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제10세-김방감-POST

十世 方鑑
戶長, 保勝別將

◎ 김방감(方鑑), 강릉김씨 10세손으로 아버지 김소(召)의 독자(獨子)

●호장(戶長), 보승별장(保勝別將, 홍위위의 보승 7령 중 정 7 품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관직, 한 군대에서 부지휘를 맡고 있는 무관직, 별장 밑으로 산원이나 위, 대정이 있고, 별장 위로는 낭장과 중랑장, 장군, 대장군, 그리고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이 있다.)에 오르시다. 서기 1051년 고려 11대왕 문종(文宗) 6년 삼척(三陟) 임원(臨院) 술에 해적 침입을 격퇴하시었다.

강릉김씨 10세손 김방감(金方鑑) 공 일대기: 고려 문종 시대의 중앙집권적 무공과 동계 방어 체제

I. 헌사의 장: 고려 문종 시대와 김방감 공의 역사적 위치
고려(高麗) 왕조가 건국된 이래, 11세기 중반은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번영했던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제11대 왕 문종(文宗, 1046년~1083년 재위)의 치세는 중앙집권적인 통치 질서가 완비되고 문물 제도가 정비됨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전성기를 구가한 시기였습니다. 법제는 정교해졌으며 , 사회 경제적 풍요는 군사력을 뒷받침하며 국가의 안정을 공고히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강릉김씨(江陵金氏)의 10세손이신 김방감(金方鑑) 공께서는 지방의 최고 행정 실권자인 호장(戶長)으로서 강릉 지역의 안정과 발전에 기여하셨을 뿐 아니라, 중앙 경군(京軍)의 핵심 무관직인 보승별장(保勝別將)을 겸임하시어 국가 방위의 최전선에서 탁월한 무공을 세우셨습니다. 공의 생애는 고려 중기의 중앙-지방 엘리트 통합 모델을 상징하며, 특히 서기 1051년(문종 6년) 삼척(三陟) 임원(臨院) 술(戍) 지역에서 해적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신 공적은 고려 동해안 방어사(防禦史)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본 보고서는 김방감 공의 두드러진 업적과 그 이면에 놓인 문종 시대의 정치, 군사, 경제, 그리고 환경적 맥락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공의 위대한 일대기를 경건한 존경체로 서술하고자 합니다.

II. 문종 치세의 정치적 환경: 중앙집권과 문벌귀족의 시대

II.1. 고려 중앙집권체제의 완성
문종 시대는 고려 통치 질서가 제도적으로 완성된 시기였습니다. 문종께서는 즉위 원년인 1047년부터 시중 최충(崔冲)에게 명하여 율관(律官)을 모아 율례(律例)를 자세히 교정하게 하셨으며 , 사법 제도에서는 사형 판결에 삼복제(三覆制)를 실시하고 죄인 심문에 법관 3인 이상의 합의를 거치도록 하는 등 행정 및 사법 절차의 신중성과 제도화를 기하셨습니다.

이러한 제도적 정비는 지방 통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국초에 세력이 막강했던 사심관(事審官)에 대한 통제가 점차 강화되었고, 기인(其人) 선상법이 충실히 시행되는 등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실질적인 영향력이 확대되었습니다. 현종 9년(1018년)에 이미 4도호 8목을 중심으로 군현에 중앙관이 파견되는 지방제도의 기본 구조가 마련되었고, 문종 대에는 외직(外職)과 외관녹봉(外官祿俸)이 제정되어 지방관제가 제도적으로 완비되었습니다. 이는 중앙의 통치력이 군현급 행정단위까지 직접적으로 침투되었음을 의미합니다.

