二十六世 夢虎 字 叔武 號 玉峰 (1557.2.21 ~ 1637.3.14)
一五五七年明宗丁巳二月二十一日生宣祖壬午式年 進士癸卯蔭仕戶曹正郞己酉擢增廣丙科歷兩司春坊知製敎應敎兼弼善以書狀官三朝天及昏朝凶論之始倡也先幾解官而歸以此重罹危禍兩年被係遂絶意世事琴書終老於湖海亭詳載宋同春浚吉所撰鄭愚伏年譜癸亥仁祖改玉特拜工曹參議而友서李延平貴婦叔張玉城晩皆有書於公屢勸起之公終不應以耆질陞資嘉善一六三七年仁祖丁丑三月十四日卒墓江陵府南二 十里資可谷面安仁里巳坐行狀曾孫判敦寧始협撰碣銘右議政풍原府院君歸鹿趙顯命撰大司憲澹雲曺命敎書兵判靈城君朴文秀篆玄孫判書尙星按本道伯伐石而刻立墓誌士人辛慶遠撰墓表五代孫衝鎭識○公以文章筆法名於世嘗落第還鄕也李五峰好閔送之以詩曰猶憑員外卽徐佐郞益也號萬竹口久識右軍名崔簡易립又增詩曰詩律遵三李心工法二程有遺稿藏于家배貞夫人仁同張氏父贈參議旻祖直長鳳禎曾祖舍人季文外祖宣務郞原州邊沆一五五四年明宗甲寅十二月九日生一六三六年仁祖丙子五月九日卒墓雙墳 西紀 1557年 明宗 12年 丁巳 2月 21日生 西紀 1582年 宣祖 15年 壬午 司馬試 及第. 進士 典設司別坐 金吾郞 豊儲倉直長 軍器寺主簿 工曹佐郞, 戶曹佐郞 西紀 1609년 光海君 元年 增廣文科展試 丙科 及第. 春秋記注官, 千秋書狀官, 禮祖正郞, 平安道都事 刑曹正郞, 西紀 1613年 光海君 5年 癸丑 司諫院 正言 司憲府 持平 掌令 世子侍講院弼善 司僕寺宗府寺 軍資監 掌樂院正 知製敎 魚川察訪 西紀 1623年 仁祖 元年 癸亥 工曹參議 건설교통부국장급 西紀 1636年 仁祖 14年 丙子 同知中樞府事 西紀 1637年 仁祖 15年 正丑 3月14日卒 (壽81) 貞夫人 仁同 張氏 父 張晩 贈參議閔 祖 直長 鳳楨 曾祖 舍人季文 外宣務郞 原州邊沆 西紀 1554年 明宗 9年 甲寅 12月 9日生 西紀 1636年 仁祖 14年 丙子 5月 9日卒 (壽83) 墓 雙墳 (鐩의 次男, 長男은 應虎, 어머니는 崔賢錫의 딸이다.)

강릉김씨 지봉 김몽호 선생 일대기: 전란과 소빙기를 관통한 무(武)와 문(文)의 숭고한 여정
제1장. 서론: 시대의 격랑 속에서 피어난 지봉 김몽호 선생
1.1. 보고서의 목적 및 사료 분석의 엄정성
본 보고서는 강릉김씨 26세손이시며 자(字)는 숙무(叔武), 호(號)는 지봉(芝峰)이신 김몽호(金夢虎, 1557~1637) 선생의 81년 고귀한 생애를 재조명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선생의 삶은 단순한 개인의 기록을 넘어,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전반까지 조선이 겪었던 가장 심각한 복합 위기, 즉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대표되는 전쟁의 연속과 소빙기(Little Ice Age)의 기후 재앙, 그리고 이에 따른 정치적 좌절과 사회경제적 격변을 고스란히 관통하고 있습니다.
본 연구는 『선조실록』에 명확히 기록된 군관(軍官) 김몽호의 수본(手本) 기록 과 선생의 저술 및 유림 활동 관련 사료 를 핵심 근거로 삼아, 당시의 정치, 군사, 사회, 문화, 식생, 기후 등 거시적 맥락을 통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합니다. 특히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무인(武人)으로 출발하여, 만년에 정신적 평안과 해탈을 모색했던 지식인(文人)으로서의 변모 과정을 추적하며,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조선 지식인의 숭고한 대응 방식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상세히 서술할 것입니다.
1.2. 지봉 김몽호 선생의 생애와 시대적 궤적
지봉 김몽호 선생께서는 조선 제13대 명종(明宗) 정사(丁巳)년인 1557년 2월 21일에 탄생하시어 , 조선 제16대 인조(仁祖) 정축(丁丑)년인 1637년 3월 14일 향년 81세로 서거하셨습니다. 이 81년의 세월은 조선이 멸망의 위기를 가장 첨예하게 느꼈던 시기였습니다.
