이 더 이상 ‘참고 견딘다’는 의미로 쓰이지 않도록, 우리는 언어의 무게를 바꿔야 합니다.
정치인에게 질문하십시오. “왜 노인 빈곤율이 OECD 1위입니까?”
공공기관에 묻으십시오. “왜 디지털 교육은 젊은 세대 중심입니까?”
이것은 결례가 아니라,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 예의 있는 행동입니다.
진정한 예의는 진실에서 시작된다
예의란 서로의 상처를 덮는 도구가 아니라, 함께 고통을 직시하는 태도입니다. 정치인과 기업인이 보여주는 가식적 악수, 웃음 뒤에 숨겨진 계산된 관계는 예의가 아니라 연극입니다.
진짜 예의는 연극이 아니라 진심을 주고받는 대화에서 태어납니다. 시니어가 젊은 세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은 “예의 바르게 침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말을 할 때는 목소리를 높여야 하고,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다운 품격입니다.
예의의 환상을 넘어
예의는 결코 사라져야 할 덕목이 아닙니다. 다만 예의의 목적이 바뀌어야 합니다. 겉모습을 꾸미기 위한 예의가 아니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예의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무례하다”고 비난하지 말고, 오히려 “용기 있다”고 평가하는 문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예의의 본뜻—‘서로를 존중하는 질서’—를 되살리는 길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불완전함 속에서도 진심으로 상대를 존중하려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진짜 예의입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시니어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유산입니다.
결론적으로, 록산 게이가 말한 “예의는 환상이다”라는 선언은, 우리에게 “가짜 예의의 껍데기를 벗고 진짜 존중을 선택하라”는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이제는 겉치레의 공손함보다, 따뜻한 진심의 대화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무례할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것이 인간다운 세상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