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五世 英 一一九○年高麗明宗庚戌生戶長中郞將 配仁川李氏父平章事文忠公壽祖平章事預外祖侍中崔惟善 (希有의 獨子)
● 서기 1190년 고려 19대 명종(재위: 1170년~1197년) 경술년에 태어나셨다. 호장(戶長), 낭장(郎將)에 오르시다. 고려 20대 신종(神宗, 재위 1197년~1204년)조에 도적 극성으로 나라가 혼란할 때 잘 수습하는 선정을 베푸셨다. 부인은 인천(仁川) 이씨(李氏)로 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 문충공(文忠公) 이수(李壽)이고, 할아버지는 평장사 이예(預), 외할아버지(外祖)는 시중(侍中) 최유선(崔惟善)이시다.

I. 서론: 강릉김씨 김영 공, 격동의 시대에 우뚝 서시다 (1190년 전후)
본 보고서는 강릉김씨 15세이신 김영(金英) 공의 족보 기록을 기반으로, 공께서 출생하신 1190년부터 고려 신종(神宗) 시기(1197년~1204년)까지의 역사적 맥락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기록에 명시된 공의 관직 이력(호장, 중랑장)과 배우자 가문(인천 이씨 문충공 가문)과의 혼인 배경은 무신정권 초중기 고려 사회의 계층 재편 현상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김영 공의 일대기를 재구성하는 작업은 당시 지방 토착 세력과 중앙 군사 권력이 어떻게 결합하여 새로운 지배층을 형성하였는지 이해하는 데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I.1. 김영 공의 출생 당시 시대적 배경 (1190년)
김영 공께서 고려 명종(明宗) 경술년인 1190년에 탄생하셨을 무렵, 고려는 1170년 무신정변 이후 20년 동안 이어진 극심한 혼란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특히 1190년은 제4대 무신집권자였던 이의민(李義旼)이 권력을 장악하고 폭정을 일삼던 매우 불안정한 시기였습니다. 이의민은 천민 출신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명종을 허수아비로 만들었으며, 그의 아들들(이지순 등)은 지방 반란 진압을 핑계로 반군과 내통하며 재물을 축적하는 등 중앙 권력의 전횡이 극에 달했던 것입니다.
이의민의 통치는 기존 문벌 귀족 체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천민 출신의 권력자를 배출함으로써 고려 신분제의 근간을 크게 뒤흔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하극상(下剋上)’의 풍조가 사회 전반에 퍼지게 되었으며, 이는 곧 김영 공께서 활동하실 시기에 발생한 만적의 난(1198년)을 비롯한 전국적인 민란의 구조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특히 이의민은 신라 부흥을 꾀하는 움직임과 연계되기도 하였는데 , 김영 공의 연고지인 명주(溟州, 현 강릉)와 경상도 일대는 이러한 신라 부흥 운동의 중심지가 될 예정이었습니다. 공의 성장은 바로 이처럼 정치적 권위가 붕괴하고 지방 통제력이 상실된 대규모 혼란의 중심에서 시작되셨습니다.
