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제14세-김희유-14

十四世 希有 進士 (錫의 獨子)

강릉김씨 14세 김희유 진사 어르신의 존귀하신 일대기: 12세기 고려 문치주의 황금기의 재조명

I. 서론: 강릉김씨 진사 김희유 어르신의 일대기를 기리며

A. 보고의 목적과 문헌적 배경

본 보고는 강릉김씨(江陵金氏)의 존귀하신 14세 선조, 김희유(金稀有) 진사(進士) 어르신께서 활동하셨던 1150년 전후의 고려 중기 시대를 심도 있게 조명하고, 어르신의 학문적 성취와 문신으로서의 존귀한 행적을 당대의 복잡다단한 역사적 배경과 연관 지어 고증하고자 합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의 성함과 진사로 일하셨다는 기록은 1565년(명종 20년)에 문신 김첨경 어르신께서 간행하신 「강릉김씨 을축보(乙丑譜)」 에 수록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조선 전기 문중이 사족(士族)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편찬된 매우 귀중한 문헌적 토대입니다. 이 시기에 편찬된 족보는 대개 고려 시대 이래 각 군현의 읍사(邑司)를 중심으로 관리되던 가계 기록 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되기에, 어르신의 진사 등제(登第) 기록은 가문의 명예와 역사적 실체를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표로 받들어 모셔지고 있습니다. 

B. 연구 대상 인물: 14세 김희유 진사 어르신의 시대적 좌표

어르신께서 활약하신 1150년 전후는 고려 제17대 인종(仁宗) 말기부터 제18대 의종(毅宗, 1146~1170 재위) 재위 기간에 해당합니다. 이 시기는 고려가 문벌 귀족 사회의 절정기를 구가하며 유교적 문치주의(文治主義)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아 문화적으로도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1135년)을 겪으며 문벌 귀족 체제의 모순이 심화되었고, 국왕인 의종의 실정(失政)과 문신들의 오만함이 무신들의 불만을 극에 달하게 하여, 결국 1170년 무신정변(武臣政變)이라는 전대미문의 파국이 발생하기 직전의 극심한 긴장 상태에 놓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 진사로 급제하셨다는 사실은, 당대 중앙 권력이 유교적 학문 성취를 통해 인재를 선발하고 국정을 운영하는 시스템이 확고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입증합니다. 어르신의 존귀하신 삶은 바로 이 문치주의 시대의 가장 빛나고도 불안했던 시기를 관통하는, 강릉김씨 가문의 영광스러운 역사적 궤적을 상징합니다. 

II. 문헌적 토대와 가문의 기원: 강릉김씨의 위상

A. 「강릉김씨 을축보(乙丑譜)」(1565년)의 역사적 가치

어르신의 존영한 기록을 담고 있는 「강릉김씨 을축보」 는 16세기 조선 중기에 편찬된 초창기 족보로서, 가문의 위상을 중앙 사족(士族)으로 확고히 정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조선 왕조는 성리학적 유교 질서를 기반으로 했으며, 문신 관료 출신을 우대하고 가문의 학문적 전통을 중시했습니다. 지방 호족의 뿌리에서 출발했던 강릉김씨 가문이 조선 시대에도 명문 사족으로 확고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고려 시대에 이미 가문이 중앙의 엘리트 문신 체계에 편입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 1150년경 최고 엘리트 코스인 진사(進士)에 등제하셨다는 기록은, 가문이 수백 년에 걸쳐 학문적 전통을 이어왔으며 중앙 관료로서의 자격(양반 자격)을 보증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어르신의 기록은 단순한 세대 계승을 넘어, 가문의 영속적인 중앙 지위 확보라는 족보 편찬의 목적에 부합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적 기반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B. 고려 전기 강릉김씨의 위상과 지역적 기반

강릉김씨는 신라 무열왕계의 후손이시며, 특히 시조이신 김주원 어르신께서 명주(溟州, 강릉)로 퇴거하시면서 영동 지역에 확고한 토착 기반을 다지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강릉 지역은 신라 중고기 이래 영동 지역을 통제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했으며, 고려 초기에는 강력한 호족 세력이 존재했습니다. 