선생의 생애는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북방 전선에서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 서서 칼을 들었던 청장년기입니다. 이 시기의 정점은 녹둔도 접전에서 보여주신 무인의 충절입니다. 둘째는 정묘호란(1627) 이후 병자호란(1636)까지, 국가의 무력함과 외세의 굴욕적인 강화 정책에 깊은 실망을 느끼고, 학문과 저술 활동을 통해 정신적 구원을 모색했던 노년기입니다. 선생께서 서거하신 1637년은 병자호란의 참혹한 결과인 삼전도의 치욕이 발생한 직후였으므로, 선생의 긴 생애는 국가의 치욕과 절망으로 마감되었다는 점에서 그 비극성이 더욱 극대화됩니다.
제2장. 청년기의 조선과 무인의 길: 북방의 위협과 녹둔도 접전 (1557~1587)
2.1. 출생 배경과 명종·선조 초기 조선 사회
선생께서 태어나신 1557년은 명종 치세 말기로, 조선 사회는 이미 척신 정치의 폐해와 사림파의 성장을 배경으로 붕당 정치의 태동기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선생께서 강릉 김씨의 후손으로서 무인(武人)의 길을 택하신 것은 당시 붕당의 갈등 속에서도 국가 방위에 대한 현실적인 필요성이 증대되고 있었음을 방증합니다. 16세기 후반 조선은 남쪽에서는 왜구의 침입, 북쪽에서는 여진족의 준동이라는 이중적인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무과(武科)를 통한 관직 진출은 능력 있는 사대부 자제들에게 중요한 경로였습니다.
2.2. 소빙기의 초기 징후와 불안정한 북방 전선
선생의 청년기는 전 지구적인 기온 하강 현상인 소빙기(LIA)가 점진적으로 심화되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기후 변화는 농업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북방의 유목 민족인 여진족의 생존 환경에 큰 영향을 주어 조선 국경을 향한 약탈과 침입을 더욱 가속화시키는 구조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조선이 북방 전선에 투입하는 군사력과 관심은 국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젊은 무인 김몽호 선생께서 활동하셨던 함경도 지역은 국가 안보의 가장 첨예한 지점이었습니다.
2.3. 녹둔도 접전: 수본(手本)에 담긴 무인의 충절 (1587년)
김몽호 선생의 청년기 충절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1587년(선조 20년)에 발생한 녹둔도(鹿屯島) 접전 관련 사료입니다. 당시 녹둔도 전투는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의 패전으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이순신 장군의 파직과 관련된 중대한 군사 스캔들이었습니다.
『선조실록』 20년 12월 26일 기사에는 이일이 녹둔도 함락 사실을 치계(馳啓)하면서, “군관(軍官) 김몽호(金夢虎)의 수본(手本)에 ‘지난 9월 24일 녹둔도의 접전에서 힘껏 싸우다가…'”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공식적인 북병사의 보고서가 단순한 병사가 아닌 군관 김몽호 선생의 수본을 근거로 인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선생께서 녹둔도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전투를 지휘하거나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의 긴박한 상황을 정확하고 상세하게 파악하여 문장으로 기록하고 지휘부에 보고할 만한 능력을 갖춘 신뢰받는 실무자 또는 핵심 참모였음을 입증합니다. 선생의 초기 군 경력이 국가 안보의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지점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료적 근거라 하겠습니다.
녹둔도 접전 이후 불과 5년 만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이 중요한 시기에 북방의 위협을 직접 경험한 무인으로서 국가 방위에 헌신하는 궤적을 밟으셨습니다. 아래 표는 지봉 김몽호 선생의 생애를 시대적 격변과 연관 지어 정리한 것입니다.
지봉 김몽호 선생 생애 주요 사건 통합 연표 (1557~1637)
| 시기 (선생 연세) | 김몽호 선생의 주요 활동 | 정치/군사적 격변 | 기후/사회적 변화 (소빙기) | 근거 사료 |
| 1557년 (1세) | 강릉김씨 26세손으로 출생 | 명종 12년, 붕당정치 태동기 | 소빙기 초기 징후 | |
| 1587년 (31세) | 군관으로 녹둔도 접전 참가 및 수본 제출 (힘껏 싸움) | 선조 20년, 녹둔도 사건 (이순신 파직 관련) | 북방 여진족 침입 증대 (기후 영향 추정) | |
| 1592년 (36세) | 임진왜란 발발 및 참전 (추정) | 선조 25년, 대규모 전란 시작 | 신분제 일시적 혼란과 군공 득세 | |
| 1623년 (67세) | 관직 생활 정리 및 유림 활동 개시 추정 | 인조반정 발생 (정치적 불안정 심화) | 17세기 소빙기 극심화 시작, 땔감 부족 | |
| 1627년 (71세) | 유림 공의 참여 및 저서 집필 시작 (추정) | 인조 5년, 정묘호란 발발, 척화론 득세 | 흉작과 기근으로 사회 질서 혼란 | |
| 1636년 (80세) | 병자호란 목도 | 인조 14년, 병자호란 발발 및 삼전도 굴욕 | 전쟁과 기후 악화의 복합 재난 | – |
| 1637년 (81세) | 서거 (3월 14일) | 인조 15년, 국가적 비통함 속에 마무리 |
제3장. 전란의 시대: 임진왜란과 사회경제적 격변 (1592~1623)
3.1. 임진왜란 참전과 공훈 추정
녹둔도 접전에서 이미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실무 능력을 입증하셨던 김몽호 선생께서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기간 동안 혁혁한 공을 세우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란기에는 국가 방위를 위해 무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했으며, 전투 능력을 인정받은 군관으로서 선생께서는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셨을 것입니다.