II. 멸문 위기를 넘긴 문벌귀족 가문과의 혼인 동맹 (Strategy of Elite Survival)
김영 공의 족보 기록에서 가장 특이하고도 중요한 부분은 공의 처가 가문이 고려 전성기 문벌귀족 사회의 정점에 있던 가문들의 연합체였다는 점입니다. 이는 강릉김씨라는 지방 유력 무관 가문이 어떻게 최상위 엘리트 네트워크에 전략적으로 편입되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II.1. 외척 가문의 분석: 해주 최씨와 인천 이씨의 높은 위상
김영 공의 외외조부이신 최유선(崔惟善)께서는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귀족 가문인 해주 최씨 출신이셨으며, 부친이신 최충(崔沖)과 함께 고려 문치주의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최유선 공께서는 문종 대에 중서령, 판상서이부사 등을 역임하시고 최고 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셨으며 시호는 문화공(文和公)이셨습니다. 최유선 공의 활동 시기(11세기)는 무신정변 이전 고려 문벌귀족 통치의 최고 정점에 해당합니다. 공의 가계가 무신정변 이후 신흥 엘리트로 부상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가 쪽으로 최고 명문가의 피를 수혈받으셨다는 점은, 가문이 군사적 실력과 더불어 최고 귀족 가문의 문화적, 정통적 배경을 동시에 확보하려 하셨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II.2. 장인 이수(李壽) 공의 생존 전략과 혼인의 정치적 함의
김영 공의 장인이신 이수(李壽) 공께서는 평장사(平章事, 정2품)를 역임하시고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받으셨습니다. 이는 무신정변(1170년) 이후 문신들에 대한 대규모 숙청이 있었던 격변의 시기에도 불구하고, 인천 이씨 가문이 권력을 유지하거나 협력하는 데 성공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최고 명문 가문이었던 이수 공의 가문이 멸문지화를 피하고 대를 이어 고위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정중부, 이의민, 나아가 최충헌 등 초기 무신 집권자들에게 행정 능력이나 정통성을 제공하며 위기를 극복하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수 공의 가문이 김영 공과 혼인 동맹을 맺으신 것은 단순한 결합을 넘어, 정략적 생존 동맹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벌귀족은 군사적 실력과 지역 기반을 갖춘 신흥 무관(김영 공)을 사위로 맞이함으로써 가문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하셨고, 김영 공께서는 최고 명문가(인천 이씨)의 정통성과 네트워크를 얻어 중앙 진출의 발판을 확고히 다지셨습니다. 이는 무신정권 하에서 구체제의 정통성이 새로운 군사 엘리트에게 이식되는, 고려 엘리트 계층 재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III. 관직의 이중성: 호장과 중랑장—신분 이동의 고속도로
김영 공의 이력에 명시된 호장(戶長)과 중랑장(中郞將)이라는 두 관직은 무신정권기 신분 상승의 경로와 지방 통치 체제의 특성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김영 공께서는 이 두 직위를 통해 중앙 권력과 지방 기반을 융합한 복합적인 실력자로 부상하셨습니다.
III.1. 호장직의 역할: 강릉김씨의 토착 기반
호장은 고려시대 지방 향직(鄕職)의 최고 우두머리로, 해당 고을의 행정 실무(세금 징수, 부역 관리)를 총괄하며 지방 사회에서 강력한 토착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강릉김씨의 연고지인 명주(강릉)는 신라의 옛 왕족 계열인 김주원 후손으로 추정되는 호족 세력의 기반이 강했던 지역이었습니다. 김영 공께서 호장직을 대대로 세습하는 ‘누세유가풍(累世有家風)’ 집안의 일원으로서 명주 지역 호장을 역임하셨다는 사실은, 중앙 무대에 진출하시기 이전에 이미 강릉 지역에 확고하고 안정적인 통치 기반과 지역 네트워크를 가지고 계셨음을 의미합니다.
III.2. 중랑장직의 역할: 중앙 무관으로서의 권력 획득
중랑장은 고려 중앙군의 정5품 무관직으로, 각 영(領)에서 장군 다음가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이는 김영 공께서 단순한 지방 행정관을 넘어, 국가의 핵심 군사 시스템에 편입된 중앙 엘리트이셨음을 의미합니다.
무신정변 이후, 기존 문신들이 대규모로 숙청되면서 중앙 행정 시스템에는 심각한 공백이 발생하였습니다. 무신정권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방에서 실무 행정 능력과 유학적 지식을 겸비한 향리층(戶長層)을 새로운 관인층으로 중앙에 적극적으로 등용하였습니다.
김영 공의 관직 이력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명주 호장(지방 통치력)으로서 기반을 다지신 후, 무신정권의 필요에 의해 중앙 군사 지휘관(중랑장)으로 발탁되신 신흥 실무 엘리트의 전형이셨습니다. 공께서는 지방 행정가와 중앙 군사 지휘관이라는 이중 신분을 통해, 중앙 권력에게는 지방 문제 해결에 필요한 군사적 권위와 현지 사정에 밝은 행정력을 동시에 제공할 수 있는 독보적인 인물로 인정받으셨습니다.