II.2. 문벌귀족 사회의 성장과 향리 가문의 중앙 진출
문종 시대는 과거제와 체제 정비를 통해 성장한 문벌귀족이 확고한 지배층으로 자리매김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 문벌귀족은 태후 가문(경주 김씨, 안산 김씨 등)과 재상 가문(해주 최씨 최충 가문, 경원 이씨 인예태후 가문 등)을 중심으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김방감 공의 가문과 같은 지방의 유력 가문들은 이러한 중앙집권화 과정 속에서 새로운 신분적 지위를 획득하셨습니다. 고려의 신분 제도는 문벌 및 중소 지배층, 평민 및 종속 구역민, 그리고 천민으로 구분되었는데 , 호장(戶長)은 중앙 관료와는 구별되는 중소 지배층, 즉 향리(鄕吏)의 최고위직이었습니다. 현종 대 이후 중앙정부가 지방의 촌락 단위까지 향리 조직(호장, 부호장, 병정 등)의 인원수를 규정하며 통제하는 정책을 단행했음에도 불구하고 , 호장은 여전히 지역 사회의 최고 실력자로서 군사, 재판, 세금 징수 등 행정 일선을 총괄하며 특권과 이권을 누렸습니다.

김방감 공께서 호장직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중앙의 무관직(보승별장)을 겸임하신 것은, 지방 토착 세력이 중앙의 관료 체제 및 군사 조직에 체계적으로 편입되는 ‘관료화된 향리‘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였습니다. 이는 강릉김씨 가문이 중앙의 통치 질서 속에 깊숙이 참여함으로써 지방 지배력을 유지하는 동시에 국가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했음을 보여줍니다.

 

III. 김방감 공의 이중 관직 분석: 호장(戶長)과 지방 지배 체계

III.1. 강릉 호장으로서의 권위와 실권
김방감 공께서 강릉 지역의 호장직을 맡으셨다는 사실은 공께서 지역 사회 내에서 발휘하신 막대한 권위를 시사합니다. 호장은 중앙 정부가 파견한 지방관 아래에서 실질적인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향리의 수장으로서, 그 지역사회의 최고 실력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구체적으로 호장은 재판을 주관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지방군의 관리 등 지역 사회의 주요 임무를 총괄하였습니다. 이러한 호장의 실권은 대대로 내려오는 그 집안의 사회적 신분인 문벌(門閥)과 강력한 씨족(氏族) 세력에 의해 뒷받침되었습니다. 문종 대에 이르러 향리에 대한 중앙의 통제와 규정이 강화되었으나, 호장직은 여전히 중앙 관료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발판이자, 지역 내에서는 가장 안정적이고 세습 가능한 권력이었습니다. 김방감 공께서는 강릉 지역의 호장으로서 지역의 물적, 인적 자원을 동원하고 관리할 수 있는 행정적 기반을 확립하셨습니다.

III.2. 중앙 무관직 겸임의 전략적 중요성
김방감 공의 특별한 점은 지방 행정의 수장인 호장직과 중앙군(京軍)의 무관직인 보승별장직을 동시에 수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이력서 이상의, 문종 시대 고려 정부의 정교한 중앙 통치 메커니즘을 반영합니다.

중앙 정부는 지방의 강력한 실권자인 호장에게 중앙 군사 시스템의 관직을 부여함으로써, 호장의 지역적 권위와 영향력을 중앙의 군사 명령 체계 하에 두었습니다. 이 제도는 다음의 두 가지 목적을 충족시켰습니다. 첫째, 호장 가문의 중앙 관료화 욕구를 충족시키고 , 둘째, 중앙군이 지방 방어 작전을 수행할 때, 해당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린 호장의 인적 물적 동원 능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김방감 공께서는 이러한 제도적 통합의 최전선에 서 계셨으며, 강릉 지역의 수호자로서의 역할과 국가 경군 장교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키셨습니다. 이는 중앙집권의 내실을 다지며 지방 세력을 국가 경영의 일원으로 끌어들였던 문종 시대 통치술의 성공적인 구현으로 해석됩니다.

