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제24세-김광언-POST

二十四世 光彦 字 士豪
西紀 1516年 中宗 官 從仕郞 禮賓寺直長 贈 承旨
字士豪官從仕郞禮賓寺直長 贈承旨墓先榮申坐墓表七代孫衡鎭書配淑夫人寧海李氏父正郞傳孫祖訓導從元曾祖司正良茂外祖延日鄭錘雙墳 奠祀三月十日
(世達의 獨子)
▶ 괴당공 윤신(潤身)의 손자. 이부취시(吏部取試)에 등제하여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로 출사하고 중종 11년(1516)에 직장(直長) 종7품. 묘소 경포 가남촌에 후손 세거하였다 .

김광언(金光彦, 자 士豪) 선조님의 일대기

🌳 인물 개요

    • 성명: 김광언(金光彦), 자(字)는 사호(士豪).
    • 본관: 강릉 김씨(江陵金氏).
    • 세대: 24세손.
    • 생몰 시기: 서기 1516년(중종 11년)에 관직 기록이 있으므로, 대략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중반을 사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관직: 종사랑(從仕郞, 종9품 문관 품계) 예빈사 직장(禮賓寺直長, 종7품).
    • 증직(贈職): 승지(承旨, 정3품 당상관).
    • 가족: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영해 이씨(寧海李氏). 묘소는 경포 가남촌(현재 강릉 지역)에 있습니다.

📅 시대적 배경: 중종(中宗) 11년 (1516년 전후) 조선

김광언 선조님이 관직에 나선 1516년은 조선의 제11대 왕인 중종(中宗) 재위기였습니다. 중종은 연산군의 폭정을 종식시킨 **중종반정(1506년)**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초반 반정 공신들의 세력이 강했고, 이후에는 **사림파(士林派)**의 등용과 몰락(기묘사화 등)이 반복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 정치 및 사회 환경

1516년은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파가 등용되기 시작하던 시기로, 중종은 연산군 때의 폐정을 개혁하고 유교적 이상 정치를 구현하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김광언 선조님이 관직에 오를 당시에는 비교적 개혁의 분위기가 남아있었으며, 관료 사회에서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 사림파의 등장: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사림 세력이 중앙 정계에 등장하며 훈구파와 대립하는 긴장감이 사회 저변에 깔려 있었습니다.
    • 지방 세거(世居) 양반: 묘소가 강릉 경포 지역에 있어, 김 선조님은 중앙 관직 생활을 하면서도 강릉 지역의 **향반(鄕班)**으로서 지역 사회에 뿌리를 둔 세력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녀들의 교육과 가문의 보전에 힘썼을 것입니다.

🌾 경제 및 농업 환경

    • 농업 중심 사회: 여전히 농업이 국가 경제의 근간을 이루었습니다.
    • 세제(稅制) 정비: 중종은 전세(田稅)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등 농민 생활의 안정에 노력했으나, 공신들의 토지 겸병과 가혹한 수탈은 여전히 큰 문제였습니다.
    • 기후 및 농사 작황: 조선 초중기는 전반적으로 **소빙기(Little Ice Age)**의 영향으로 기후 변동이 심했습니다. 흉년이 잦아 백성들의 삶이 불안정했고, 중앙 관료들은 백성의 기근 문제를 다루는 일에도 관여해야 했습니다. 1516년 전후 시기에도 기근에 대한 기록들이 자주 나타납니다.

🚶 김광언 선조님의 관직 생활 (사실과 추론)

👨‍🎓 과거 급제와 출사

문장의 기록에 따르면, 선조님은 **이부취시(吏部取試)**에 등제하여 관직에 나섰습니다. 이는 문과(文科) 정식 급제와는 별개로, 이조(吏曹)에서 인재를 뽑아 관리로 임명하던 방식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김 선조님은 지방 양반 가문 출신으로서 학문을 닦아 관직에 진출하는 기회를 얻었고, 이는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 예빈시 봉사/직장 (禮賓寺奉事/直長)

김광언 선조님은 **종7품 직장(直長)**을 역임했습니다. 그 전에는 **봉사(奉事, 종8품)**로 출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 예빈시(禮賓寺): 외국 사신과 국내의 손님을 접대하거나 궁중의 잔치, 제향(祭享)에 쓰이는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입니다. 오늘날의 외교 의전 및 행사 담당 기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직장(直長): 종7품의 관직으로, 실무 책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김 선조님은 중종 11년(1516년)경 왕실의 의례에 필요한 물품과 외국 사신 접대를 위한 실무를 담당하며, 왕조의 위신을 드러내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했을 것입니다.