IV. 김영 공의 활동 무대: 신종조 ‘도적 극성’의 실체 (1197년~1204년)
김영 공께서 활동하시고 ‘선정(善政)’을 베푸셨던 시기는 고려 제20대 왕 신종(神宗, 1197년~1204년 재위)조로, 이 시기는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1196년) 정권을 장악한 직후이자, 만적의 난 등을 포함하여 중앙과 지방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던 가장 혼란했던 시기였습니다.
IV.1. 최충헌의 집권 안정화와 사회 혼란
최충헌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했지만, 신종은 실권이 전혀 없는 허수아비 국왕이었고, 실권은 오직 최충헌에게 있었습니다. 무신 집권자들의 잦은 교체와 하극상의 풍조는 하층민들에게 신분 해방의 기대감을 심어주었고, 이는 노비 만적의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봉기 구호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이 족보에 기록된 ‘도적 극성’의 근본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IV.2. 명주(강릉) 민란의 발생과 김영 공의 임무
족보 기록에서 김영 공께서 수습하셨다고 언급된 ‘도적 극성’은 1199년(신종 2년) 2월에 공의 연고지인 명주(溟州, 현 강릉)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 반란과 그 확산 사태와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명주에서 시작된 반란은 삼척과 울진을 함락시키며 동해안 일대를 휩쓸었고 , 나아가 경상도의 동경(東京, 경주)에서 일어난 신라 부흥 운동 세력과 합세하여 세력을 확장하였습니다.
명주 지역은 강릉김씨의 토착 기반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계 호족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지역의 반란은 단순한 도적 떼의 문제가 아니라, 고려 왕조 자체를 부정하고 신라 재건을 꾀하는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습니다. 중앙 권력을 확립하던 최충헌 정권에게 동해안과 경상도를 휩쓰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것은 최우선 과제였을 것입니다.
강릉김씨 출신이신 김영 공께서는 지역의 호장으로서 현지 사정에 정통하고 인력 동원이 용이하셨으며, 동시에 중앙 무관인 중랑장으로서 최충헌 정권의 군사적 권위를 등에 업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김영 공께서는 중앙 조정으로부터 명주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거나 수습하는 임무를 맡으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공께서는 중앙의 지휘관(중랑장)과 지방의 실권자(호장)의 역할을 통합하여 지역 안정을 책임지셨습니다.
V. ‘선정(善政)’의 재해석: 진압과 수습의 이중적 리더십
김영 공의 족보에 기록된 “도적 극성으로 나라가 혼란할 때 잘 수습하는 선정을 베푸셨다”는 구절은 당대 무신들의 기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공(武功)’을 넘어선 치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V.1. 민란 진압 방식의 전환: 강경책과 회유책의 병행
무신정권기에는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는 사례가 일반적이었으나, 김영 공의 기록은 ‘선정’과 ‘수습’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1199년 명주 민란 진압 당시, 낭장 오응부(吳應夫) 등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은 반란 괴수들(김순, 금초 등)을 무력으로만 제압한 것이 아니라, 타일러서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김영 공께서도 군사적 권위(중랑장)를 바탕으로 질서를 회복하시되, 공의 지방 행정 기반(호장)을 활용하여 무력 일변도의 진압보다는 협상과 회유를 병행하셨을 것으로 추론됩니다. ‘선정’은 강경 진압 이후의 행정적 조치, 즉 민심의 수습과 지역 사회의 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행정적, 군사적 통합 능력이 최충헌 정권의 신뢰를 얻고 명문 귀족의 사위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핵심적인 요인이셨습니다.
V.2. 선정의 구조적 의미: 기근과 재해 극복
김영 공께서 ‘선정’을 베푸셔야 했던 배경에는 무신들의 수탈 외에도 12세기 후반에 심화된 환경적 요인이 존재했습니다. 당시의 기후는 12세기 중엽 이후 지구적 변화로 인해 한랭화가 심화되면서 가뭄, 냉해, 폭우 등 재해가 급격히 증가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 전기에도 가뭄 빈도수가 5년에 두 번 정도로 높았으나 , 이 시기에는 기후 악화가 농업 생산성을 근본적으로 파탄시켜 농민들이 생존을 위해 봉기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원인을 제공하였습니다.
