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비전 제로’ 실패 사례에서 한국이 배워야 할 교통 안전의 교훈
고령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보행 안전은 단순한 교통 이슈를 넘어, 노년층의 생명권과 일상생활의 지속 가능성에 직결된 문제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보행자 사망률이 높은 국가로 지속적으로 지적되고 있으며, 그 희생자 상당수가 60세 이상 어르신들입니다. 그렇다면 교통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 유럽에서 시행된 보행자 안전 정책은 어떤 성과를 거두었을까요. 최근 미국 주요 도시에서 추진된 ‘비전 제로(Vision Zero)’ 프로그램의 실패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비전 제로는 보행자를 포함한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0’으로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유럽에서 시작된 정책입니다. 단순히 운전자의 주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도로 설계·속도 규제·차량 구조 개선 등 시스템 전체를 재구축하는 접근 방식입니다. 실제 유럽연합(EU)은 지난 10년간 보행자 사망을 65% 줄이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목표를 내걸었던 미국 도시들의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뉴욕을 제외한 27개 주요 도시에서 보행자 사망률이 정체되거나 오히려 증가한 것입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사망자가 2배 가까이 늘어난 곳도 나타났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미국 사례는 정책의 실행력 부재, 정치적 반발, 교통문화의 경직성, 예산 부족이라는 네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했음을 보여줍니다.
첫째, 정치적 반발과 지역민의 저항이 정책을 크게 흔들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비스타 델 마(Vista Del Mar)’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보행자 사망 사고가 반복되자 시는 차로 폭을 줄이고 제한 속도를 낮추는 등 개선안을 시행했지만, 일부 주민들은 출퇴근 시간이 늘어난다며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결국 시는 여론에 밀려 개선책을 철회했고, 보행자 사망은 계속 증가했습니다.
정책이 ‘옳은가’보다 ‘불편함이 있는가’가 우선되는 상황에서 안전 개선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이는 “도로 개편은 정치적 용기가 필요하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둘째, 재정 부족과 정책 우선순위의 실종입니다. LA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시의 교통 공무원들이 매년 요청한 예산은 6천만 달러 규모였지만 실제로는 그에 훨씬 못 미치는 돈만 배정됐습니다. 안전시설 확충, 도로 재설계, 속도 단속 시스템 도입 등이 제때 추진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사이, 보행자 사고는 특정 도로에 집중적으로 발생했습니다. 사고 위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동일한 지역에서 3건 이상 사망 사고가 반복되는 ‘핫스폿’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선책은 정치·재정 이유로 미뤄졌고, 결국 시민단체들이 밤에 몰래 횡단보도를 그려 넣는 ‘게릴라 방식’까지 등장했습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시민이 대신한 셈입니다.
셋째, 법·제도적 장벽입니다. 캘리포니아주는 오랫동안 ‘가장 빠르게 달리는 차량 속도’를 기준으로 제한 속도를 정하도록 규정해 왔습니다. 이 규정 때문에 위험한 도로조차 속도 제한을 낮추기 어려웠고, 결국 1976년 비스타 델 마의 제한 속도는 오히려 35마일에서 40마일로 올라가기도 했습니다. 법적 환경이 안전 정책을 가로막은 대표적 사례입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면서 정책은 좌초되었습니다. ‘사람 저장(人命)’을 목표로 삼았지만, 정작 사람이 아닌 ‘차량 흐름’이 우선시되면서 도시가 추구해야 할 가치의 중심이 흔들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미국의 실패 사례는 한국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을까요?
한국도 마찬가지로 고령층 보행자의 위험이 증가하고 있으며, 도시 구조와 교통문화 역시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의 약 40%가 보행자이며, OECD 평균의 두 배 수준입니다. 특히 어르신들의 골절·중상 위험은 젊은 층보다 훨씬 크게 나타나며, 사고 후 회복 기간도 길어 삶의 질 전체가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이 교통 안전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입니다.
첫째, 보행 중심 도시 설계로의 전환입니다.
단순한 도로 보수가 아니라, 운전자가 자연스럽게 속도를 줄이고 보행자를 확인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핵심입니다. 교차로의 시야 확보, 보행 신호 시간 연장, ‘고령자 보호구역’ 추가 지정 등은 매우 효과적인 조치입니다.
둘째, 시민과 정치권의 인식 전환입니다.
안전 정책은 반드시 ‘불편함’을 수반합니다. 주차 공간이 줄어들고, 통행 속도가 느려지고, 도로 공사가 반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생명을 지키기 위한 비용”이며, 유럽 도시들이 체질 개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인식 전환에 있습니다.
셋째, 예산과 기술의 안정적 투입입니다.
AI 기반 속도 단속 시스템, 교통량 분석, 사망 사고 예측 모델 등은 이미 여러 국가에서 효과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령층이 자주 이용하는 복지관·의원·전통시장·버스정류장 주변의 보행 안전망을 강화하면 실제 사고 감소 효과가 크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미국 비전 제로 사례에서 가장 뼈아픈 점은 ‘정책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정책의 방향과 목표가 아무리 훌륭해도, 실제 변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초고령화에 들어섰고, 앞으로 10년 내 65세 이상 인구는 전체의 30%에 가까워집니다. 보행 안전은 단지 한 부처의 과제가 아니라 복지·보건·도시 정책이 함께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입니다.
도로 위에서의 생명은 우연에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시민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미국의 실패는 경고이고, 유럽의 성공은 희망입니다.
한국은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이 질문에 답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