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 역사의 쇠퇴기를 900년부터 1350년까지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아랍 제국의 정치적 중심이 붕괴하고, 아랍인들이 정치적 통제력을 상실했으며, 지적·문화적 역동성이 크게 위축된 시기였습니다. 이는 곧 중세 이슬람 제국의 황금기가 끝났음을 의미하였고, 이후 근세에 해당하는 ‘긴 일식(The Long Eclipse)’ 시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19세기 재각성(Nahdah) 전까지 아랍 세계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1. 중세 쇠퇴기의 시작: 아랍 정치 지배력의 상실 (900–1350년)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아랍 민족이 정치적 주권을 잃고 중앙 칼리프제가 사실상 와해되었다는 점입니다.
- 투르크 용병의 지배: 칼리프의 권력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고용된 투르크 노예 군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938년 투르크 장군 바즈캄은 자신의 무장 초상과 “알아라! 모든 권력은 허상, 나의 권력은 진실, 나는 아미르, 위대한 인간의 군주, 바즈캄!”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거대한 메달리온 주화를 발행하였고, 이는 칼리프의 권위를 조롱하는 상징이었습니다.
- 칼리프의 명목상 지위: 칼리프 알-라디는 이러한 굴욕적인 상황을 보고 침울해했으며, 이후 부와이 왕조와 같은 이민족 세력이 바그다드를 지배하면서 칼리프는 ‘알-무티(순종하는 자)’와 같은 이름처럼 명목상의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 내부 혼란: 칼리프들은 폭력 속에 몰락했습니다. 알-무타끼는 눈이 멀었고, 알-무스탁피 역시 이란계 산악인에게 폐위되며 시력을 잃었습니다.
2. 문화적·지적 위축과 정체성 분열
정치적 쇠퇴는 곧 문화와 지적 영역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 지적 경직성: 무으타질라 학파 논쟁이 이단으로 금지되고, 꾸란이 창조된 책이라는 사상이 배척되면서 타끌리드(모방)가 강조되었습니다. 이즈티하드(독립적 해석 노력)의 문은 닫혔고, 사고의 발전은 정체되었습니다.
- 문학적 쇠퇴: 아랍어는 활력을 잃었으며, 시문학은 독창성을 상실하고 반복적 비유에 머물렀습니다. 이 시기는 ‘문학적 쇠퇴의 시대’로 불렸습니다.
- 슈우비야 운동: 비아랍 엘리트들, 특히 페르시아인들은 아랍인들을 미개한 유목민으로 조롱하며 문화적 우월성에 도전했습니다.
3. 문화적 지속성과 새로운 중심 (근세로의 이행)
몽골의 침략으로 바그다드가 파괴되는 대재앙에도 불구하고, 아랍 문화는 새로운 중심을 통해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 언어 보존: 셀주크 투르크 재상 니잠 알-물크가 설립한 니자미야 마드라사는 아랍어와 이슬람 학문을 지켜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새로운 문화 중심지: 카이로와 코르도바는 아랍 문화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했습니다. 맘루크 통치기의 카이로에서는 그림자 인형극과 『천일야화』가 발전하였습니다.
- 해양을 통한 확산: 아랍의 정치적 권위는 쇠락했지만, 상인과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해 아랍 문화는 인도양 무역로를 따라 확산되었습니다.
- 용어의 회귀: 제국 확장기에는 모든 무슬림을 뜻했던 ‘아랍’이라는 용어가 다시 원래의 의미인 ‘주변의 부족 소수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돌아갔습니다.
결론
아랍 역사의 쇠퇴기는 중세 후반의 정치적 붕괴와 근세의 긴 정체를 이어주는 전환점이었습니다. 아랍인들은 정치적 주도권을 상실했지만, 아랍어와 이슬람 학문 전통은 외부 왕조의 후원을 통해 이어졌습니다. 이는 19세기 나흐다를 가능케 한 언어적·문화적 기반으로 남았으며, 이븐 할둔이 예멘의 산성에서 부족과 왕조의 끝없는 전쟁을 관찰하며 역사 철학을 세웠듯, 이 시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항상 존재하는 과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