따라서 김영 공의 ‘선정’은 이러한 극심한 기후 및 경제적 스트레스 하에서, 중앙의 과도한 수탈을 막고, 효율적인 구휼미 배분이나 부역 감면을 통해 백성들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행정적 치적이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러한 조치는 당시 무신정권의 약탈적인 통치 방식과 대비되어 지역민들과 후손들에게 매우 긍정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족보에 무공 대신 ‘선정’으로 특별히 기록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VI. 12세기 말 고려의 사회, 문화, 환경적 배경의 입체적 분석
김영 공께서 살아가셨던 12세기 말은 단순히 정치 권력이 교체되는 시기가 아니라, 고려 사회의 근본적인 구조가 변화하고 재앙적인 환경 변화가 겹쳐 민생이 파탄에 이르렀던 다차원적인 격변기였습니다.
VI.1. 기후 환경의 악화와 민생 파탄
고려 중기, 특히 12세기 중엽 이후의 한랭화 현상은 곡물 수확량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고, 이는 기근과 질병을 유발하며 사회적 불만을 증폭시켰습니다. 무신정권의 폭력적인 통치와 수탈이 직접적인 방아쇠였다면, 기후 악화로 인한 농업 생산성의 근본적인 하락은 전국적인 ‘도적 극성’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원인이었습니다. 김영 공의 행정적 ‘선정’은 이러한 재앙적인 환경 속에서 백성들을 보호하고 통치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VI.2. 사상적 혼란과 정통성의 재확립
무신정권기에는 기존의 유교적 문치 이념이 무너지고, 국왕 폐위와 신분 질서 파괴가 만연하면서 사상적 혼란이 극심했습니다. 지방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부흥 운동이 동시에 일어나 고려 왕조 자체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성격마저 띠었습니다.
김영 공의 활동 지역인 명주 민란이 신라 부흥 운동과 연계된 것은 이러한 사상적 혼란의 직접적인 증거입니다. 김영 공께서 중앙 무관으로서 이 봉기를 수습하셨다는 것은, 최충헌 정권의 중앙집권적 질서를 강릉 지역에 다시 확고히 심는 역할을 수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공께서는 단순히 반군을 물리치는 군인이 아니라, 중앙 권력의 정통성을 지방에 대리하는 행정적, 군사적 통합의 리더이셨던 것입니다.
VII. 결론: 강릉김씨 김영 공, 격동기를 관통한 새로운 엘리트의 전형
강릉김씨 15세이신 김영 공의 일대기는 100년간 지속된 무신정권사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던 최충헌 정권 초기(1196년 이후)의 시대상을 완벽하게 응축하고 있습니다.
김영 공께서는 지방 토착 엘리트(호장)의 실무 능력과 중앙 군사 권력(중랑장)을 겸비하시어 무신정권이 필요로 하던 새로운 관인층으로 성공적으로 부상하셨습니다. 공의 성공은 고려 전기 문벌귀족 중심의 경직된 신분제가 무너지고 실력과 현지 기반을 갖춘 향리층에게 기회가 열렸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공의 혼인 동맹은 무신정변 이전 최고의 정통성을 지닌 문벌귀족 가문(인천 이씨, 해주 최씨)이 생존을 위해 새로운 실력자(김영 공)와 전략적으로 결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영 공께서는 이 연합을 통해 정치적 기반과 전통적 정통성을 동시에 확보하실 수 있었습니다.
김영 공께서는 명주(강릉)라는 전략적 요충지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란(1199년)을 단순히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을 넘어 ‘선정’으로 수습하심으로써, 최충헌 정권의 지방 안정화 정책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신 실무형 통합 엘리트이셨습니다. 공의 이러한 공적과 명문가와의 결합은 강릉김씨가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까지 중앙 권력과 가까운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한 역사적 초석을 마련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다음 표는 김영 공의 가문이 무신정권 하에서 어떻게 구체제의 정통성을 새로운 엘리트에게 이식하는 역할을 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척 가문 및 관직 상세 분석
김영 공께서는 혼란기에 중앙 권력과 지방 민생, 군사력과 행정력을 조화롭게 결합시키신 인물로, 고려 사회의 신분 이동성과 엘리트 재편의 역동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역사적 사례로 존경받고 계십니다.