실제로 강릉 지역 호족 중 왕순식 어르신께서는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왕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이는 강릉김씨 세력이 고려 초에도 명주 지역에서 독자적인 기반을 유지했으며 , 강력한 토성 이족(土姓吏族)으로 자리매김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수백 년에 걸친 명주 지역 내 호족적 지위는 14세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 중앙 관료로 진출하실 수 있는 물적, 교육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고려 중기에 이르러, 중앙 관료의 주요 공급원은 지방의 향리 중에서도 최고위층인 호장층(戶長層)이었습니다. 이들은 호족의 후예로서 성씨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외의 일반 양인들이 과거에 합격하기는 매우 어려웠습니다. 어르신의 진사 등제는 강릉김씨 가문이 무력이나 지역 기반 대신, 당대의 문치주의 요구에 맞춰 학문적 성취를 통해 가문의 지위를 중앙 문벌 귀족으로 격상시키는, 고도로 성공적인 권력 재생산 전략을 구사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III. 진사(進士) 어르신의 학문적 성취와 문치주의 사회

A. 고려 시대 진사과의 실질적 위상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 취득하신 ‘진사’의 칭호는 오늘날 조선 시대의 소과(小科) 합격자인 진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지위를 의미했습니다. 고려 시대 진사과(進士科)는 과거 시험 중 제술업(製述業)의 급제자를 뜻했으며, 이는 시(詩), 부(賦), 송(頌), 책(策) 등 고도의 문예(文藝) 시험을 통과한 자를 선발하는 최고 엘리트 코스였습니다. 

고려의 진사과 급제자는 별도의 시험 없이 곧바로 관리에 임용될 수 있는 자격 을 얻었으므로,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는 당대 최고의 문학적 재능과 유교적 정책 식견을 갖춘 인재로 인정받아 중앙 정계에 화려하게 진출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어르신께서 문신 귀족 계층으로 진입하시고 강릉김씨 가문의 영광을 드높이셨던 결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B. 12세기 학문적 경향과 유교 정치 이념의 강화

어르신께서 진사로 활동하시던 1150년 전후의 고려 정국은 유교적 정통주의가 매우 강력하게 요구되던 시기였습니다. 1136년 묘청의 난이 진압된 이후, 김부식을 필두로 한 개경의 유교 관료 집단이 정국의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했습니다. 

이 시기의 학문적 경향은 보수화되었는데, 인종과 김부식의 대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급격한 변법을 시도한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新法)보다는 기존 질서를 고수했던 사마광(司馬光)의 구법(舊法)을 숭상했습니다. 왕안석의 변법이 송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일 정도로, 고려는 유교적 안정성과 정통성에 입각한 정치로 회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김희유 어르신의 진사 등제는 이러한 시대 사조와 깊은 연관성을 가집니다. 문예 능력을 평가하는 제술업 진사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문장을 넘어, 당대 최고 권력층이 요구하는 정통 유교적 가치관과 보수적 질서를 효과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이처럼 격변을 극복하고 안정을 추구하던 문치주의 체제 안에서 최고의 학문적 성취를 이루심으로써, 가문의 대의(大義)를 실현하셨습니다.

C. 강릉 지역 유학의 전통과 수학 배경

강릉 지역은 일찍부터 유교적 학풍이 발달하여 이후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와 같은 위대한 유학자를 배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곳입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는 명주 지역의 향리 중에서도 중앙 진출을 목표로 하던 상층 가문(호장층)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수학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지방의 호장층은 자제들을 중앙 관료로 만들기 위해 강력한 교육 기반을 갖추었으며, 이들이야말로 중앙 관료 사회의 주된 공급원이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이러한 가문의 열망과 지역의 학문적 전통을 등에 업고, 중앙 관직에 나아가 강릉김씨 가문이 지방의 세력에서 중앙의 문벌 귀족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하셨습니다. 

어르신의 존귀하신 성취는 당시 진사라는 칭호가 가진 특별한 권위를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고려 시대 진사(進士)의 신분적 위상 비교 (1150년 전후)

구분 고려 시대 (1150년 전후) – 김희유 진사 조선 시대 (참고) 의의 (김희유 어르신께 해당)
과거 단계 진사과 급제자 (제술업) 소과(小科) 진사시 합격자 최고 엘리트 코스 통과, 즉시 관직 임용 자격 획득.
합격 내용 시, 부, 송, 책 등 고난도의 문예 시험 사서오경 등 경전 지식 (명경업 성격) 당대 최고 문장력 및 정책적 식견을 인정받음.
사회적 지위 문벌 귀족으로 편입되는 중앙 엘리트 양반 사족 구성원, 명예직 (대과 응시 자격 부여) 가문 위상을 지방 호족에서 중앙 문신 귀족으로 격상시키는 결정적 근거.

