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0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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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스쿠스(Damascus)를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의 수도로 삼은 것은 단순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아랍 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문명적 전환을 가속화한 결정적인 지리적 선택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아라비아 반도와 비잔틴·로마 문명권의 경계에 위치하여, 전통적인 유목 사회와 정착 문명, 이슬람적 이데올로기와 비잔틴적 행정 유산을 통합하는 핵심 거점으로 기능하였습니다.

1. 지리적 접경지로서의 의미

다마스쿠스는 북부 비옥 초승달 지대에 자리하며, 아라비아에서 지중해와 소아시아로 진출하는 중요한 관문이었습니다. 이는 아랍 제국이 단순히 부족적 세력에 머무르지 않고, 문명 간의 경계 지대에서 새로운 정치적 중심지를 세우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무아위야(Mu’awiyah)가 비잔틴 제국의 가산 왕조(Ghassanid)의 기반 위에 우마이야 왕조를 출범시킨 것은, 다마스쿠스가 이미 교역·행정·군사적으로 정비된 중심지였음을 보여줍니다.

2. 정치적 수도로서의 다마스쿠스

661년 무아위야가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정하면서, 이 도시는 ‘다마스쿠스 왕국’이라 불릴 만큼 아랍 제국의 세속적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무아위야의 통치는 종교적 지도자라기보다는 제국적 행정가에 가까웠으며, 이를 통해 아랍 제국은 종교 공동체(움마, ummah)의 틀에서 세속적 국가의 성격으로 변모해 갔습니다. 이는 무함마드의 성공 방식을 일정 부분 계승하되, 정착 사회의 제도적 기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었습니다.

3. 행정·문화적 변혁의 장

다마스쿠스에서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개혁은 압둘 말릭(Abd al-Malik) 시대의 ‘아랍어화’(arabicization)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언어 정책을 넘어, 아랍어를 행정·학문·문명의 언어로 정착시키는 혁신적 조치였습니다.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에 의존하던 기록 체계가 아랍어로 대체되면서, 아랍 제국은 자국의 언어를 통치와 문화의 중심에 세웠습니다. 또한 새롭게 발행된 아랍어 주화는 경제적·문화적 자립성을 강화하며, 지속 가능한 아랍 문화를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4. 문명 융합의 공간

다마스쿠스는 비잔틴과 로마 문명의 유산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습니다. 건축 양식에서 아칸투스 기둥머리와 같은 고전적 모티프가 사용되었고, 이교도와 기독교 건축물의 자재가 재활용되어 이슬람 건축에 통합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기존 문명과의 연속성을 확보하면서도 새로운 이슬람 문명의 정체성을 창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마스쿠스는 따라서 정복자가 기존 세계를 부정하는 대신, 그것을 흡수하고 재구성하는 전략적 수도였습니다.

5. 분열과 몰락의 단초

그러나 다마스쿠스의 정치적 중심성은 동시에 내부 분열의 무대이기도 했습니다. 북부와 남부 부족의 갈등, 종족적 경쟁은 우마이야 왕조 내부의 균열을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불안정성은 결국 압바스 혁명(Abbasid revolution)의 성공을 초래했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습니다. 다마스쿠스가 번영의 중심이자 동시에 몰락의 배경이 된 것은, 제국의 수도로서 지닌 이중적 운명을 잘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다마스쿠스는 우마이야 왕조가 유목적 기반에서 벗어나 정착 문명으로 나아가게 한 정치적·문화적 발판이자, 아랍 제국이 세계적 문명과 접속하는 거대한 문명 교차로였습니다. 그곳에서 이뤄진 언어·행정·문화적 변혁은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아랍 문명의 토대를 마련했으나, 동시에 부족적 균열을 해결하지 못한 채 몰락의 씨앗도 함께 안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