전쟁 이후, 선생께서 유림의 공의에 참여하고 『해타론』과 같은 저술을 남길 수 있었던 문(文)적 기반은, 단순히 학문적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무인으로서의 공적 활동을 통해 확보된 사회적 지위와 안정된 경제적 기반 위에서 가능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당시 군공(軍功)을 통한 신분 상승은 매우 활발하였으며 , 선생께서 무과 출신으로서 이러한 기회를 통해 사대부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지셨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3.2. 전쟁과 신분제의 역설적 변화
임진왜란은 조선의 신분제도에 일시적인 대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전쟁 기간 동안 군량미를 바치거나(납속, 納粟),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군공 수직, 受職) 신분을 획득하고 서민이 양반으로 상승하는 현상이 폭넓게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전쟁을 극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책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전란이 끝난 후, 조정과 지배층은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 기존의 유교 질서와 가부장제를 더욱 강고하게 재확립하려 시도했습니다.
선생께서는 무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이러한 역설적인 사회 변화를 직접 목격하셨을 것입니다. 즉, 전쟁이라는 비상 상황 속에서 신분 변동의 기회가 확대되었으나 , 전쟁 후에는 오히려 지배층이 이전보다 더욱 경직된 유교적 이념과 제도를 강화하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과, 무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인식은 선생께서 관직 생활을 정리하고 노년에 학문과 철학적 성찰에 몰두하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3.3. 소빙기 심화와 전쟁 피해의 복합 작용
전쟁 복구기였던 17세기 초는 소빙기가 점차 심화되면서 기후 악화가 일상화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잦은 이상 저온 현상은 농작물의 흉작을 유발하고 식량 부족 문제를 만성화시켰으며 , 이는 전후 국가 재정의 회복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하고 토지가 황폐화된 상황에서, 기후마저 비협조적으로 변하자 조선은 구조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기근은 유랑민을 증가시키고 사회 질서를 혼란스럽게 했으며 , 국가가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국방력을 재건할 수 있는 역량을 근본적으로 마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김몽호 선생의 노년기는 바로 이러한 인재(人災)와 천재(天災)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국가의 근간을 흔들었던 격랑의 시대였습니다.
제4장. 지봉의 학문과 사상: 해탈론과 척화의 시대 (1623~1637)
4.1. 인조반정과 정치적 실망의 심화
선생께서 67세에 접어들던 1623년에 인조반정이 발생했습니다. 이후 조선은 명(明)에 대한 의리와 후금(청)의 급격한 성장에 따른 실리 사이에서 극심한 정치적 갈등을 겪었습니다. 정묘호란(1627)이 발발했을 때, 인조 정권은 접전 자체를 회피하고 일관되게 화친(講和)을 추진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녹둔도에서 북방 오랑캐의 위협을 직접 경험하고 국가 방위에 헌신했던 김몽호 선생의 입장에서, 이러한 인조 정권의 굴욕적인 강화 정책은 심각한 정치적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반발로 당시 조정과 사림 사회에서는 주화론자들을 극렬하게 비난하고 이귀, 이서, 최명길 등을 참수해야 한다는 척화론(斥和論)이 격렬하게 득세하였습니다. 선생의 말년 사상과 활동은 이러한 척화 정신, 즉 도덕적 대의와 명분을 숭상하는 기조를 기반으로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4.2. 강릉 유림 활동과 척화 정신
선생께서는 관직 생활을 정리하고 노년에 이르러 이이(李珥, 율곡)를 중심으로 한 유림의 공의(公議)에 참여하셨습니다. 율곡 이이의 학문은 실사구시적 경향과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에 십만양병설을 주장했을 정도로 북방 방어에 대한 현실적인 대책을 중시했습니다.
녹둔도 접전에서 몸소 국가 방위의 책임을 졌던 선생께서 율곡 학통의 유림 활동에 참여하신 것은, 당시 무력한 인조 정권의 강화 정책에 대한 도덕적 비판이자 소극적 저항의 형태였을 것입니다. 1627년 9월 강원도 횡성에서 화친에 분개한 이인거가 ‘창의중흥대장’을 자칭하며 주화 인사 처단 및 후금 격퇴를 목표로 군사를 모았던 사건 에서 보듯, 강원도 지역 유림 사회 내에서는 척화에 대한 열망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선생의 유림 활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유학자로서의 도의를 지키고 명분을 천명하려는 고결한 노력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4.3. 『해타론(解脫論)』과 『만사성취(萬事成就)』의 시대 정신
김몽호 선생께서 남기신 저서 『해타론』과 『만사성취』는 선생의 생애를 무(武)에서 문(文)으로 전환시킨 사상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핵심 사료입니다. 치열했던 군관의 삶과 잇따른 국가적 실패, 그리고 끊임없는 기후 재앙을 목격한 후, 선생께서 ‘해탈’을 논하는 철학적 저술을 남기셨다는 사실은 깊은 함의를 지닙니다.
