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이슬람 시대의 정착민 사회(사바인, 히먀르인)와 유목민 사회(베두인)는 아랍 역사의 첫 번째 주요 시기인 출현 및 혁명(Emergence and Revolution, 기원전 900년 ~ 서기 630년)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는 아랍 민족 정체성이 태동하는 과정에서 고대적이면서도 심오한 특징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먼저, 유목민 사회(베두인, badw
, aʿrab
)는 기원전 853년 아시리아의 기록에서 ‘아리비(Aribi)’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사막 깊숙한 지역에서 낙타를 소유한 부족으로 묘사되었으며, 낙타 사육과 목초지 탐색을 중심으로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의 거처는 텐트(wabar
)였고, 사회적 제도는 본질적으로 약탈(ghazw
)에 의존하였습니다. 시리아·요르단·북부 아라비아 사막에서 발견되는 사파이트어(Safaitic)와 타무드어(Thamudic) 낙서는 이들의 일상, 족보, 애도, 경쟁 등을 기록한 것으로, 당시 문화를 생생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부족 사회 안에서는 시와 예언을 위한 고급 아랍어가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무함마드께서는 이들 유목민이 ‘믿음(iman)’보다 ‘복종(islam)’을 앞세운다고 보시며, “불신과 위선에 있어 최악”이라고 평가하셨습니다.
반면, 정착민 사회(사바인, 히먀르인, hadarah
)는 남아라비아의 비옥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농업을 생존의 근간으로 삼았으며, 이를 위하여 정교한 수리 기술을 개발하였습니다. 사바인들은 마리브 댐과 같은 거대한 토목 시설을 건설하였고, 일마카(Ilmaqah) 신 숭배를 바탕으로 정치적·종교적 연합을 강화하였습니다. 또한 향료 무역과 인도양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였으며, ‘알-라흐만(al-Rahman)’과 같은 신성 명칭은 후대 이슬람 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러나 꾸란은 사바가 신의 은혜를 저버렸기 때문에 홍수로 인해 멸망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정착민과 유목민의 이중성은 아랍 역사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구조로 자리하였습니다. 두 집단은 갈등만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맺기도 하였습니다. 아시리아의 긴디부(Gindibu)가 낙타를 이용한 운송업자로 고용된 사례, 오아시스와 순례지를 통한 활발한 교류, 그리고 가산 왕조(Ghassanids)와 락흐미드 왕조(Lakhmids)처럼 정착과 유목의 특징을 동시에 지닌 왕조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꾸란의 구절 li-taʿārafū
(“서로 알게 되리라”)는 구별과 화합의 양면적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이러한 관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무함마드께서는 이 두 세계를 아우르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셨습니다. 그는 도시적·상업적 배경을 지니셨으면서도 어린 시절 유목민 환경에서 성장하여 양쪽의 언어와 생활양식을 익히셨습니다. 이를 통해 정착민과 유목민의 요소를 결합하여 초기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셨으며, 분열된 부족 사회를 하나로 묶어 내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선이슬람 시대의 정착민과 유목민 사회는 각기 다른 생활 양식과 문화를 지니면서도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였습니다. 이러한 hadar
와 badw
의 근본적 이중성은 아랍 사회의 문화와 언어, 정치적 통합 가능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궁극적으로 이슬람 혁명이 아랍 세계를 통일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