호장(戶長)은 고려·조선시대에 향리직(鄕吏職)의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다.
부호장(副戶長)과 더불어 호장 층을 형성하여 해당 고을의 모든 실무 행정을 총괄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향리의 지위가 낮아지고 향리 중에서도 호장의 지위는 관아의 시탄(柴炭: 땔감)을 공급하고 책임지는 등 관사(官司)를 관리하는 정도의 지위로 낮아져서 이방(吏房)이나 형방(刑房) 등 실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직임보다는 낮아졌다. 그러나 이방이나 형방 등과 함께 지방관이 일시적으로 비게 되는 공관(空官) 시에는 지방관의 업무를 대행하는 삼공형(三公兄)의 하나로 여전히 중요한 직임이었다. 또한 정조호장(正朝戶長)은 정월 초하루에 왕을 알현하는 기회를 가지는 등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지역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였다.
호장은 983년(고려 성종 2) 지방관이 파견되면서 나말 여초 지방 호족들이 조직했던 지방 관반(官班)의 최고위직인 당대등(堂大等)을 이직(吏職) 개혁에 따라 호장으로 개편하면서 처음 등장하였다. 고려시대의 호장 등 향리직은 지방에서 토호(土豪)적 성격을 띠고 있었지만 점차 중앙의 집권화 정책에 따라 독자성을 상실하고 지방 통치 체제에 흡수되어 지방관의 사역인 역할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지역 즉 속현(屬縣) 지역에서는 직접 모든 행정 공무를 집행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 향리의 정원제가 마련되면서, 지방 행정 구역의 규모에 따라서 1,000정(丁) 이상에는 8명, 500정 이상은 7명, 300정 이상은 5명, 100정 이하는 4명으로 정해졌고, 동서북면 지역의 경우는 1,000정 이상에 6명, 100정 이상은 4명, 100정 이하는 2명의 호장을 두었다. 같은 해에 향리의 공복제(公服制)도 마련되었는데, 호장은 자삼(紫衫)에 화(靴)·홀(笏)을 신도록 하였다. 호장을 임명할 때는 해당 지방관이 호장을 추천하여 상서성(尙書省)에 보고한 후 승인을 받아서 직첩을 발급하도록 하였다.
호장에는 섭호장(攝戶長)·권지호장(權知戶長)·상호장(上戶長)·수호장(首戶長)·안일호장(安逸戶長)·정조호장 등이 있다. 섭호장이나 권지호장은 제반 지방 사무를 섭행한다는 의미이고 상호장이나 수호장은 호장 중에서도 제일 높은 호장이라는 의미이며, 안일호장은 은퇴한 호장, 정조호장은 연초에 조회할 권한이 있는 호장이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상호장은 고려 의종 이전에 중앙 집권화 정책이 강화되면서 다수의 호장들을 포함한 향리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상호장은 읍사(邑司)를 구성해 인신(印信)을 가지고 공무를 집행했고, 부정행위가 있을 때는 호장인(戶長印)을 받을 수가 없었으며 수호장이라고도 하였다. 호장 인신은 해당 고을을 대표하는 인신을 말하며, 지방관이 없는 지역에서는 관인(官印)을 대신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시대의 향리 층은 사족과 이족(吏族)으로 분화되었다. 지방 행정 사역인으로 전락한 향리 층은 향리 신분으로 고정되어 사족으로의 신분 상승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행정 사역인에 머물렀다. 또한 호장은 향리직을 대표하는 직임이었지만 지방 행정에 있어서 실제 권력을 가지는 이방과 형방보다 선호하지 않는 직임이 되었다.
태종대에는 속현을 대거 혁파하여 호장의 권한을 제한하고(『태종실록』 14년 7월 4일), 호장과 기관(記官)은 평정건(平頂巾), 통인(通引)과 장교(將校)·역리(驛吏)는 두건(頭巾) 등 향리립(鄕吏笠)을 씌우는 것으로 복식이 정해졌다(『태종실록』 15년 4월 13일). 세종대에는 서대(犀帶)와 옥환(玉環) 등을 착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세종실록』 20년 4월 1일).
