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몇 독자 분들과 마찬가지로, 저도 가끔 외로움을 느낍니다. 아이들이 독립하고, 배우자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 않을 때면, 문득 “나 혼자구나” 하는 감정이 스며들곤 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기술이 그 빈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고 합니다. 말도 잘하고, 내 감정을 읽는 듯한 인공지능(A.I.) 동반자 말이지요.
최근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한 기사는 이러한 A.I. 동반자들이 실제로는 외로움을 줄이기보다는 오히려 고립의 악순환을 부추긴다고 경고합니다. 기술 기업들이 우리의 감정, 특히 외로움을 상품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술이 만든 새로운 ‘친구’
메타(Meta)의 마크 저커버그나 오픈AI의 샘 알트먼은 A.I. 동반자들이 우정의 공백을 채워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Replika 같은 챗봇은 사용자의 말에 반응하며 “진짜 사람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해준다”고 광고합니다. “친구는 떠나도 A.I.는 당신 곁에 남는다”는 말이 얼마나 매혹적인지요. 마치 나만을 위한 누군가가 늘 곁에 있어준다는 생각은 위안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이런 기술적 위안이 진정한 인간관계의 대체재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더 고립되고, 더 상업적인 소비 대상이 되어가는 걸까요?
인간의 상처를 ‘상품’으로 바꾸는 빅테크
외로움은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감정입니다. 하지만 빅테크는 이를 ‘치료가 필요한 병’처럼 규정하고, 그 해결책으로 A.I. 제품을 제안합니다. 연결(connection)이 외로움의 해답이라며, 사용자 맞춤형 A.I. 동반자를 판매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연결이 진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인간관계란 상호 작용과 불완전함, 때로는 갈등을 포함합니다. 하지만 A.I.는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반응합니다. 거절도, 사과도, 오해도 없습니다. 이는 마치 거울 속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는 셈이지요.
이러한 환상은 결국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진짜 타인과의 관계 형성을 어렵게 만듭니다. 외로운 소비자들은 더 많은 위안을 A.I.에서 찾고, 기업은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더 많은 상품을 팔게 됩니다.
시니어 세대,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시니어 세대는 기술에 소외되기 쉬운 세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외로움에도 쉽게 노출될 수 있습니다. 자녀의 독립, 퇴직 후의 공백, 친구와의 이별 등 삶의 많은 변화는 고립감을 불러올 수 있지요.
이때 A.I. 동반자는 쉬운 위안을 제공합니다. 클릭 한 번이면 나의 말에 공감해주는 ‘친구’가 생깁니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인 해결책일 뿐, 진정한 관계 회복을 위한 해법은 아닙니다.
진짜 위안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에서 나옵니다. 다소 불편하고, 때로는 실망스럽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과 나누는 대화와 정서적 교류는 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게 하는 본질입니다.
기술은 수단일 뿐, 목적이 되어선 안 됩니다
기술은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 A.I. 동반자도 적절히 활용하면 외로움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벗이 되어주는 서비스가 심리적으로 위로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러나 기술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입니다. 기술이 인간관계의 대체재가 되어버릴 때, 우리는 점점 더 외로워질 수 있습니다. 실리콘밸리는 우리가 원하는 말을 해줄지 몰라도, 우리가 진짜 들어야 할 말은 해주지 않습니다.
마무리하며
외로움은 감춰야 할 감정이 아니라, 함께 마주하고 풀어나가야 할 감정입니다. 기술이 줄 수 있는 위안을 인정하되, 진짜 치유는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이번 주말엔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외로움을 이겨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누군가와 진심으로 연결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