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07일
제28세-김격-1-POST

강릉 김씨 김격(金格) 장년 초상 상상도 인물의 모습 (Personage) 연령: 40대 초반 (1650년대 초반). 외모: 얼굴은 지적이고 고요한 인상을 가지며, 광대뼈와 턱선에 단호함이 엿보입니다. 이는 조부(김몽호)와 부친(김득의)의 관직 생활과 본인의 학문 정진에서 비롯된 강직한 성품을 반영합니다. 눈빛은 사색적이고 깊이가 있으며, 병자호란(1636~1637)을 겪은 세대로서의 근심과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수염은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으나, 숱이 많지 않아 청렴하고 검소한 선비의 풍모를 드러냅니다. 복식: 심의(深衣) 또는 단령(團領) 대신 편복(便服) 차림으로 묘사됩니다. 짙은 남색이나 회색 **도포(道袍)**를 단정하게 갖춰 입고, 허리에는 실용적인 **세조대(細條帶)**를 맸습니다. 머리에는 정자관(程子冠) 대신 평상시에 쓰는 **유건(儒巾)**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중앙 관료의 길보다는 재야(在野) 학자이자 지역 사족으로서의 삶을 택했음을 상징합니다. 배경 및 분위기 (Setting & Atmosphere) 배경: 강릉의 자택 서재 혹은 삼왕속명동 선영 근처의 암벽을 배경으로 합니다. 배경은 흐릿하게 처리되어 인물에 초점을 맞추되, 왼쪽에 서책 몇 권과 붓통을 배치하여 학문에 전념하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분위기: 전체적으로 어둡고 엄숙한 톤을 유지하며, 좌우의 명암 대비를 강하게 주어 중후함을 강조합니다. 빛은 오른쪽 상단에서 은은하게 비추어 인물의 눈가와 이마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이는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을 다스리는 선비의 결기를 나타냅니다. 자세: 김격은 몸을 정면이 아닌 왼쪽으로 살짝 틀고 앉아 있으며, 고개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단정하게 놓여 있고, 왼손으로는 책 한 권을 가볍게 잡고 있습니다. 자세는 매우 곧고 단정하여 예(禮)를 중시하는 조선 사대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二十八世 格 字 止哉
字止哉一六一三年光海癸丑四月二十五日生一六六四年顯宗甲辰十二月一日卒(墓)江陵城山面三王續命洞庚坐墓表五代孫學規識配安東金氏父進士聲徹祖校尉維曾祖宣務郞德록上洛君士衡后外祖生員江陵崔承安一六一四年光海甲寅十二月三日生一六七二年顯宗壬子四月四日卒墓附立碑十代孫起弘
(得毅의 長男, 次男은 柅)
西紀 1613年 光海 5년 癸丑 4月 25日生
西紀 1664年 顯宗 5년 甲辰 12月 1日卒 (壽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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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김씨 김격(金格, 字 止哉)의 일대기: 전란과 가문의 흥망 (1613~1664)

1. 명문가의 후예로 태어나다 (1613년 ~ 1623년)

김격1613년(광해군 5년), 격동의 조선 중기에 명문 강릉 김씨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문 배경은 일반적인 지방 사족을 넘어섭니다.

    • 조부 김몽호 (夢虎, 1557~1637): 조선왕조실록에 97회 언급될 정도로 유력했던 인물입니다. 1609년(광해군 원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장악원정 등 언론(言論)과 요직을 두루 거쳤습니다. 격이 태어난 해(1613년)에도 사간원 정언과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며 조정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 부친 김득의 (得毅, 1595~1653): 1633년(인조 11년)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이후 음직(蔭職)과 관직을 통해 **참봉, 직장, 마전군수(麻田郡守)**에 제수될 정도로 학문적 배경과 행정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김격의 유년기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현직 관리이자 학자였던 시기였습니다. 그는 숭유(崇儒) 사상이 확고했던 강릉 지역에서 엄격한 유교 교육을 받으며, 당연히 부친과 조부의 뒤를 이어 **대과(문과)**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것입니다.