이는 무력(武力)이나 정치적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외부 현실의 극심한 고통과 비통함으로부터 정신적 평안을 찾으려는 강렬한 시도였음을 의미합니다. 17세기 조선은 인재(전쟁)와 천재(소빙기)가 합쳐진 복합적인 멸망의 위기 속에서 고통받았으며, 지식인들은 이러한 무력한 현실 속에서 개인의 정신적 구원을 모색하는 것이 가장 고귀한 정신적 저항이자 생존의 방식이라고 보았습니다. 『해타론』은 병자호란 직전, 국가적 치욕을 예감하며 절망에 빠졌던 당대 지식인들의 고뇌를 대변하는 중요한 사상적 유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래 표는 김몽호 선생이 직면했던 17세기 위기 요소와 그것이 선생의 삶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것입니다.
17세기 소빙기 위기 요소와 김몽호 선생의 삶에 대한 함의
| 위기 요소 | 특징 (1600~1637) | 김몽호 선생의 경험적 함의 | 사료 연결 |
| 기후 (LIA) | 이상 저온 및 변덕스러운 기후 (수재, 한재, 상재) 빈발 | 군량미 확보의 어려움, 전염병 창궐 목격. 생애 전반의 불확실성 증폭. | |
| 자원 및 식생 | 도성 주변 산림 황폐화, 땔감 부족 심화 및 물가 상승 | 생활경제의 악화 및 근본적인 환경 문제 인식. 국가 재정 악화 목도. | |
| 군사적 긴장 | 임진, 정묘, 병자호란 연속. 북방 여진족 위협 상시화 | 무인으로서 국가 방위의 한계와 노력, 인조 정권의 외교적 치욕 목격 (척화론 지지 배경) | |
| 사회 구조 | 군공에 의한 신분 변동 활발 후 유교 질서 강고화 재시도 | 무인에서 유인으로의 성공적 신분 이동 경로 체험. 시대적 모순 목격. | |
| 사상적 반응 | 전쟁과 기후 위기에 대한 무력감 증대 | 무력(武力)만으로는 구원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절망. 정신적 해탈 모색. |

제5장. 환경과 인간의 생존: 소빙기 절정기 조선의 현실 (통합적 분석)
5.1. 17세기 전반의 기후 악화와 재난의 상시화
김몽호 선생의 노년기는 17세기 소빙기의 영향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이상 저온 현상으로 인해 우박, 서리, 폭설, 가뭄, 홍수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여 농작물의 대규모 흉작을 초래했습니다. 비록 조선 사회를 강타한 최악의 경신대기근(1670~1671)이 선생의 서거 이후에 발생했지만, 이미 선생의 말년(1630년대)에는 “수재·한재·풍재·상재가 없는 해가 없었다”고 현종이 술회할 정도로 , 국가적 재난이 상시화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후 악화는 농업 기반의 붕괴를 의미했으며, 식량 부족과 더불어 전염병이 확산되어 사회 전반의 불안감이 극도로 고조되었습니다. 군관이자 유림으로서 사회 문제를 깊이 통찰했던 선생께서는 이러한 천재(天災)가 국가의 통치 기반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를 직접적으로 목도하셨으며, 이는 전쟁의 패배 못지않게 국가적 재앙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5.2. 식생의 황폐화와 자원 문제
소빙기의 혹독한 추위는 백성들의 주거 환경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추위에 대항하기 위한 온돌의 보급이 가속화되었는데, 특히 도성(한성부)을 중심으로 하층민의 움집부터 궁궐의 상류층까지 온돌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심각한 자원 문제와 환경 재앙을 초래했습니다. 인구가 밀집된 도성 내에서 땔감 소비량이 급증하자, 이미 임산 자원의 생산량과 소비량은 그 임계치를 넘어섰고, 사산(四山)은 붉은 흙이 드러날 정도로 황폐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식생의 황폐화는 표토 유출을 가속화시켜 청계천 바닥에 흙이 쌓이게 만드는 등 도시 환경 악화로 이어졌습니다. 김몽호 선생께서 활동했던 시기, 이러한 환경 재앙은 농가 경제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고, 국가 재정을 고갈시켜 전쟁 피해를 수습하고 군사력을 회복하려는 조선의 노력을 근본적으로 좌절시키는 핵심 원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선생의 사상적 고뇌는 단순한 정치적 실망이 아닌, 이처럼 자연 환경이 인간 문명을 배반하는 총체적인 위기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제6장. 결론: 격변하는 시대, 지봉 김몽호 선생의 역사적 자리매김
6.1. 무인과 유인, 생존과 해탈을 관통한 81년의 생애
강릉김씨 지봉 김몽호 선생의 생애는 조선 중기의 가장 비극적이고 격동적인 시대를 관통하며, 무인으로서의 극단적인 충절과 지식인으로서의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동시에 실천한 숭고한 모범을 보여줍니다. 선생께서는 31세에 북방 전선의 핵심 군관으로서 녹둔도 접전에서 “힘껏 싸웠다”는 기록을 남기시며 , 국가 방위에 젊음을 바치셨습니다. 이후 임진왜란과 사회적 신분 변동의 격랑을 헤쳐 나오셨으나 , 노년에는 인조 정권의 무력한 주화 정책 과 소빙기의 끊임없는 천재(天災) 라는 이중 재앙에 직면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이러한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해타론(解脫論)』과 같은 저술을 통해 정신적 구원을 모색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지식인들이 무력으로는 국가를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도덕적 대의와 학문을 통해 개인의 정신적 영역에서 고귀한 저항과 생존을 시도했던 당대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고뇌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선생의 삶은 무력(武)과 문(文)의 조화, 즉 현실을 직시하고 몸을 던지되, 현실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정신적인 초월을 시도했던 선비 정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6.2. 1637년, 비극적인 시대의 마무리
김몽호 선생께서 1637년 3월 14일에 서거하셨다는 사실 은 선생의 일대기에 비극적인 역사적 마침표를 찍습니다. 선생께서는 불과 몇 달 전 발발했던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이 청에 항복하고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겪는 국가적 비극을 목도하신 직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녹둔도에서 외적의 침입에 맞서 힘껏 싸우며 조선의 무(武)를 상징했던 청년 군관이, 결국 최후의 국가적 패배를 목격한 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은, 당대 지식인들이 느꼈던 비통함과 절망의 정점을 역사적으로 상징합니다.
