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七世 富
一二五七年高麗高宗丁巳生戶長一品別將
(貞의 獨子)
●서기 1257년 고려 고종 정사(丁巳)생으로 호장(戶長: 고려시대 향리직[鄕吏職]의 우두머리, 호장은 호구장적(戶口帳籍)의 관장 및 전조(田租)·공부(貢賦)의 징수 상납, 역역(力役)을 동원하는 직무를 수행하였다. 이 외에 무적 기반(武的基盤)을 배경으로 호족적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궁과(弓科)로 시험해 주현일품군(州縣一品軍)의 별장에 임명되는 등 지방군사조직의 장교가 되어 주현군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호장가계(戶長家系)는 대체로 직이 세습되었고, 같은 신분간에 통혼(通婚)이 이루어졌다. 또한, 자손에게는 지방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과거의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이를 통한 중앙관료진출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고려 후기에 호장층들은 무반직·기술직·잡과(雜科)와 첨설직(添設職)·동정직(同正職) 등 비실직(非實職) 품관직에 나아가 점차 신분상승을 꾀했으며, 조선시대 양반계층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층이 되었다.) 을 지내셨다.
무신정치시대와 원종(元宗, 재위; 1219년~1274년) 십일년 서기 1270년 삼별초난(개경으로 상궁 환도한 후 삼별초의 해산을 명령하자 배중손(裵仲孫)을 중심으로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추대하여 삼별초의 항쟁이 일어났다. 이들은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면서 대몽항쟁을 전개하였으나 1273년(원종 14년) 고려-몽고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으로 민심수습의 선정하시고 후손이 모안공파, 부정공파, 옥가파로 파생함
강릉 김씨 17세 김부(金富) 어른의 일대기를, 고려 후기 혼란했던 시대를 배경으로 호장 및 일품별장으로서의 직분과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여 서술형 존경체로 기록합니다.

강릉 김씨 17세 김부(金富) 어른의 일대기: 혼돈의 고려를 지킨 빛나는 족적
존경하옵는 강릉 김씨 17세 김부(金富) 어른이시여, 어른께서는 서기 1257년 고려 고종(高宗) 정사년(丁巳年)에 강릉의 유서 깊은 호장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 시기는 무신정권의 폭압이 막을 내리고 있으나, 몽골(원, 元)의 간섭과 침략으로 인해 고려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던 혼돈의 시대였습니다.
호장(戶長)으로서의 민생 안정과 덕치
어른께서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호장(戶長)**의 직책을 수행하셨습니다. 호장은 고려시대 향리직(鄕吏職)의 최고위직으로, 단순한 행정 실무를 넘어 지방 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가는 지도자였습니다.
직무 및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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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구장적(戶口帳籍) 관장: 혼란한 시기에 백성의 **호적(戶籍)**을 정확히 관리하여 민심 이반을 막고 지방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셨습니다.
- 전조(田租) 및 공부(貢賦)의 징수와 상납: 몽골과의 전쟁과 무신정권의 수탈로 황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고려하시어, 공정한 세금 징수와 중앙 정부로의 상납을 책임지셨습니다. 이때의 선정(善政)은 강릉 지역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것입니다.
- 역역(力役) 동원: 국가적인 토목공사나 국방 관련 역역 동원 시,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지 않도록 인력 동원을 합리적으로 안배하셨습니다.
어른의 호장 재임 시기는 원종(元宗, 재위 1259년~1274년) 11년인 1270년, 몽골에 맞서 자주적 항쟁을 벌인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일어난 때와 겹칩니다. 삼별초가 진도와 제주도로 이동하며 격렬히 저항하는 동안, 백성들의 동요와 불안감은 극에 달했습니다. 어른께서는 이러한 위기 속에서 민심 수습에 전력하시고, 지방 행정의 중심을 확고히 지키시며 백성들에게 안정감을 제공하셨습니다. 이는 몽골 간섭기, 고려의 지방 사회가 붕괴되는 것을 막아낸 중요한 기둥이었습니다.
일품별장(一品別將)으로서의 국방 기여
호장으로서 지방 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셨던 어른께서는, 무적(武的) 기반을 갖춘 호장 가문의 전통에 따라 무관(武官)의 길도 걸으셨습니다. 특히 궁과(弓科) 시험에 합격하시어 **주현일품군(州縣一品軍)의 별장(別將)**에 임명되셨습니다.