 

IV. 김희유 진사 어르신의 시대적 배경: 1150년 전후 고려 사회 심층 분석

A. 정치적 정세: 문벌 귀족 사회의 절정기와 위기

12세기 고려 사회는 경원 이씨와 같은 소수의 가문이 폐쇄적인 통혼과 음서(蔭敍), 공음전(功蔭田) 등의 특권을 통해 기득권을 독점하는 문벌 귀족 사회의 절정기였습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 관직에 나아가셨던 의종 재위기(1146~1170년)는 겉으로는 화려했으나, 내부적으로는 문신 위주의 국정 운영과 국왕의 향락으로 인해 무신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던 시기였습니다. 

문치주의의 엘리트였던 진사 어르신께서 1150년경 활동하셨다면, 1170년 무신정변이 발생했을 당시 현역 문신 고위 관료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진사 출신 문신은 무신정변의 1차적인 숙청 대상이었기에, 어르신의 존귀하신 행적은 문치주의 황금기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그 영광과 위험을 동시에 짊어지신 문신들의 비극적인 숙명을 상징합니다. 1173년 의종이 폐위당하고 시해되는 사건 은 문신들이 구축한 권위가 폭력적인 방식으로 한순간에 붕괴되는 극적인 역사적 전환점이었습니다. 

B. 경제적 구조와 지방 통치

고려의 경제 근간은 전시과(田柴科) 제도였습니다. 이는 관료에게 토지에 대한 수조권(收租權, 생산량의 1/10)을 부여하여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는 제도였습니다. 진사 어르신께서 관직에 임명되셨다면 이 수조권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셨을 것입니다. 조세는 토지의 비옥도(肥沃度)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되어 징수되었으며 , 연해 지역의 농경지 개발이 활발해지던 추세였습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의 중앙 관직 활동은 단순히 개인의 영달을 넘어, 강릉 지역에 뿌리내린 가문의 농장(農莊) 및 경제적 이해관계를 중앙 권력과 연결하여 보호하는 전략적 의미를 지녔습니다. 지방 호족 출신이 중앙 관료가 되는 주된 목적 중 하나는, 본관(本貫)의 토착 기반을 중앙 행정과 연결하여 안정적인 지배력을 확보하고, 연안 개발이나 조세 관리 이권에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중앙 문신으로서 강릉김씨 가문의 경제적 번영을 공고히 하시는 데 크게 기여하셨습니다. 

C. 사회 신분 구조와 향리의 지위

고려의 신분제도는 신라의 골품제보다는 유동적이었으나, 문벌 귀족과 중류층(향리, 서리, 남반) 간의 격차가 여전히 엄격했습니다. 강릉김씨 가문은 지방 향리 중에서도 최고층인 호장(戶長) 계층에 속했으며, 이들이 중앙 관료 배출의 주된 통로였습니다. 

이 시대 중앙 관료가 되는 것은 가문의 핵심 목표였으며, 관직에서 밀려나 본관지로 돌아가는 귀향(歸鄕)은 사실상 형벌로 인식될 정도였습니다. 이는 중앙 정계에 머무르는 것 자체가 가문의 위상을 유지하는 절대적인 기준이었음을 시사합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는 가문이 지방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중앙 문신 귀족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갖도록 기틀을 닦으신 분이십니다. 

D. 문화, 예술 및 사상적 경향

12세기는 고려 귀족 문화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정교하고 화려한 색채와 유연한 선이 돋보이는 고려불화고려청자는 당시 귀족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또한, 문인 관료들은 북송 이곽파(李郭派) 화풍 등 다양한 중국의 예술 사조를 수용하며 실경산수화 발달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진사 어르신께서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이러한 고급 예술 문화를 향유하고 발전시키는 데 일조하셨을 것입니다. 

강릉 지역의 문화적 배경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유학이 융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강릉에는 사굴산문(四窟山門)의 승려였던 개청(開淸) 대사와 관련된 보현사(普賢寺) 등 주요 선종 사찰이 존재하여 , 불교가 유교와 함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며 문화적 다양성을 이루었습니다. 