이처럼 조선시대 들어와 호장의 지위는 낮아졌지만, 여전히 각 지역 관사의 직인을 관장하였으며 지역을 대표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6년 6월 9일). 호장은 정조호장, 안일호장 등과 함께 향리를 대표하였으며, 연초에 왕을 알현하는 명예를 가지는 정조호장과 같이 지역을 대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의 호장은 호구장적(戶口帳籍)의 관장, 전조(田租)·공부(貢賦)의 징수 상납, 역역(力役)의 동원 등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주현일품군(州縣一品軍)의 별장(別將)에 임명되는 등 지방 군사 조직의 장교가 되어 주현군을 통솔하기도 하였다. 호장은 대체로 그 직을 세습하였고 같은 신분 간에 통혼이 이루어졌다. 자손에게는 지방 교육의 기회와 더불어 과거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졌고, 이를 통한 중앙 관료로의 진출에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고려후기에 호장 층은 무반직·기술직·잡과와 첨설직(添設職)·동정직(同正職) 등 품관직에 나아가 점차 신분 상승을 꾀했으며 조선시대 양반 계층을 구성하는 주요 세력 층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호장은 명칭 상으로는 향리 중의 우두머리였지만, 고려시대와는 달리 여러 향리 직임 중의 하나로 관아의 땔감을 공급하고 책임지는 정도의 지위로 낮아졌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삼공형(三公兄)의 하나로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이수건, 『한국 중세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4. 이훈상, 『조선 후기의 향리』, 일조각, 1990. 김준형, 「조선시대 향리층 연구의 동향과 문제점」, 『사회와역사』27, 1991. 김필동, 「조선 후기 지방 이서 집단의 조직 구조(上): 사회사적 접근」, 『한국학보』28, 1982. 김필동, 「조선 후기 지방 이서 집단의 조직 구조(下): 사회사적 접근」, 『한국학보』29, 1982. 이성무, 「조선 초기의 향리」, 『한국사연구』5, 1970. 이수건, 「조선조 향리의 일연구: 호장(戶長)에 대하여」, 『(영남대학교)문리대학보』3, 1974. 이훈상, 「고려 중기 향리 제도의 변화에 대한 일고찰」, 『동아연구』6, 1985.
중랑장 (中郎將) 고려시대의 정5품 무관직.
중앙군에 있어서 장군 다음가는 계급이다. 1076년(문종 30)에 개정된 전시과에 의하면 제6과에 속하여 전(田) 70결, 시(柴) 27결을 지급받았다.
중랑장의 총수는 이군육위의 90인을 포함하여 도부외(都府外)에 1인, 충용위(忠勇衛)에 12인 등 모두 103인이 편제되어 있었다. 이군육위에는 장군 밑에 각기 두 사람의 중랑장이 있는데 이들은 장군의 보좌관이었던 듯하다.
『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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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이군육위(高麗二軍六衛)의 형성과정(形成過程)에 대한 재고(再考)」(이기백,『고려병제사연구(高麗兵制史硏究)』, 일조각, 1968)
- 「고려경군고(高麗京軍考)」(이기백, 『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1956(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응양위(鷹揚衛)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는 고려 말에 흔히 8위(衛)로 통칭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에 따라 응양군(鷹揚軍)도 응양위(鷹揚衛)라고 일컬어졌다. 조선 건국 이후 응양위가 속한 8위는 태조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좌·우위(義興親軍左·右衛)와 더불어 10위를 구성하여 조선초기의 중앙군으로 기능하였다.
