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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위(badawi)는 아랍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이 용어는 주로 ‘베두인(bedouin)’ 혹은 ‘유목민’을 뜻하며, 그에 관련된 명사형은 바다와(badawah)로, 이는 ‘베두인주의(bedouinism)’ 또는 ‘유목 사회’를 가리킵니다. 바다위는 정착민을 의미하는 하드하리(hadari) 사회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개념입니다.
하드하리와의 이중성 및 대조
바다위는 정착된 정치 사회인 하드하리에 대응하여 비정치적 사회를 이루는 개념으로 이해됩니다. 이 두 체제는 아랍 역사의 시작부터 존재해 왔으며, 단순히 대립적인 관계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상호 이익을 주고받는 관계를 맺었습니다.
바다위 사회는 습격(ghazw), 정복(conquest), 혹은 쿠데타(coup d’état)를 기본 제도로 삼는 역동적 성격을 지니는 반면, 하드하리 사회는 상대적으로 정적인 시스템으로 묘사됩니다. 꾸란에서도 ‘정착민들(peoples)’과 ‘베두인 부족들(tribes)’이 함께 언급되며, 이 두 체제가 얽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븐 할둔의 왕조 모델에서의 역할
14세기의 역사가 이븐 할둔은 유목 부족이 아사비야(’asabiyyah, 집단 연대)를 통해 군사력을 얻고, 이를 기반으로 정착 국가를 장악해 새로운 왕조를 세운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정착하면 안락한 생활로 인해 활력을 잃고, 결국 새로운 유목 부족의 도전에 의해 정복당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문명은 베두인들이 장악한 지역에서 항상 붕괴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역사적 상호작용과 영향
예언자 무함마드의 성공은 정착민과 유목민 양쪽의 요소를 결합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유목 환경에 뿌리를 두었으면서도 도시 상업 활동에 기반을 두었고, 유목민의 교통 수단을 활용했습니다. 또한 메카인들이 자녀를 유목 지역으로 보내 언어 능력과 강인함을 기르는 전통은 바다위 언어가 순수하고 웅변적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었으며, 무함마드의 유목민 교육은 아랍어의 통합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우마이야 왕조는 유목민과 정착민 모두와 연관을 맺었으며, 시리아 사막의 부족들을 군사적 기반으로 삼는 동시에 유목민적 오락인 경마와 사냥을 즐겼습니다. 그러나 압바스 시대 이후 바다위는 점차 문학적·언어학적 소재로 소비되었고, 정착 도시의 아랍인들은 유목적 뿌리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언어와 정체성과의 관계
‘아랍(’arab)’이라는 용어는 원래 사막의 유목민을 뜻했으나, 점차 아랍어를 사용하는 사람 전체를 가리키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이슬람 이후에도 바다위에 대해 ‘게으르고 무지하며 불신앙적이다’라는 부정적 시각이 있었지만, 동시에 베두인의 기질과 이상은 아랍 문화 속에 깊이 남아 ‘사막 향수’라는 형태로 현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아랍어의 다양한 분화, 특히 고급 아랍어와 일상 방언의 차이는 유목민과 정착민의 언어적 분열을 반영합니다. 예를 들어 바레인에서는 통치하는 순니 다수가 베두인 방언을, 지배받는 시아파 다수는 정착민 방언을 사용하는데, 이는 언어적 차이가 사회적 분열과 결부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현대적 관련성
오늘날 실제 베두인들은 ‘사라져 가는 종족’으로 불리지만, 그들의 행동 양식은 여전히 아랍 세계의 주요 행위자들에게서 나타납니다. 무바라크 정권 시절 낙타를 탄 용병들이 시위대를 진압한 장면은 베두인 시스템의 현대적 부활을 상징합니다. 또한 2011년 민주화 혁명의 실패와 예멘 내전은 정착민적 질서 위에 다시금 유목적 역동성이 등장한 사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드라마우트의 베두인들이 정착민을 경멸하며 농사를 ‘천한 일’로 간주한 사례는 유목민의 전통적 인식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일부 유목민들은 정부 직원으로 급여를 받는 것을 ‘국고를 습격하는 약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 아랍 독재자들이 시민 사회를 약탈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와 연결됩니다. 결국 이븐 할둔이 말한 ‘부족 대 민족’의 대화는 오늘날 ‘정착민 대 유목민’의 대립, 즉 사회를 건설하려는 자들과 약탈하려는 자들 간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