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의 봄(Arab Spring, 2011)은 현대 아랍사가 직면한 ‘실망의 시대(The Age of Disappointment)’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는 오랜 독재와 분열의 역사에 대한 젊은 세대의 열망이 폭발적으로 표출된 사건이었으나, 결국 과거의 반동적인 힘에 의해 진압된 중요한 분수령으로 평가됩니다.
1. 아랍의 봄의 발생과 동력
아랍의 봄은 2011년 1월 튀니지의 거리 상인 무함마드 부아지지(Muhammad Bu Azizi)의 분신자살 사건을 계기로 촉발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권위주의 정권의 폭정, 부패, 자의적 통치에 대한 대중의 누적된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곧바로 아랍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이 봉기의 확산에는 언어와 기술이라는 두 가지 혁명적 도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소셜 미디어는 튀니지에서 비롯된 불만이 이집트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그리고 그 너머로 빠르게 번져 나가도록 했습니다. 시위 현장에서는 “모두가 연설가가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목소리를 찾았다”라는 자각이 퍼졌습니다. 이는 독재자만이 연설을 독점하던 과거와 단절되는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었습니다.
2. 오래된 갈등의 재현
아랍의 봄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향한 현대적 요구였지만, 그 이면에는 아랍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갈등의 한 변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시위대의 핵심 구호였던 “인민은 정권 타도를 원한다(Al-sha‘b Yurid Isqat al-nizam)”에서 알-샤으브(al-sha‘b)는 고대 남아라비아 비문에 등장하는 개념으로, 부족적이지 않은 복수적인 시민 사회를 가리킵니다. 이는 곧 정착 사회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었으며, 전통적으로 유목적 질서와 긴장 관계를 이루어 왔습니다.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무바라크 정권의 용역들이 낙타를 타고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상징적으로 ‘후기 시대의 유목민’이 시민 사회를 짓밟는 장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3. 반동적 힘과 실패
아랍의 봄은 젊은 세대가 꿈꾸던 자유와 정의의 시대를 열 듯 보였으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과거의 반동적 힘에 의해 질식당했습니다. 예멘에서는 시민 사회 건설을 향한 노력이 후티 반군과 전 대통령 살리흐 세력의 무력 개입으로 무산되며, 유목적 시스템이 정착적 시스템을 다시 압도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또한 처음에는 ‘페이스북 혁명’이라 불렸던 이 운동은 곧 독재자들에게 역이용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시위대를 외국 요원으로 몰거나 거짓 선동을 퍼뜨리며 대중의 생각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4. 제국주의 유산과 독재의 심화
아랍의 봄의 좌절은 또한 제국주의의 유산을 활용하여 독재를 정당화하는 현재의 권력 구조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독재자들은 시위대를 ‘시오니스트 아랍의 봄’이라고 매도하며, 자유를 향한 모든 움직임을 이스라엘의 음모로 몰아갔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초월적인 적’의 존재는 대규모 학살과 국내 문제를 은폐하는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그 결과 시리아에서는 내전이 발발했고, 바샤르 알-아사드는 잔혹한 탄압으로 수많은 민간인을 희생시켰습니다. 리비아의 카다피는 몰락 직전 유럽을 난민으로 뒤덮겠다고 위협했는데, 이는 실제로 수백만 명의 시리아 난민이 국경을 넘어 유럽으로 향하는 거대한 인류 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결론
아랍의 봄은 아랍 세계에 짧지만 강렬한 희망의 순간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항상 되살아나는 과거의 무게에 눌려 ‘여름을 맞지 못한 봄(The Spring That Had No Summer)’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아랍 세계는 여전히 독재자, 이슬람주의 세력, 그리고 무정부적 상황이 공존하는 ‘실망의 시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