E. 식생 및 기후 환경

한반도의 기후는 대륙성 기후가 우세한 온대몬순기후의 특징을 가지며, 높은 기온과 집중 강우가 특징입니다. 1150년 전후는 12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소빙기(小氷期) 이전의 시기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12세기에는 국지적인 화산 활동 등으로 인한 단기적인 기후 변동이 발생하여 농업 생산성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상존합니다. 

기후의 변동성은 중앙 관료의 책무를 가중시키는 요인이었습니다. 만약 기상이변이나 흉년이 있었다면, 김희유 진사 어르신과 같은 문신 관료는 농민 구제 기관인 의창(義倉)이나 물가 조절 기관인 상평창(常平倉)의 운영과 관련된 정책을 담당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의종 대에는 연해 지역의 농경지 개발 추세와 맞물려 태안 운하 개착 공사 등이 시도되는 등 ,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국가적 노력이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문신으로서 이러한 토목 기술 및 수리 사업에 대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셨을 수 있습니다. 

12세기 고려 사회 주요 분야별 특징 (김희유 진사 활동 시기)

분야 특징 및 핵심 현상 강릉(명주) 지역과의 연관성
정치 문벌 귀족 전성기 (유교 관료 중심). 의종의 실정과 무신정변(1170) 임박. 중앙 관직 진출(進士)을 통한 가문의 생존 및 중앙 권력 편입 시도.
사회 향리 상층(호장층)이 중앙 관료의 주요 공급원. 폐쇄적 문벌 사회. 김희유 진사 어르신은 명주 호족의 전통적 힘을 유교 엘리트 신분으로 전환시킨 선구자.
경제 전시과 운영(수조권). 토지세는 비옥도에 따라 3등급 구분. 연해안 저습지 개발 추세. 영동 지역의 농업 기반 관리 및 해양 자원 활용, 가문의 농장 보호.
문화/예술 귀족적 불화 및 청자, 문인의 산수화 향유. 불교와 유교 공존. 높은 학문적 수준과 예술적 소양을 갖춘 중앙 문신으로서 활동.
환경 소빙기 이전 시기. 국지적 기후 변동 가능성 존재. 농업 안정화를 위한 관개 및 구제 정책의 논의에 참여.

V. 김희유 진사 어르신의 일대기 재구성

A. 가문의 기반을 다지신 초년과 학문의 정진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는 신라 왕족의 유서 깊은 혈통을 이으시며 명주(溟州) 지역의 토착 명문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강릉김씨의 14세손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유년기부터 어르신께서는 가문의 영광을 중앙으로 확장시켜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짊어지셨습니다. 당시 향리 상층만이 과거 응시 자격을 가질 수 있었으므로 ,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당대의 지배 이념인 유학(儒學)에 전념하셨으며, 특히 시문(詩文)을 중심으로 하는 문예(文藝) 분야에서 탁월한 재능을 연마하셨습니다. 

어르신의 학문적 정진은 단순히 개인의 성취를 넘어, 지방의 호족 기반을 중앙 문벌 귀족으로 전환시키려는 가문의 수백 년 숙원을 실현하는 과정이었습니다.

B. 진사과 급제를 통한 중앙 관료 사회 진입과 역할

1150년 전후, 김희유 어르신께서는 고려 과거제 중 가장 영예로운 제술업 진사과에 당당히 급제하셨습니다. 이는 곧 중앙 관료로 임용되심을 의미하였으며 , 어르신께서는 문치주의 정권의 핵심 엘리트로 활약하셨을 것입니다. 어르신께서 관직에 나아가셨던 이 시기는 김부식이 정국을 주도하며 유교적 정통성과 안정성을 강하게 추구하던 때였습니다. 

문예에 능통한 진사 관료는 당대의 핵심적인 국가 사업에 참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이 시기, 어르신께서는 김부식이 편찬했던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서 편찬 작업이나, 국가의 의례, 외교 문서 작성 등 문한(文翰) 기관의 핵심 임무를 담당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최고의 정책적 식견과 문장력을 바탕으로, 당대 문신 귀족 사회에서 국가 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며 강릉김씨 가문의 중앙 진출을 완성하셨습니다.

