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世 紫絲 官 大奈麻, 東京雜記云 奈者人君之稱 官大奈麻東京雜記奈者人君之稱 開城四年己未正月與侍中陽定金明之亂迎祐徵立之是爲神武王是年三月以舍知爲嵩善都太守以重奈麻陞大奈麻以病免位卒于溟州
◎ 김자사(紫絲), 강릉김씨 3세손으로 아버지 김신의 독자(獨子) 관직으로는 대내마(大乃麻)를 맡으심.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인군(人君, 백성의 임금)이라고 불렸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 제위 826년 ~ 836년) 11년 기미(己未) 1월 시중 김양(金陽)과 함께 김균정(金均貞)을 왕에 세우려다 폐하여 김양(金陽)과 같이 피신하다. 김명(金明)은 김제융(金悌隆)을 신라 43대 희강왕(僖康王, 제위 836년 ~ 838년)으로 세우더니 3년 후 김명이 왕을 시해하고 신라 44대 민애왕(閔哀王, 제위 838년 ~ 839년)로 즉위하니 김양이 군사를 모집하고 청해진 궁복의 도움을 받아 동평장군이 되고, 자사(紫絲) 본인도 동평대감이 되어 대구벌에서 관군을 토평하고 김우징(金祐徵)이 신라 45대 신무왕(神武王)으로 즉위하는데 기여하고 숭선군 태수(嵩善都 太守) 병부태사 무진주태수 대나마(大奈麻)에 오르셨다. 이후 병을 얻어 관직에서 물러나고 명주로 가서 돌아가시다.

강릉김(江陵金) 3세(三世) 김자사(金紫絲) 대내마(大乃麻)의 공적과 삶
1. 왕실의 의리를 지키신 충의
대나마님께서는 대나마(大奈麻)라는 관직을 맡으셨는데, 이는 신라 17관등 중 제10등에 해당하는 중요한 직위입니다(자료 3.1, 3.4). 동경잡기에는 ‘인군(人君)’이라 불리셨다는 기록은, 관등을 초월하여 백성의 지도자로서 존경받으셨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대나마님의 충의는 836년 흥덕왕 붕어 후 벌어진 왕위 쟁탈전에서 빛을 발하셨습니다. 시중 김양(金陽)과 함께 김균정(金均貞)을 왕으로 옹립하려 하셨으나, 김명(金明)과 김제륭 일파에게 패하여 김균정 공께서 시해되셨습니다. 이때 대나마님께서는 김양과 함께 피신하며 충성심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자료 1.2, 1.8).
2. 신무왕 옹립의 결정적 기여
패배 이후 김제륭이 희강왕으로 즉위하고, 3년 후에는 김명이 희강왕을 시해하고 민애왕(閔哀王)으로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 신라의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불의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으시고, 대나마님께서는 김균정의 아들인 김우징(金祐徵)을 옹립하고자 뜻을 모으셨습니다.
김양 공께서 군사를 모아 청해진(淸海鎭)의 대사 장보고(張保皐)에게 도움을 청하자, 대나마님께서는 동평대감의 자격으로 합류하셨습니다. 장보고의 막강한 군사력(정년이 이끈 5천 명의 정병)을 바탕으로 김양의 군사와 연합하여 대구벌 전투에서 민애왕의 관군을 토평하고 승리하셨습니다(자료 1.1, 1.2). 그 결과 민애왕을 제거하고 김우징 공을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으로 옹립하는 위대한 공적을 세우셨습니다.
3. 공신으로서의 영예와 안식
신무왕이 즉위하신 해인 기미년(839년) 3월, 대나마님께서는 왕위 옹립의 공로를 인정받아 숭선군 태수(嵩善都 太守), 병부태사(兵部太師), 그리고 다시 대나마(大奈麻)의 관직에 오르셨습니다. 이는 그 시대에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후 병을 얻으시어 관직에서 물러나시게 되었고, 명주(溟州)로 가시어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격변하는 신라 하대 왕실의 권력 투쟁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충의를 보이시고, 마침내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김자사 대나마님의 고귀한 삶은 후세에 길이 남아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격변의 시대, 신라 하대(下代)의 사회상
김자사 대나마께서 활동하셨던 9세기 신라 하대는 통일 신라가 쇠퇴의 길로 접어들면서, 정치적 혼란이 극심하고 사회경제적인 모순이 깊어지던 시기였습니다.
1. 정치적 혼란과 왕위 쟁탈전
이 시기는 진골 귀족들 사이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끊이지 않던 때였습니다. 특히 원성왕계 후손들 사이에서 권력 투쟁이 반복되었고, 이는 중앙 정치의 불안정을 극대화했습니다. 대나마님께서 직접 겪으셨던 김균정-김우징 일파와 김명-김제륭 일파 간의 충돌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자료 1.3, 1.6).
2. 사회·경제적 어려움과 민심 이반
중앙 귀족들은 사치와 향락에 빠졌으나, 지방에서는 잦은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자료 2.2).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초반에 가뭄이 빈번했으며, 이는 곧 흉년과 기근으로 이어져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생계를 잃은 백성들은 점차 도적(산적, 해적)이 되어 봉기하기 시작하였고, 이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자료 2.2). 또한, 한랭 건조한 기후와 더불어 전염병(천연두 등)이 유행하여 사회 전체의 침체를 가속화했습니다(자료 2.3).
3. 대외 교류와 지방 세력의 성장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신라는 당나라와의 조공무역을 통해 활발한 경제활동을 이어갔고, 구법승, 유학생, 민간 상인들의 왕래가 다양해지며 국제 교류는 지속되었습니다(자료 2.1). 한편, 해상왕 장보고와 같은 지방의 군사 및 경제 실력자들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여 중앙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이는 대나마님의 일생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대나마: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등(官等) 중의 제10등으로서, 일명 ‘대나말(大奈末)’·‘한나마(韓奈麻)’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 때 제정되었다고 하였으나, 520년(법흥왕 7)의 율령(律令) 공포 때 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나마는 진골·6두품 이외 5두품도 받을 수 있었으나, 동시에 5두품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었다. 따라서, 5두품 출신의 대나마 관등 소지자에게는 이른바 특진제도로서 중위제도(重位制度)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즉, 중대나마(重大奈麻)에서 9중대나마(九重大奈麻)까지가 그 것이다.
그러나 이 중위제도는 어디까지나 대나마 관등 안에서의 제한된 승진제도였을 뿐이며, 그 자체 대나마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공복(公服)의 빛깔은 청색(靑色)이었다. 한편 대나마는 영흥사성전(永興寺成典)과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이란 관청의 관직 명칭이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나마(大奈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