 

IV. 보승별장(保勝別將): 중앙 군제와 동부 방어 임무의 핵심

IV.1. 고려 중앙군 2군 6위 체제와 흥위위의 위상
김방감 공이 재임하신 보승별장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려 중앙 정규군인 2군(응양군, 용호군) 6위(六衛) 체제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6위는 좌우위(左右衛), 신호위(神虎衛), 흥위위(興威衛), 금오위(金吾衛), 천우위(千牛衛), 감문위(監門衛)로 구성되었으며, 총 45령(領)으로 조직되어 약 45,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흥위위(興威衛)는 좌우위, 신호위와 함께 ‘3위’라 불리는 경군(京軍)의 핵심 주력 부대였습니다. 이 3위는 수도 개경의 수비뿐만 아니라, 변방에 대한 경술(更戌, 교대 수비)의 임무까지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흥위위는 총 12,000명의 병력을 보유하였고, 보승(保勝) 7령(領)과 정용(精勇) 5령으로 세분되어 조직되었으며, 왕의 행차 호위, 사신 영송 및 출정 임무를 맡았습니다.

IV.2. 보승별장의 지위와 전문성
김방감 공께서 재임하신 보승별장(保勝別將)은 흥위위 소속 보승 7령 중 하나에 속하며, 품계는 정7품의 무관직이었습니다. 별장(別將)은 한 군대의 부지휘관으로서, 하급 장교인 산원(散員)이나 위(尉), 대정(隊正) 위에 있었고, 상위 지휘관으로는 낭장(郎將, 정6품), 중랑장(中郎將, 정5품), 장군(將軍, 정4품), 대장군(大將軍, 종3품), 그리고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 정3품)이 있었습니다.

정7품 별장직을 수행하셨다는 것은 공께서 단순한 지방 호족이 아니라, 중앙 경군 내에서 병력을 지휘하고 전투를 수행하는 전문적인 능력을 인정받은 실무 지휘관이었음을 의미합니다. 보승(保勝)은 전투에 특화된 전문 병종을 일컫는 이름이었기에 , 김방감 공은 동해안과 같은 최전선에서 중앙군의 전술과 전략을 집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무관이셨습니다. 이러한 군반(軍班) 계층은 군공(軍功)을 통해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중류층이었으며,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고 그 역을 세습하는 특권층이었습니다.

 

V. 동해를 수호하시다: 1051년 삼척 임원 해적 격퇴 전공의 상세 분석

V.1. 11세기 동해안의 위협: 동여진 해적 침입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10세기 말까지 대외적으로 안정기를 유지했으나, 11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여진(東女眞) 해적들이 동해안 지역을 노략질하며 안보 상황이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진족의 해적 침입은 단발성이 아닌 지속적인 위협이었습니다. 이미 덕종 2년(1033년)에 삼척현에 해적이 침입한 기록이 있으며, 정종 1년(1035년)에는 삼척현 동진수(桐津戍)에서 40여 명을 격퇴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문종 즉위 이후인 1049년에도 6월과 7월, 그리고 10월에 동여진 해적이 동해안을 침략하자 고려군이 이를 격퇴하였습니다.

이러한 동여진 해적 활동은 고려의 동해안 백성들의 삶을 불안과 피폐로 몰아넣었으며, 이는 고려 조정이 대규모 방어책을 수립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V.2. 고려의 동계 해상 방어 체제 구축
고려 정부는 동여진의 위협에 대응하여 동계 지역(東界地域)에 대한 방어망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하였습니다. 이는 크게 축성을 통한 방어망 구축과 대규모 수군기지 설치로 이루어졌습니다.

특히 동계 지역에는 원산 지방의 진명도부서(鎭溟都部署)와 정평 지방의 원흥도부서(元興都部署)와 같은 대규모 수군 기지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도부서들은 관할 해역을 안정적으로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단독 작전 및 합동 작전, 심지어 원정 작전에까지 참전하는 국가 해양 방위의 핵심이었습니다. 각 도부서는 2~3천 명 수준의 수군 병력과 최소 수십 척에서 100여 척에 달하는 대형 전함(과선)을 운용하며 해상전을 통한 제해권(制海權) 장악을 중시하였습니다.