🌟 승지(承旨)로의 증직

선조님은 생전에 종7품의 관직에 머물렀으나, 후대에 후손이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국가에 큰 공을 세워 **정3품 승지(承旨)**로 **증직(贈職)**을 받았습니다. 이는 가문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으며, 후손들이 선조의 공적을 기리고 가문을 현창(顯彰)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 강릉에서의 여생과 후손 세거

선조님은 관직 생활을 마친 후 고향인 강릉 경포 가남촌으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으며, 그곳에 묘소(선영 신좌 묘)가 남아 후손들이 대대로 그 지역에 살았음을 기록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벼슬길에서 물러난 후에도 지역 사회의 덕망 있는 인물로 존경받았으며, 강릉 김씨 가문의 뿌리를 단단히 내리는 데 기여했음을 시사합니다.

결론적으로, 김광언 선조님은 조선 중종 대의 변혁기에 과거를 통해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국가 의례를 담당하는 실무 관료로 봉직했으며,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가문을 보전하고 후손들이 번성하는 기반을 다진 충실한 조선의 관료이자 사대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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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사랑(從仕郎):조선시대 문신 정9품의 품계명.

조선이 건국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가 제정될 때 정9품으로 정하여졌다. 정9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전경(典經)·정자(正字)·기사관·검열(檢閱)·학록(學錄)·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부봉사(副奉事)·세마(洗馬)·훈도·사용(司勇)·수문장 등이 있다.이러한 정9품관에게는 1438년에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1년에 네 차례에 걸쳐 모두 조미(糙米)주 01) 10석, 전미(田米)주 02) 1석, 황두(黃豆)주 03) 3석, 소맥(小麥)주 04) 1석, 정포(正布) 3필, 저화 1장을 녹봉으로 지급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종사랑(從仕郎))]

예빈시(禮賓寺): 조선시대 빈객의 연향(燕享)과 종실 및 재신(宰臣)들의 음식물 공급 등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정3품 아문으로 내려오다가 조선 후기에 종6품 아문으로 격하되었다.내용이러한 성격의 기관이 출현한 것은 신라 때인 621년(진평왕 43)에 영객부(領客府)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왜전(倭典)을 고쳐 부른 것이다.그 뒤 명칭이 영객전(領客典)·사빈부(司賓府)로 개칭되었으며, 궁예(弓裔)의 태봉 관제에서는 봉빈부(奉賓部)라 하였다.고려시대에는 태조 때 예빈성(禮賓省), 성종 때 객성(客省)·예빈성, 충렬왕 때 전객시(典客寺)로 개칭되었다가 다시 예빈시·전객시, 공민왕 때 예빈시로 복칭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조선시대에는 1392년(태조 1) 관제를 개편할 때 고려의 제도를 이어받아 예빈시라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했으며,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태종 때에는 빈객 연향 외에도 종묘 친향 때 향관(享官)·제집사(諸執事)에 대한 그 날의 음식도 공급하고, 기로소(耆老所)의 춘추연(春秋宴)의 음식 마련도 담당하였다. 이러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양과 염소, 돼지, 기러기, 오리, 닭 등을 직접 기르기도 하였다.