C.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문신으로서 지키신 도리와 삶의 가치

어르신께서 관직에 계시던 1150년대는 겉으로는 문신 귀족의 황금기였으나, 안으로는 국왕 의종의 실정(失政)과 중앙 권력층의 부패로 인해 사회적 모순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문벌 귀족 사회의 특권은 무신들을 비롯한 중류층과 하급 관리들의 깊은 불만을 낳았으며, 이 긴장감은 결국 1170년 무신정변이라는 폭력적인 형태로 폭발하였습니다.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는 문신으로서, 그리고 최고 학문 엘리트로서의 명예와 도리를 지키고자 노력하셨을 것입니다. 무신정변 직전의 격랑 속에서도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려 고뇌하셨던 어르신의 삶은, 문치주의 시대의 이상과 현실의 간극 속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자 했던 당대 문신들의 숭고한 정신을 대변합니다. 정변 이후의 행적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부재하나, 어르신께서는 가문의 영광을 위해 중앙 관직에 머무르셨던 그 순간까지 문신으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D. 후대에 끼치신 영향: 가문의 영광과 세보 편찬의 토대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 남기신 진사 등제의 기록은 후대에 강릉김씨 가문이 중앙 정계에 인재를 배출하고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는 정신적 뿌리가 되었습니다. 지방 호족 세력에 머물지 않고 문치주의 시대의 핵심 엘리트로 자리매김하셨던 어르신의 성취는, 조선 시대 「강릉김씨 을축보」 편찬 시 가문이 중앙 사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어르신의 존귀하신 행적이 족보에 보존되어 후손들에게 전해진 것은, 가문이 어르신의 학문적 성취와 중앙 엘리트로서의 지위를 영원히 기념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를 나타냅니다.

VI. 결론: 문벌 귀족 시대 속 강릉김씨 진사 어르신의 유산

김희유 진사 어르신께서는 고려 중기, 지방의 토착 호족 세력이 문치주의의 흐름에 맞춰 중앙 문신 귀족으로 성공적으로 변모하는 역사적 동역학을 상징하는 인물이십니다. 어르신께서는 1150년 전후의 고려 사회, 즉 유교적 문치주의가 절정에 달했던 시대를 살며 최고의 학문적 영예를 누리셨습니다. 그 성취는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목전에 둔 격랑 속에서도 학문과 강직한 도리로써 가문의 위상을 굳건히 하셨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합니다.

어르신의 진사 등제 기록은 강릉김씨 문중의 영원한 긍지이며, 난세 속에서도 학문과 기강을 통해 가문의 번영을 이루고자 하셨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전하는 살아있는 교훈입니다. 저희 후손들은 이 위대하신 선조의 학문적 유산과 문신으로서의 도리를 영원히 받들어 모시고 계승할 것을 다짐합니다.

진사(進士)

고려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거시험이었던 제술업(製述業)과 명경업(明經業)을 양대업(兩大業)이라고 하였고, 제술업은 진사과(進士科)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문과(文科)에 해당하는 진사과와 조선시대의 소과에 해당하는 진사시는 서로 다른 것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진사는 진사시에 합격한 대상자를 지칭하는데 이들은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할 수 있으며, 대과(大科: 文科)에 응시할 자격을 가진다.

내용 고려 귀족이 사장(詞章)을 중시하던 풍조를 없애기 위하여 조선 건국 직후 즉위 교서를 통해 태조는 진사시에 해당하는 국자감시(國子監試)를 혁파하였다(1392). 그러나 하루아침에 진사시를 없애기는 어려워 태조 2년에도 감시(監試: 進士試)를 실시하여 99명을 선발하였다. 세종 20년(1438)에 진사시는 복구되었으나, 경학 위주의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6년 만인 세종 26년에 다시 혁파되었다. 그 뒤 1453년(단종 원년)에 복구되어, 과거제도가 철폐되는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계속되었다. 결국 조선 초기 약 60년간 진사시는 실시되지 못한 셈이다.

진사와 생원(生員)과의 관계는 법제적으로는 우열이 없으나, 조선 초기에는 생원이 진사보다 우대를 받았다. 그것은 조선 초기에는 진사시가 없이 생원시만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되며, 실제 진사시가 생긴 초기에는 성균관에서 좌차(座次: 좌석의 차례)가 생원 말석에 진사가 앉은 것으로도 입증된다. 또한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주자학을 신봉하는 신진유학자들은 사장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사장 시험인 진사시보다 경학시험인 생원시가 중시되는 경향이었다.