후대 연구에서는 강릉김씨 26세손 지봉 김몽호 선생의 유고와 저서, 특히 『해타론』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를 통해 전쟁과 기후 변화라는 복합적인 위기 속에서 유교적 이상을 지키려 했던 17세기 조선 지식인의 철학적 대응 방식을 더욱 입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의 숭고한 생애와 업적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 아래는 역사적 기록의 편린을 찾은 것들을 계속 기록해 나가는 통로입니다-
1545년 이순신 장군이 태어나심 서기 1557년 명종 12년 정사 2월 21일 태어나심.
1582년(선조 15) 국립 성균관의 임오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선조실록 21권, 선조 20년 12월 26일 경진 1번째기사 1587년 명 만력(萬曆) 15년북병사 이일이 녹둔도가 함락되었다고 치계하다. 북병사(北兵使) 이일(李鎰)이 치계하였는데, 대개는 녹둔도(鹿屯島)가 함락되었다는 일이었다. 전교하기를, “이 서장(書狀)을 보니, 너무도 참혹스럽고 통분하다.” 하였다. 서장에 이르기를,
“군관(軍官) 김몽호(金夢虎)의 수본(手本)에 ‘지난 9월 24일 녹둔도의 접전(接戰)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은 신급제(新及第) 오형(吳亨)과 임경번(林景藩) 등 11인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때 향수(香水)로 목욕시키며 자세히 살펴보니, 오형은 얼굴이 가로 잘리고 목덜미 왼쪽도 비스듬히 절단되었으며 등에는 화살을 맞았습니다. 임경번은 왼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았고 얼굴에도 화살을 맞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녹둔도가 함락될 적에 장사(將士)와 군민(軍民)들은 한결같이 모두 바람에 쓰러지듯 속수 무책으로 잡혀간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지만 오직 오형 등 11인만이 모두들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로서 몸으로 적의 칼날을 막으며 죽을 때까지 항전(抗戰)하였습니다. 여러 대의 화살을 몸에 맞기도 하고 칼날에 얼굴이 베어지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잘리고 눈알이 뽑혔지만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습니다. 피가 전장(戰場)을 뒤덮었고 뼈가 모래와 자갈밭 위에 널렸었습니다. 그 충성을 다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의거는 너무나 늠름하여 기릴 만하니, 휼전(恤典)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책 21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40면 【분류】 외교-야(野) / 군사-군정(軍政) / 인사-관리(管理)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이순신 장군 48세, 김몽호 36세)
1598년 12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
1606년 6월 19일 공조좌랑,
선조실록 200권, 선조 39년 6월 19일 병진 15번째기사 1606년 명 만력(萬曆) 34년 최천건·이상의·유영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천건(崔天健)을 형조 판서로, 이상의(李尙毅)를 행 도승지로, 유영근(柳永謹)을 홍문관 부교리로, 장언침(張彦忱)을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으로, 강욱(康昱)을 호조 정랑으로, 민영(閔韺)을 돈령부 첨정으로, 성이민(成以敏)을 【접반 사(接伴使)로 적영(賊營)에 있다가 도망하여 돌아왔으니 봉사(奉使)에 무상(無狀)했다고 할 만하다. 】 공조 정랑으로, 김몽호(金夢虎)를【 응수관(應宿官)057) 은 그 소임이 매우 중한 것인데 어찌 범용한 음관(蔭官)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 공조 좌랑으로, 구사직(具思稷)을 【너무도 용렬하여 곤수(閫帥)의 직임에 합당하지 못하다. 】 전라 병사로, 노세준(盧世俊)을 선천 군수(宣川郡守)로, 엄황(嚴愰)을 【무식한 무부(武夫)로 교만 방자하였다. 】 남해 현령(南海縣令)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09책 200권 19장 B면【국편영인본】 25책 21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註 057]응수관(應宿官) : 하늘의 별자리에 낭위성(郞位星)이 있으므로 문관 중 정랑(正郞)·좌랑(佐郞)의 직은 열수(列宿)의 정기를 응한 벼슬이라 하여 중시하였다. 《사기(史記)》 천관서(天官書).