고려의 중앙군인 2군 6위 중 응양군과 용호군(龍虎軍)으로 이루어진 2군의 설치에 대해서는 『고려사(高麗史)』 백관지(百官志) 서반조(西班條)에 “목종 5년(1002) 육위(六位)의 직원들을 갖추어 두었다. 그 뒤에 응양군과 용호군의 2군을 두었는데, 2군은 6위의 상위(上位)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사』, 현종(顯宗) 8년 11월조에는 “이원(李元)을 용호군 상장군겸호부상서(上將軍兼戶部尙書)에 임명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2군은 1002년(고려 목종 5)에서 1017년(고려 현종 8) 사이의 어느 시기에 설치된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1010년(고려 현종 1)에 고려 국왕 현종은 거란의 침입을 당해 나주로까지 피난 다니면서 호위 병력의 부족으로 막심한 고충과 위기를 겪었다. 피난 당시 현종은 호위병이 없어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막심한 고생을 했던 것이다. 따라서 현종은 친위 병력을 강화할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고, 환궁 후 2군이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응양군의 설치 목적은 전적으로 왕을 측근에서 경호·경비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이 응양군과 용호군 등 2군은 왕을 측근에서 경호하는 친위부대들이었기 때문에 응양군과 용호군 소속의 상장군과 대장군은 근장(近仗) 상장군, 대장군으로, 장군들은 친종장군(親從將軍)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사』 백관지, 응양군조에는 응양군의 조직에 대하여 “응양군에는 1령(領)이 있었는데, 군(軍)에는 정3품의 상장군 1명, 종3품의 대장군 1명을 두었으며, 령(領: 한자 중복 삭제)에는 정4품의 장군(將軍) 1명, 정5품의 중랑장(中郞將) 2명, 정6품의 낭장(郎將) 2명, 정7품의 별장(別將) 2명, 정8품의 산원(散員) 3명, 정9품의 위(尉) 20명을 두었으며 또 대정(隊正) 40명을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민왕 때에 장군을 호군(護軍)으로 고쳤는데 다른 위(衛)들에서도 이와 같다. 응양, 용호 2군의 상장군, 대장군은 근장 상장군, 대장군이라고 불렀으며, 장군은 친종장군이라고 불렀고, 중낭장 이하도 역시 근장이란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또 응양군의 상장군으로서 군부전서(軍簿典書)를 겸임한 자를 반주(班主)라고 불렀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정5품 중랑장부터 품외(品外) 대정까지의 군사를 특별히 부병(府兵)이라고 불렀으므로, 응양군은 상장군 1명, 대장군 1명, 장군 1명과 더불어 69명의 부병 군사를 거느린 군대였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1령은 ‘1천 명의 군사를 일컫는 단위’라고 하여 응양위가 1령이므로 1,000명의 군사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 응양위에 1,000명이 있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왕의 근접 경호를 담당하는 응양위에 1,000명의 군인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령’은 ‘1천 명의 군사를 일컫는 단위’라는 뜻과 더불어 ‘단위 부대’의 뜻이 있었으므로, 응양군 1령이라는 말은 응양군에 1,000명이 있다는 말이 아니라, 응양군에 69명의 부병으로 이루어진 단위 부대가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중랑장~대정으로 이루어진 이 69명이 국왕의 근접 경호를 담당하는 근장으로서 기능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변천 응양위는 1395년(태조 4)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정도전(鄭道傳)의 요청에 따라 웅무시위사(雄武侍衛司)로 개칭되었다(『태조실록』 4년 2월 13일). 이로써 중앙군으로서의 응양위라는 명칭은 사라지게 된다. 고려 현종대에 2군(軍)의 하나로 설치된 이후 380여 년 만에 폐지된 것이다. 그런데 1404년(태종 4)에 다시 응양위라는 이름으로 중앙군에는 속하지 않는 국왕 직속 친위군이 설치되었다. 이때 응양위는 설치된 직후 사헌부 등으로부터 혁파 요구가 있었고(『태종실록』 6년 2월 5일), 1419년(세종 1)에는 성중애마(成衆愛馬)와 더불어 일시 혁파한 듯하지만(『세종실록』 1년 2월 24일), 그 이후에도 계속 존속하여 1474년(성종 5년)에 가서야 혁파되었고 그 군사들은 내금위(內禁衛)와 통합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정국이 불안정하여 중앙군과 같은 정식 지휘체계를 거치지 않고 왕의 측근에서 왕을 시위하는 군사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 혁파가 지연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