Table 1: 11세기 전반 고려 동해안 여진족 침입 주요 연혁 및 김방감 공의 전공

연도 (고려 국왕) 침입 지역 주요 내용 및 고려의 대응
1033년 (덕종 2년) 삼척현 동여진 해적 침입 발생.
1035년 (정종 1년) 삼척현 동진수(桐津戍) 민가 약탈. 고려군 매복 후 성공적으로 40여 명 격퇴.
1049년 6월/7월 (문종 3년) 동해안 지역 동여진 해적 노략질. 고려군 격퇴.
1049년 10월 (문종 3년) 동해안 지역 동여진 해적 재침입.
1051년 (문종 6년) 삼척 임원 술(臨院 戍) 해적 침입. 보승별장 김방감 공께서 성공적으로 격퇴.
11세기 전반 동계 해안 전역 대규모 축성 및 수군기지(도부서) 설치를 통한 국가 방어 체제 강화.

 

V.3. 문종 6년(1051년) 임원 격퇴 전투의 전략적 의미
서기 1051년, 문종 6년, 동여진 해적이 삼척 임원(臨院)의 방어 기지인 술(戍)에 침입했을 때, 보승별장 김방감 공께서는 이를 격퇴하는 빛나는 무공을 세우셨습니다. 임원 술은 동해안의 최전선에 위치하여 해적의 침투에 가장 취약한 국지 방어 거점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이 전투의 성공은 고려의 통합 방어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했음을 입증합니다. 대규모 수군인 도부서 함대가 전면적인 해상 제해권을 담당했더라면 , 삼척 임원과 같은 국지적이고 신속한 대응이 필요한 거점 방어는 김방감 공과 같이 중앙 무관 경험과 지방 호장의 동원력을 겸비한 인물들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의 지휘 아래 지방군 혹은 경군 소속의 병력이 신속하게 작전을 수행하여 해적의 노략질을 좌절시킨 것입니다.

1051년의 승전은 단순한 국지전 승리를 넘어선 전략적 중요성을 가집니다. 고려는 이러한 지속적인 해상 대결에서 우세권을 장악하였고 , 결국 동해상에서 제해권과 침탈 목표를 상실한 동여진 해적들은 활동을 현격히 위축시키고 침탈 목표를 우산국이나 일본으로 전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고려는 동계 지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으며, 김방감 공의 무공은 국가 안보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신 위대한 업적이었습니다.

VI. 당대의 사회, 경제, 문화적 기반: 부서지치(富庶之治)의 배경

VI.1. 농업 기술 발전과 경제적 풍요
김방감 공이 활동했던 문종 시대는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 서두에서 창고의 미곡이 남아돌아 ‘부서지치(富庶之治)’를 이루었다고 기록될 만큼 경제적으로 풍요로웠습니다. 이러한 번영은 국가가 안정적으로 군량미와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성공의 기반은 농업 기술의 꾸준한 발전과 수리 시설의 지속적인 수축에 있었습니다. 삼한 이래의 김제 벽골지(碧骨池)를 비롯하여 상주 공검지(恭檢池), 밀양 수산제(守山堤) 등이 개수되어 농업 증산을 실현하였고 , 문종께서는 지방관의 권농(勸農)을 독려하며 재해 대책을 세밀하게 마련하셨습니다. 안정된 농업 생산력은 중앙 정부가 동여진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대규모 군사력(도부서, 경군)을 유지하고 운용할 수 있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VI.2. 귀족 및 사원 중심의 경제 지배
문종 시대의 경제 구조는 사원과 문벌 귀족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사원들은 국가와 귀족들로부터 토지를 기증받거나 개간을 통해 막대한 토지(寺田)를 영유하였습니다.