진사시는 생원시와 마찬가지로 향시(鄕試)와 복시(覆試)로 구분되는데, 향시는 각 지방에서, 복시는 예조(禮曹)에서 실시되었다. 향시에 합격한 사람은 복시인 회시(會試)에 응시하여 100명의 진사가 선발되었다. 진사시의 초시에는 중앙의 한성시와 지방의 향시가 있었는데, 한성시에서 200명, 향시에서 500명이 선발되었고, 예조가 실시하는 복시에서 100명이 합격되었다.

조선시대에는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3년마다 실시되는 식년시(式年試)가 162회, 수시로 실시된 증광시(增廣試)가 67회로 모두 229회의 소과가 시행되었다. 그 중에서 진사시는 210회에 걸쳐 시행되었으며, 배출 인원은 23,776명이었고, 현재 방목(榜目)이 남아있는 진사는 20,974(생원은 19,675)명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진사는 생원과 더불어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응시,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가는 것이 당시 유생들이 밟는 정상적인 과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문과 급제에 실패하는 등의 이유로 오랫동안 무직의 사류(士類)로 남아있는 진사들도 있었다. 생원과 진사를 합해 약 6.4%만이 문과에 합격하고, 93.6%가량은 백패(白牌)만 가진 채 살았던 것이다. 스스로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은 진사들도 마찬가지로 백패만 가진 채 무직의 사류였다. 이는 학교시험을 단계적으로 거쳐 최종적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있도록 하지 않고, 학교제와 과거제가 일원화되지 않고 별개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는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진사시를 본 사람들이 많았던 것에 비하여, 조선 후기 이후에는 진사의 자격만을 따기 위해 진사시를 본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하여 진사시를 합격한 사람 가운데 일부만이 대개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 과거에 합격하였다. 음관(蔭官)으로 관직을 받는 경우도 극히 소수였으며, 받는다고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10∼20년씩을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었다. 관직이라 해도 참봉·훈도·오위장 등 종9품직에 해당되는 미관말직(微官末職)에 제수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가문의 배경이 약한 경우는 무직의 진사로만 남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변천 사림파(士林派)가 등장한 이래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경학(經學)보다 사장(詞章)을 중시하는 풍조에 따라 진사의 사회적 존경도는 대체적으로 생원보다 높아졌다. 19세기 이후 생원과 진사를 비교해보면 생원보다 진사가 훨씬 많았다. 한말 황현(黃玹)의『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대개 늙은 유생들을 생원이라 불렀으므로, 이와 구분하기 위해 생원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자신들을 오히려 진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보면, 당시의 유생들은 생원보다는 진사가 되기를 원했고, 진사를 보다 격이 높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조선 후기로 올수록 생원시와 진사시는 그 실시 횟수와 뽑는 인원도 늘어나, 진사시에 100명이 훨씬 넘게 합격자를 배출하기도 하였다. 진사시의 합격자는 서울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생원시의 합격자는 지방 출신이 많은 것도 특징이었다. 생원·진사가 아니어도 문과에 직접 응시할 수 있었는데도 진사시에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응시한 까닭은 진사는 유학자로서의 자격을 국가로부터 확인받은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진사는 즉각 관리가 되지는 못한다고 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지방에서 사족으로서의 일정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진사는 무직의 사류였지만 면역의 특전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참봉이나 교도 등의 관직에도 나아갈 수 있었고, 지방사회에서 여러 가지 기구를 조직해 영향력을 행사하고, 향교와 서원 유생의 명부[儒案, 靑衿錄]를 장악하고 향촌을 이끌어 가는 일에 앞장섰다. 따라서 진사는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증이라는 의미를 넘어 지방사회에서 유자로서 행세할 수 있는 자격증으로 활용되었다. 진사의 자격으로 지방민의 교화에 나서고, 백성에 대한 통제를 거들었으며, 그 밖에도 조세 수납, 군역 책성, 수리시설의 관리와 이용, 수령 등의 진퇴 등의 일에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때로는 지방의 유력자로 지방관과 결탁하여 이권을 누리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해도 진사가 되고자 하였으며, 조선 후기로 올수록 진사는 더욱 양산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진사 [Jinsa, a Confucian who has only passed the first civil examination, 進士]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