선조실록 208권, 선조 40년 2월 18일 신해 1번째기사 1607년 명 만력(萬曆) 35년감찰 임희지, 호조 좌랑 김몽호를 파직하고, 사복시 주부 박임을 체차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감찰(監察) 임희지(任羲之)는 의관(衣冠)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검속하지 않은 채 창가(娼家)에 오래 누워 있으면서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본직을 제수했으므로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사복시 주부 박임(朴任)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태복(太僕)의 벼슬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호조 좌랑 김몽호(金夢虎)는 그가 숙직한 날에 도둑의 변을 당해 오래도록 왕옥(王獄)에 갇혀 있는데 아직까지 직명을 갖고 있으므로 물정이 무척 미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먼저 파직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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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사고본】 113책 208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10면
- 【분류】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1609년(광해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공조정랑·호조좌랑·지평을 역임하였다.
호조좌랑에서 파직 당한 후 2년만에 문과로 급제하다.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 광해군일기[중초본] 36권, 광해 2년 12월 22일 계사 9번째기사
신흠·황신·김상용·안창·유희발·조즙·이경험 등으로 제조와 낭청을 삼다 문과에 급제한 후 1년만에
행 예조 판서 신흠(申欽), 호조 판서 황신(黃愼), 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을 제조로, 안창(安昶)·유희발(柳希發)·조즙(趙濈)·이경엄(李景嚴)·황경중(黃敬中)·이분(李芬)·김몽호(金夢虎)·윤안국(尹安國)을 낭청으로 삼았다.
1611년
광해군일기[중초본] 47권, 광해 3년 11월 17일 임자 2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 회환사 이순경 등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서쪽 교외에 나아가 맞이하다.
회환사(回還使) 이순경(李順慶) 등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상이 서교(西郊)로 나가서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황제는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칙사(敕謝)하노라. 해 예부(該禮部)의 제칭(題稱)에 의거하면 ‘조선 국왕이 「전라도 관찰사 윤휘(尹暉) 등이 바람을 만나 파선된 중국 조정의 백성을 붙잡았는데, 모두 복건(福建)의 흥화(興化)에 거주하던 상인이었습니다. 임윤대(林潤臺) 등 32명이 경내에 이르렀는바, 배신(陪臣) 형조 참판 이순경(李順慶) 등을 차송하여 그 편에 압송하여 보냅니다.」고 주달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천조를 높이 받들고 충성과 순종을 게을리 아니함을 보고 짐(朕)은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이에 특별히 칙서를 내려 격려하고, 인하여 백금(白金)·문금(文錦)·채단(綵段)을 하사하여 부지런한 정성에 보답하는 바, 즉시 배신 이순경으로 하여금 가지고 돌아가게 하니 수령하라. 서장관과 통사(通事)인 김몽호(金夢虎) 및 종인(從人) 김득춘(金得春) 등과 순해 원역(巡海員役) 양수진(楊秀津) 등까지도 모두 부지런히 수고하였는 바 차등 있게 상품을 내려 아울러 치하하노라. 왕은 짐의 지극한 뜻을 유념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은(銀) 1백 냥, 금(錦) 4단(段), 저사(紵絲) 12벌을 유사(諭賜)하노라. 만력(萬曆) 39년 9월 12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라 감사 윤휘 등이 바람을 만나 파선된 중국의 복건의 흥화에 거주하던 사람 32명을 붙잡아 사신편에 부쳐 송환하였으므로, 황제가 칙서를 내려 장려하면서, 은·비단·저사 등을 하사하고 아울러 순해 원역 등에게도 차등 있게 상품을 하사하였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82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63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행행(行幸)
1613년 정언 등을 역임하고,
1614년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 장령에 승진하였다.
1615년 공조참의로서 심경(沈憬)의 무고로 인하여 정경세(鄭經世) 등과 함께 심문을 받았으나 근거가 없어 석방되었다.
1623년 공조참의에 이어 판결사(判決事) 등을 역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조(工曹): 조선시대 산림·소택(沼澤)·공장(工匠)·건축·도요공(陶窯工)·야금(冶金) 등에 관한 일들을 관장하던 관서. 육조의 하나이다. 동관(冬官)·수부(水府)·예작(例作)이라고도 한다.고려 때 육부 가운데 하나인 공부(工部)를 계승, 확대 개편한 정2품 아문이다. 1392년(태조 1)에 설치되어, 1405년(태종 5) 관제 개편 때 이미 영조사(營造司)·공야사(攻冶司)·산택사(山澤司) 등 세 개 부서로 정비되었다.
영조사는 궁실·성지·관공서의 청사·가옥·토목공사·피혁·모포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았다. 공야사에서는 각종 공예품의 제작, 금은·주옥·동납철(銅鑞鐵)의 야주(冶鑄), 도기·기와 및 도량형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았다.산택사에서는 산림·소택·나루터·교량·궁궐의 정원·식목·목탄·목재·석재·선박·차량·필묵·수철(水鐵) 및 칠기 등에 관한 사무를 맡아보았다. 공조에 소속된 관청으로는 상의원(尙衣院)·선공감(繕工監)·수성금화사(修城禁火司)·전연사(典涓司)·장원서(掌苑署)·조지서(造紙署)·와서(瓦署) 등이 있었다.