2. 격랑 속의 청년기: 인조반정과 호란 (1623년 ~ 1640년)

김격이 10세가 되던 1623년(인조 원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고 정권이 교체되는 대격변이 발생했습니다. 조부 김몽호는 광해군 대에 높은 관직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반정 후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어 1636년(인조 14년) 동지중추부사까지 오르는 등, 정치적 격변기에도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는 격의 가문이 당색(黨色)에 크게 치우치지 않는 실무형 관료 가문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그러나 격의 청년기는 연이은 전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습니다.

    1. 정묘호란 (1627년): 격 14세.
    2. 병자호란 (1636년): 격 23세. 이듬해 조부 김몽호가 세상을 떠났는데, 조부는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민족적 치욕을 겪는 해를 전후하여 관직에 있었습니다. 격은 이 시기에 과거 준비와 학문 정진에 전념했겠지만, 국난의 충격 속에서 학업이 크게 흔들렸을 것입니다.

격은 부친 김득의가 진사로 급제하여 가문의 학문적 명예를 유지하고, 이후 마전군수에 제수되는 모습을 보며 가문의 위상을 지켜야 한다는 책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3. 학문에 뿌리내린 삶과 가문의 대 (1640년 ~ 1664년)

김격의 생몰년 기록에는 그가 대과에 급제하여 중앙 관직에 올랐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는 그가 조부와 부친처럼 중앙 관료의 길을 걷기보다는 학문을 연마하고 지역 사회의 사족으로서 **도학(道學)**을 실천하는 삶을 택했음을 추정하게 합니다. 그의 자(字)인 **’지재(止哉, 그쳐야 할 때 그친다)’**는 이름 역시, 격변하는 정치 상황 속에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려는 군자의 자세를 반영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 배위와 가통: 그는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딸과 결혼하여 장남 **득의(得毅)**와 차남 **니(柅)**를 두어 가문의 대를 이었습니다. 학문에 뜻을 둔 집안에서 명문 안동 김씨와 사돈을 맺은 것은 가문의 위상을 공고히 하는 중요한 결합이었습니다.
    • 17세기 후반의 시대상: 격이 살았던 효종(孝宗)과 현종(顯宗) 재위기(1649~1664년)는 북벌론이 고조되었고, 대동법 등 광범위한 세제 개혁이 확산되며 농촌 경제에 변화가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또한 1659년 기해 예송이 터지면서 예(禮)를 둘러싼 학문적·정치적 논쟁이 조정과 사림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강릉의 유력 사족이었던 김격은 이러한 예학(禮學) 논쟁 속에서 가문의 전통을 수호하며 유교적 가치관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1664년(현종 5년) 12월 1일, 김격은 52세의 일기로 강릉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비록 짧은 생이었으나, 그는 조선의 가장 격동적인 시대를 명문가의 자제이자 학자로서 묵묵히 살아냈습니다.

4. 김격의 유산

김격의 존재는 후손들의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 묘소와 기록: 그의 묘소는 강릉 성산면에 **경좌(庚坐)**로 자리 잡았으며,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5대손 학규가 묘표를 기록하고 10대손 기홍이 배위의 비(碑)를 세웠습니다. 이는 김격이 당대 지방 사족으로서 가문의 구심점이었으며, 그의 숭고한 삶이 후대에 미친 영향이 지대했음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 학통의 계승: 조부 김몽호로부터 부친 김득의(진사), 그리고 김격 자신으로 이어진 학문적 가통은, 관직의 화려함보다는 지방 유림으로서의 도덕적 권위를 지키며 지역 사회에 뿌리내리는 형태로 계승되었습니다.

김격의 일생은 **중앙 정계의 중심(조부)**에서 **지방 사족의 학문적 구심점(본인)**으로 이어지는 17세기 조선 사대부 가문의 변화와 안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