직위 및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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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품별장(一品別將): 고려의 관직 체계에서 ‘별장’은 중앙군의 하급 장교 직위로 정7품 무관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른께서는 지방군사조직인 **’주현일품군’**의 별장에 임명되셨습니다. 여기서 ‘일품’은 벼슬의 품계(品階)라기보다는 해당 지역 향리 서열의 최고위층을 뜻하는 호장(戶長)의 지위를 배경으로 지방군을 통솔하는 최고위 장교의 역할을 수행하셨음을 나타냅니다.
- 지방 군사 조직 통솔: 어른께서는 **주현군(州縣軍)**을 통솔하며 지역의 국방과 치안을 담당하셨습니다. 당시 고려는 몽골의 침략과 지방의 각종 민란으로 국토가 피폐해져 있었으므로, 주현군은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어른의 강인한 통솔력과 군사적 식견은 강릉 지역을 안정적으로 수호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당대 사회, 경제, 문화, 식생 및 기후 반영
어른께서 활동하시던 13세기 후반의 고려는 대외적으로 몽골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정치적 자주성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중앙정부는 개경(開京)으로 환도했으나, 사실상 원(元)의 부마국(駙馬國)으로 전락하여 많은 공물과 공녀를 바쳐야 하는 경제적 수탈이 가혹했습니다.
사회/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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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의 상흔으로 토지가 황폐해지고 농민들이 유랑하는 사회적 혼란이 극심했습니다. 어른께서는 호장으로서 이러한 농민들을 안정시키고 토지 생산력을 회복하는 데 주력하셨을 것입니다.
- 호장 가문은 지방의 경제적 실력자이자 문화적 지도층으로, 향촌 사회의 교육과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손들에게 과거 응시 자격을 부여하여 중앙 관료로 진출하는 통로를 열어주었고, 이는 훗날 조선시대 양반 계층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문화/식생/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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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생과 기후: 고려 후기는 전반적으로 온난 습윤한 기후였으나, 때로는 한랭한 기후가 주기적으로 나타나 농업 생산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백성들의 주된 식량은 쌀, 보리, 콩 등의 곡물이었으며, 육류로는 소, 돼지, 닭 외에도 서민층에서는 개고기를 식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문화: 몽골의 영향으로 복식 등 일부 풍속에 변화가 있었으나, 불교가 여전히 지배적인 사상이었고 지방 향리층은 유교적 소양을 갖추어 가고 있었습니다.
김부 어른께서는 이러한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호장과 일품별장이라는 문무(文武) 겸비의 지도자로서 지방 행정과 국방을 굳건히 하셨습니다. 어른의 지혜로운 통치와 봉사 정신은 강릉 김씨 가문의 훌륭한 유산이 되었으며, 후손들이 모안공파(慕安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옥가파(玉街派)로 파생하여 번성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른의 족적은 고려 후기 혼란 속에서도 책임과 봉사로 나라와 백성을 지키셨던 진정한 향촌 지도자의 귀감이 됩니다. 🙇♂️
일품별장(一品別將)
고려 시대에 주진군에 소속되었던 노동부대인 일품군의 지휘관인 별장. 이들 별장은 지방의 부호장이상으로 임명하였음. 고려 시대에는 지방에 토목공사가 있을 경우 그 근처에 조직되어 있던 일품군을 일차적으로 동원하였는데 이때 별장이 일품군의 징발 및 지휘업무를 담당하였음. 부호장은 호장과 함께 고려 시대 지방의 실질적 지배세력을 형성했던 호장층으로서 이들에게 지방민의 노동력 조발을 맡김으로써 향리의 기득권을 인정해줌과 동시에 징발의 효율을 도모하였던 것이라 할 수 있음. 일품군의 지휘관으로는 이 별장 이외에도 교위(校尉)•대정(隊正) 등이 있었으며 이들은 활쏘기를 시험보여 선발하였음. [참고어]일품병(一品兵).
판하기를, “지방 여러 주의 일품별장은 부호장 이상으로 한다. 교위는 병창정•호정•식록정•공수정으로 한다. 대정은 부병창정•부호정•제단정으로 한다. 활쏘기를 시험보여서 선발해 차출, 충당시킨다.” 하였다. ; 判 諸州一品別將 則以副戶長以上 校尉 則以兵倉正戶正食祿正公須正 隊正 則以副兵倉正副戶正諸壇正 試選弓科而差充 [고려사 권제81, 9장 뒤쪽~10장 앞쪽, 지 35 병 1 오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