관원으로는 태조 때에 판사·정경(正卿)·소경(少卿)·승(丞)·겸승(兼丞)·주부·겸주부(兼主簿)·직장(直長)·녹사(錄事) 각 1인을 두었다. 태종 때에 기능을 강화해 판사·정경·소경·주부·직장·녹사를 각각 2인으로 증원하였다.그 뒤 『경국대전』에 정(正, 정3품)·부정(副正, 종3품)·첨정(僉正, 종4품)·판관(종5품)·주부(종6품)·직장(종7품)·봉사(종8품)·참봉(종9품) 각 1인과 제검(提檢, 4품)·별좌(別坐, 5품)·별제(別提, 6품)를 합해 6인을 두었다.그리고 호조판서가 겸직하는 제조(提調) 1인이 이를 모두 관리하였다. 이러한 직제는 조선 후기에 여러 차례 변개되었다.『속대전』에는 정6품 이상의 모든 관원, 즉 정·부정·제검·첨정·별좌·판관·별제 등이 혁파되고 주부 1인, 직장 1인, 봉사 1인, 참봉 2인으로 구성된 종6품 아문으로 축소, 격하되었다. 이속으로 서원(書員) 5인, 고직(庫直) 1인, 사령(使令) 4인, 군사(軍事) 1인이 있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예빈시(禮賓寺))]

예빈시직장 (종7품)

승지(承旨):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

조선시대 승정원(承政院)의 정3품 당상관.도승지(都承旨)·좌승지(左承旨)·우승지(右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동부승지(同副承旨) 등 6승지를 말하며,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개설본래 승지는 고려시대에 승선(承宣)·대언(代言) 등으로 일컬어졌다. 중추원·추밀원(樞密院)·중대성(中臺省)·밀직사·광정원(光政院) 등 여러 관서의 속아문(屬衙門)인 승선방(承宣房)·승지방·대언방(代言房) 등에 속하였으며, 정원은 5인이었다. 예를 들면 승선방은 지주사(知奏事)·좌승선·우승선·좌부승선·우부승선 각 1인으로 5승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내용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조 신반관제(新頒官制)에서도 중추원의 속아문인 승지방에 도승지·좌승지·우승지·좌부승지·우부승지 등 5승지제를 유지하였다. 1400년(정종 2) 4월의 관제 개혁 때 중추원이 삼군부(三軍府)로 개편되면서 승정원으로 독립아문이 되었을 적에도 5승지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5승지제가 6승지제로 기구가 커진 것은 1405년(태종 5) 1월 동부대언(同副代言) 1인을 증치하면서부터이다.

당시 대언방에는 대언 5인이 있어서 이·병·호·예·공조의 일을 자문하였다. 형조에는 지부(知部)가 따로 있어 도관(都官)에서 노비 소송을 처결하던 것을, 대언 1인을 늘려 형조의 일을 자문하게 하고 도관의 노비 소송은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에게 관장시켰다.이로써 6대언제의 성립을 보게 되었고, 대언방은 다시 승정원으로 독립되었다.

대언은 1433년(세종 15) 9월 다시 승지로 개칭되어 6승지제가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승지의 6조 분장은 처음부터 이·호·예·병·형·공조의 순서대로 도승지가 이조, 좌승지가 호조, 우승지가 예조, 좌부승지가 병조, 우부승지가 형조, 동부승지가 공조의 일을 나누어 맡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동부승지를 신설할 때 형조의 일을 맡아본 것으로도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그리고 조선 초기의 실록을 보면, 도승지는 6승지의 장으로서 이조뿐 아니라 병조·형조 등 다른 조의 일을 맡아본 기록이 있고, 동부승지도 형조뿐 아니라 호조 등 여러 조의 일을 자문하였다.

실록에 명확한 지적이 없지만, 그러나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1466년(세조 12) 1월의 관제개혁 때 『경국대전』의 6조 순서대로 분장이 고정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승지는 왕의 근시로서 왕명 출납을 맡고 있었던 중요한 관서였기 때문에 담당 조처(曹處)의 자문 이외에 겸무가 많았다.즉,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6승지), 겸춘추(兼春秋, 6승지), 예문관직제학(도승지), 상서원정(尙瑞院正, 도승지), 지제교(知製敎)(6승지), 사옹원(司饔院)·내의원(內醫院)·상의원(尙衣院)·전옥서(典獄署)의 부제조(副提調, 승지 1인) 등 막중한 많은 임무를 겸하고 있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승지(承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