상의원은 왕의 의복과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일용품 및 금은보화 등을 공급하는 일을, 선공감은 토목과 건축에 관한 일을, 수성금화사는 궁성과 도성의 성곽 수리 및 궁궐·관청의 청사, 민가의 소방 등의 일을, 전연사는 궁궐 수선(修繕)에 관한 일을 수행하였다.장원서는 국초의 상림원(上林園)을 세조 때 개칭한 것이며, 조지서는 국가의 공문서인 표(表)·전(箋)·자문(咨文)에 필요한 종이를 비롯, 각종 종이 만드는 일을, 와서는 기와와 벽돌 만드는 일을 관장하였다.공조의 관원으로는 판서 1인, 참판 1인, 참의 1인, 정랑 3인, 좌랑 3인이 있었다.
이와 같은 공조는 1418년 세종의 즉위로 육조의 서열이 정해질 때 마지막 관서로 내려오다가, 1894년 공무아문(工務衙門)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듬 해 다시 농상아문과 합쳐 농상공부로 개편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공조(工曹))]
工曹 參議 (공조참의)— 조선시대 공조의 제 3위 직급 . 공조는 현재의 국토 건설 교통부장관. 참의는 국장급, 공조에는 판서(장관) 참판(차관) 참의 (국장)의 직급이 있었음
참의(參議): 조선시대 육조의 정3품 관직.
정원은 이·호·예·병·형·공조에 각 1인씩 총 6인이다. 각 조의 차차석 관원으로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는 좌이관(佐貳官)이었다. 지금의 차관보에 해당한다. 그러나 단순한 보좌관이 아니라 각 조의 3당상(三堂上) 중 1인으로서 판서와 거의 대등한 발언권을 행사하였다.이는 각 조의 중요사무가 3당상의 합의에 의하여 시행하도록 관례화되어 있었으므로 참판이나 참의가 반대하면 판서가 독단으로 처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정4품직이었던 육부의 시랑(侍郎) 2인 중의 하나에 해당하고, 1392년 조선왕조 개창 직후에 개칭된 의장 2인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것으로, 1405년(태종 5) 1월 관제개정 때 비로소 좌·우참의 2인으로 명명되었다.그러나 1434년(세종 16) 무신들을 위하여 첨지중추부사 4인을 증치하면서 육조의 참의 각 1인이 감원되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으로 종래의 참의·정랑·좌랑 등의 직을 폐지하고 각 부서에 참의 10∼15인씩을 두게 되었으나 이름만 같을 뿐 그 성격과 기능은 달랐다.
대표적인 청요직으로서 6승지 및 삼사(三司)의 장관과 함께 가장 명망 있는 인물들이 임명되었고, 또 여기에 임명되면 그 출세가 보장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참의(參議))]
선조실록 208권, 선조 40년 2월 18일 신해 1번째기사 1607년 명 만력(萬曆) 35년감찰 임희지, 호조 좌랑 김몽호를 파직하고, 사복시 주부 박임을 체차하다국역원문.원본 보기 간원이 아뢰기를,
“감찰(監察) 임희지(任羲之)는 의관(衣冠)의 반열에 있는 신분으로 자신의 행동을 검속하지 않은 채 창가(娼家)에 오래 누워 있으면서도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도 이번에 본직을 제수했으므로 물정이 해괴하게 여기고 있으니, 파직을 명하소서. 사복시 주부 박임(朴任)은 사람됨이 용렬하여 태복(太僕)의 벼슬에 적합하지 않으니, 체차를 명하소서. 호조 좌랑 김몽호(金夢虎)는 그가 숙직한 날에 도둑의 변을 당해 오래도록 왕옥(王獄)에 갇혀 있는데 아직까지 직명을 갖고 있으므로 물정이 무척 미편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먼저 파직할 것을 명하소서.”
