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1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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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見込み発注(みこみはっちゅう, 미코미 하츄, 예상하고 선주문, Anticipating Customer Needs)

에도 막부 시대(1603~1868)에 형성된 일본 사회는 극도로 동질화된 사회였습니다. 사무라이 계급은 교토 황실의 예법을 본받아 몸의 움직임, 말투, 억양에 이르기까지 세세한 행동 규범을 정립하였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서로의 행동과 말을 거의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문화 속에서 ‘腹芸(はらげい, 하라게이, the art of the belly)’, 즉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과 의도를 읽는 능력이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문화적 배경 위에서 ‘見込み発注(みこみはっちゅう, 미코미 하츄, 예상하고 선주문)’, 즉 ‘예상 주문’(anticipated ordering)’이라는 상거래 관행이 일본 비즈니스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개념은 제조업체나 공급업체의 영업사원이 고객이 실제로 주문서를 발주하기 전에 미리 그 주문을 예측하여 생산 및 발주를 걸어 두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제가 감사실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고객이 주문을 하면 4주가 걸리는 A제품이 있습니다. B 고객사는 아주 정기적으로 A 제품 주문을 했었고, 주문을 하면서 4주가 걸리는 것을 알면서도 1주 내에 출고를 하라는 추가 요구를 합니다. 고객이 주문도 하지 않은 선주문을 전산 시스템에 입력하면서 일사천리로 일은 진행되었습니다. 그 고객을 담당하는 C 영업팀의 영업 직원과 담당 임원은 ‘見込み発注(みこみはっちゅう, 미코미 하츄, 예상하고 선주문)’에 따라서 순순히 고객의 출고 일자를 맞추어 3주전에 고객 주문을 생산 요청 시스템에 등록했기 때문에 B고객사는 대만족했습니다.

이러한 시스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공급자와 고객 사이에 깊은 신뢰 관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공급자는 고객의 필요와 패턴을 충분히 이해하고, 관계의 안정성을 신뢰하기 때문에 실제 주문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상품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고객이 어떤 이유로 실제 주문을 하지 못하더라도, 공급자는 그 주문을 그대로 보유하며 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책임을 집니다. 반대로 고객 측에서는 자신의 필요가 갑자기 발생했을 때 언제든 즉시 납품을 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게 됩니다.

이러한 상호 신뢰와 긴밀한 유대는 일본 사회가 오랫동안 중시해 온 관계 중심의 상호 의존 구조를 반영합니다. 거래를 단순한 계약 행위로 보지 않고, 상호 간의 오랜 신뢰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관계적 계약’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코로나19가 종료되면서 온라인 수업을 하던 학교의 운영방식이 전면 등교로 전환되면서 A제품의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던 C영업팀은 B고객의 주문이 없었음에도 ‘見込み発注(みこみはっちゅう, 미코미 하츄, 예상하고 선주문)’이 이루어져 A제품은 착착 제조 공정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4주째 될 때 B고객은 주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C영업팀은 B고객사에 긴급 출장으로 상황 파악에 들어갔습니다. B 고객사는 완제품 수요가 줄어 이번 달 주문은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A제품은 주문도 하지 않은 채 생산이 완료되어 창고에 보관되었고, 끝내 제조유효기간이 지나면서 대량 폐기하는 상황이 확인되었습니다. C영업팀은 고객사의 주문이 없음에도 생산 지시(PO, Prodect Order)를 했고, 이에 따른 최종 손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외국 기업이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가장 큰 어려움 중 하나가 바로 이 ‘見込み発注(みこみはっちゅう, 미코미 하츄, 예상하고 선주문)’식의 신뢰 구조를 구축하는 일입니다. 일본 내에서 외국 기업이 신뢰받는 공급 파트너로 인정받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오랫동안 일본 기업들은 외국 업체들에 대해 납기가 불확실하며, 긴급 상황에서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다고 불평하곤 했습니다.

1990년대 이후 대부분의 외국 기업이 여러 면에서는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지만, ‘見込み発注(みこみはっちゅう, 미코미 하츄, 예상하고 선주문)’ 일본식 신뢰 기반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여전히 가장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일본의 거래 문화에서는 계약보다 신뢰가 우선하고, 계산보다 ‘상대의 마음을 미리 읽는 능력’이 중시됩니다.

이런 점에서 ‘見込み発注(みこみはっちゅう, 미코미 하츄, 예상하고 선주문)’는 단순히 상거래상의 기술적 용어가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에 흐르는 상호 신뢰와 암묵적 이해(暗黙知, tacit knowledge)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요구를 명시적으로 듣기 전에 미리 예측하고 준비하는 세심한 배려, 바로 이것이 일본적 협조 문화의 본질이며, ‘하라게이(腹芸)’나 ‘기쿠바리(気配り, 세심한 배려)’와 맞닿아 있는 사고방식입니다.

‘미코미 하츄(見込み発注)’는 거래의 기본 단위가 계약서가 아니라 인간관계라는 점, 그리고 상대의 필요를 미리 읽고 준비함으로써 관계의 신뢰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일본 비즈니스 문화의 핵심적인 특징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관계는 단기적인 효율보다 장기적인 신뢰를 중시하며, 단순한 거래를 넘어서는 인간적 유대를 경제적 행위 속에 통합시킨 일본적 가치관을 잘 드러냅니다.

그러나 ‘문서화’하지 않는 것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지 못합니다. 기업 내의 모든 업무는 ‘기록’을 근거로 하기 때문입니다. ‘기록을 잘한다는 일본’이라는 고정 관념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