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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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시대 초기에서 무함마드 선지자가 수행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심도 있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무함마드는 아랍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재정의하고, 초기 이슬람 공동체와 국가의 토대를 마련한 핵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1. 예언과 계시를 통한 종교적 기반 확립

무함마드가 선지자로서 수행한 가장 중요한 사명은 알라의 계시를 인류에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첫 계시는 *“읽으라(iqra’)!”*라는 명령이었으며, 이는 문자나 상징이 아니라 살아있는 말씀, 곧 소리로 구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였습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예수가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라면, 이슬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낭송된 소리”가 된 점에서 근본적 차이를 보여줍니다.

꾸란의 핵심 메시지는 “알라 외에 신은 없다”(La illaha illa ’llah)는 선언이었고, 이는 메카 사회의 다신교적 전통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또한 무함마드는 자신이 신적 존재가 아닌 인간에 불과하다고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람 공동체(움마)를 창시한 조상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초기 계시가 당시 무당(카힌)들의 시적 운율과 유사했기에 무함마드 자신도 일시적으로 혼란을 겪었으나, 그는 곧 카힌의 전통을 초월하여 예언자와 무당을 구분지었고, 예언자는 진리의 천사 영역과 연결되지만 무당은 악령의 속삭임에 불과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2. 정치적 국가 수립과 사회 통합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메디나(야스립)로 이주(히즈라)한 후, 종교를 넘어선 광범위한 사회 통합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정착민 사회(하다르)와 유목민 사회(바두)를 통합하여 최초의 이슬람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러한 결합은 새로운 공동체를 강화했으나 동시에 일부 유목민들이 복종(이슬람)과 믿음(이만) 사이의 긴장 속에서 반발하는 갈등도 불러왔습니다.

메디나에서 무함마드가 세운 소박한 모스크는 단순한 예배 장소를 넘어 새로운 정치 본부가 되었고, 이곳에서 종교적·정치적·사회적 사안이 함께 다루어졌습니다. 또한 그는 야스립의 시장을 면세 구역으로 선포하여 경제를 활성화시켰으며, 금요일 회중 예배를 제도화하여 종교와 상업 활동을 결합시켰습니다.

3. 언어적 권위와 문화적 재정의

무함마드는 언어적 권위를 통해 아랍 민족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전통에 따라 유목 부족에게 보내져 언어를 연마했으며, 이를 통해 “최고의 아랍어 구사자”로 불렸습니다. 무함마드는 꾸란을 통하여 고도의 아랍어를 집약된 형태로 전하며, 이를 통해 아랍 사회에 통일성과 정체성을 부여했습니다.

꾸란은 문자문화의 혁신을 촉발시켰고, 비잔틴과 페르시아와의 대결 속에서 아랍인들에게 결속의 힘을 제공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함마드는 아랍성을 단순히 변방 부족의 문화가 아니라 세계적 문명의 선도적 위치로 재정의했습니다.

4. 갈등과 계승 문제

무함마드의 생애와 업적은 후대 이슬람 사회의 갈등과 계승 문제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전사들에게 정복 전쟁(파트흐)을 독려하였고, “알라후 아크바르”, “라 일라하 일라 알라”, “무함마둔 라술룰라”라는 구호는 그의 사후에도 정복의 슬로건으로 사용되며 강력한 결속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632년 무함마드가 서거하자, 공동체는 급격히 흔들렸습니다. 일부 부족들은 메디나의 권위에 복종을 거부하며 낙타 바치기를 중단했고, 이는 배교 전쟁(리다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그의 후계자인 아부 바크르는 이 위기 속에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이처럼 무함마드는 종교적 계시를 통해 신앙의 기초를 마련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지도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창출하고, 언어적 권위를 바탕으로 아랍성을 재정의하며, 사후에도 계승 문제와 갈등 속에서 이슬람 공동체가 지속될 수 있는 기틀을 남겼던 인물로 평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