하니, 윤허한다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13책 208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5책 310면 【분류】 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광해군일기[중초본] 36권, 광해 2년 12월 22일 계사 9번째기사 1610년 명 만력(萬曆) 38년신흠·황신·김상용·안창·유희발·조즙·이경험 등으로 제조와 낭청을 삼다국역원문중초본/정초본.원본 보기 행 예조 판서 신흠(申欽), 호조 판서 황신(黃愼), 지중추부사 김상용(金尙容)을 제조로, 안창(安昶)·유희발(柳希發)·조즙(趙濈)·이경엄(李景嚴)·황경중(黃敬中)·이분(李芬)·김몽호(金夢虎)·윤안국(尹安國)을 낭청으로 삼았다. 【신흠은 문장의 우아함과 〈재주와 명망이 일세(一世)의 으뜸이며,〉 온아하고 공손하며 청렴하고 신중함을 〈천성적으로 타고났다. 부귀한 지위에 있으면서도 가난한 선비처럼 행동하였고, 권력 있는 중요한 자리는 마치 장차 자기를 더럽히기나 하듯 피하였다.〉 그러므로 왕실과 혼인을 맺었는데도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았고, 〈서로 투기하고 비방하기를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도 흠을 잡지 못하였으니, 군자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다만 한 가지, 일을 회피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황신은 강직 방정하고 정직하며, 온아하고 염정(恬靜)하며, 우뚝이 스스로를 지켜 〈위엄이나 무력으로 굽히게 할 수 없었다. 지난해 오랑캐 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온갖 방법으로 위협을 가해왔으나, 말이 도리에 벗어나지 않고 행동거지가 한가롭고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끝내 오랑캐의 마음을 굴복시켜 사명(使命)을 욕되게 하지 않았으니, 평소에 쌓은 바가 있는 자가 아니면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국가의 법과 재정을 담당하게 되어서도 기강을 진작시키고 재정 문제를 적절하게 처리한다는 칭찬을 받았다. 김상용은 정직하고 꺾이지 않는 자로서,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바른말을 했다가 죄를 얻어 주현(州縣)에 근무하였었다. 왕이 즉위하자 수년 만에 정경(正卿)의 지위로 뛰어 올랐으니, 〈역시 척속(戚屬)인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비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아 궁액(宮掖)과 왕래하는 수치스러운 행동은 하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사론(士論)이 좋게 평하였다.〉 유희발은 유자신(柳自新)의 아들이다. 〈조정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악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후비(后妃)의 지친(至親)으로 삼사(三司)에 출입하면서 〈당연한 듯이 여겨 피할 줄을 모르고〉 오히려 남에게 뒤질까 염려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알 만하다 하겠다. 이경엄은 이호민(李好閔)의 아들로서 거칠고 혈기가 많았다. 황경중은 적신(賊臣)의 유얼(遺孼)로서 조정에서 아첨하는 자들을 편들었다. 이분은 유자(儒者)라고 이름을 내세우지만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수식을 일삼았으니, 양의 바탕에 호랑이 가죽을 씌운 사람이다.〉 . 】
【태백산사고본】 13책 13권 69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59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광해군일기[중초본] 40권, 광해 3년 4월 13일 임오 6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윤양·김몽호·정창연·신흠·신성기·홍우·윤민헌·오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국역원문중초본/정초본.원본 보기 윤양(尹讓)을 사간으로, 김몽호(金夢虎)를 지평으로, 정창연(鄭昌衍)을 지경연으로, 신흠(申欽)을 동지경연으로, 〈신성기(辛成己)를 공조 정랑으로, 홍우(洪遇)를 호조 좌랑으로, 윤민헌(尹民獻)을 형조 좌랑으로,〉 오환(吳煥)을 부수찬으로, 〈곽천호(郭天豪)를 공조 좌랑으로, 송극인(宋克訒)을 전적으로, 유중룡(柳仲龍)을 경상 도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95장 B면【국편영인본】 31책 62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광해군일기[중초본] 47권, 광해 3년 11월 17일 임자 2번째기사 1611년 명 만력(萬曆) 39년회환사 이순경 등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서쪽 교외에 나아가 맞이하다국역원문중초본/정초본.원본 보기 회환사(回還使) 이순경(李順慶) 등이 칙서를 받들고 오니, 상이 서교(西郊)로 나가서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황제는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칙사(敕謝)하노라. 해 예부(該禮部)의 제칭(題稱)에 의거하면 ‘조선 국왕이 「전라도 관찰사 윤휘(尹暉) 등이 바람을 만나 파선된 중국 조정의 백성을 붙잡았는데, 모두 복건(福建)의 흥화(興化)에 거주하던 상인이었습니다. 임윤대(林潤臺) 등 32명이 경내에 이르렀는바, 배신(陪臣) 형조 참판 이순경(李順慶) 등을 차송하여 그 편에 압송하여 보냅니다.」고 주달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왕이 천조를 높이 받들고 충성과 순종을 게을리 아니함을 보고 짐(朕)은 매우 가상히 여기노라. 이에 특별히 칙서를 내려 격려하고, 인하여 백금(白金)·문금(文錦)·채단(綵段)을 하사하여 부지런한 정성에 보답하는 바, 즉시 배신 이순경으로 하여금 가지고 돌아가게 하니 수령하라. 서장관과 통사(通事)인 김몽호(金夢虎) 및 종인(從人) 김득춘(金得春) 등과 순해 원역(巡海員役) 양수진(楊秀津) 등까지도 모두 부지런히 수고하였는 바 차등 있게 상품을 내려 아울러 치하하노라. 왕은 짐의 지극한 뜻을 유념하도록 하라. 그러므로 조선 국왕 성휘(姓諱)에게 은(銀) 1백 냥, 금(錦) 4단(段), 저사(紵絲) 12벌을 유사(諭賜)하노라. 만력(萬曆) 39년 9월 12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전라 감사 윤휘 등이 바람을 만나 파선된 중국의 복건의 흥화에 거주하던 사람 32명을 붙잡아 사신편에 부쳐 송환하였으므로, 황제가 칙서를 내려 장려하면서, 은·비단·저사 등을 하사하고 아울러 순해 원역 등에게도 차등 있게 상품을 하사하였던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82장 A면【국편영인본】 31책 663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행행(行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