나아가 사원과 귀족들은 장생고(長生庫)를 설치하고 돈과 곡식으로 식리(殖利, 이자놀이) 사업을 전개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거두었으며 , 상업, 목축, 제염(소금 제조), 제유(기름 제조), 양조업 등 다양한 산업 분야를 경영하며 경제계를 지배하였습니다. 이러한 물질적 기반은 문벌 귀족들이 무관이나 문관으로서 중앙 정치에 참여하고, 김방감 공과 같은 지방 유력자들이 중앙 무관직을 겸임하며 권위를 높일 수 있는 물질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VI.3. 강릉 지역의 향토 문화와 누정 문화
김방감 공의 근거지인 강릉은 고려 시대에도 동쪽의 중요 치소(治所)였습니다. 강릉읍성 내에는 치민(治民)을 위한 관아 유적이 존재하였으며, 호장으로서 공께서 직무를 수행하셨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강릉 지역은 특히 누정(樓亭)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경포 호수 주변에는 많은 정자들이 산재하여 선비들이 모여 시문을 읊조리는 장소로 활용되었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경포팔경(鏡浦八景)이었습니다. 이는 김방감 공과 같은 관료화된 향리 가문들이 무관으로서의 강인함뿐 아니라, 학문과 교양을 중시하는 문벌 귀족으로서의 문화적 정체성 또한 함께 구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문화적 풍요는 군사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이 결합된 문종 시대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VII.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의 환경적 맥락

VII.1. 11세기 한반도의 기후 환경
김방감 공이 활동했던 11세기 중반은 역사적으로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 대략 서기 964년경부터 1475년경까지)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의 온난하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기후 환경은 문종 시대의 경제적 번영을 간접적으로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온난한 기후는 곡물 재배에 유리하여 농업 생산량을 높이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곧 문종 시대의 기록적인 풍요(“富庶之治”)와 강력한 중앙 정부가 필요로 하는 군량 및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물질적 기반을 제공하였습니다. 기후의 안정성은 정치적·군사적 안정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환경적 맥락을 형성했습니다.

VII.2. 동계 지역의 식생과 군사적 방어
강원 지역은 동여진의 해상 침입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강원 지역 해안을 따라 많은 소규모 성곽들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방어 시설의 정비는 11세기 전반에 걸쳐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는 동여진의 갑작스럽고 빠른 해상 침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해안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필수적인 군사 조치였습니다.

삼척 임원 술(戍)에서의 격퇴 작전은 이러한 동계 지역의 특수한 군사적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김방감 공께서는 지리적 특성에 맞는 방어 시설과 지역 기반 병력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승리를 거두셨습니다.

 

VIII. 결어: 김방감 공이 남긴 역사적 유산

김방감 공의 생애는 고려 왕조가 국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던 문종 시대의 통치 구조와 군사적 역량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위대한 증거입니다.

공께서는 강릉김씨 10세손으로서 지방 사회의 최고 실권자인 호장직을 수행하시면서, 동시에 중앙 경군의 핵심 부대인 흥위위의 보승별장(정7품)을 겸임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중 관직 체계는 고려 중앙 정부가 지방의 유력 가문을 중앙의 관료 시스템 및 군사 체계에 성공적으로 통합시키는 정치적 지혜의 산물이었으며, 김방감 공께서는 이 통합 시스템의 성공적인 집행자이셨습니다.

특히 1051년 삼척 임원에서의 해적 격퇴 무공은 문종 시대 고려가 동여진의 지속적인 해상 위협에 맞서 제해권을 확보하고 동계 지역의 안정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룬 결정적인 국지전 승리였습니다. 공의 용맹과 지휘력은 단순한 개인의 영광을 넘어, 중앙의 군사적 전문성(별장)과 지방의 동원력(호장)이 결합된 통합 방어 전략의 효용성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김방감 공께서는 문무(文武)를 겸비하고 중앙과 지방의 권위를 성공적으로 통합하신 실무형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주셨습니다. 공께서 남기신 위대한 업적은 강릉김씨 가문의 번영과 발전에 굳건한 초석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나라를 지킨 호국 공로자로서 후대인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