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랍 역사의 거대한 순환 속에서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루어낸 이슬람 초기의 통일은, 이전 시대의 깊은 부족 분열을 잠시나마 극복하고 새로운 형태의 집단 결속력을 창조한 혁명적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통일은 탄생과 동시에 해체의 운명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이는 아랍 역사 전반을 관통하는 통일과 분열의 순환적 본질을 드러냅니다.
I. 언어와 종교를 통한 통일의 기반 구축
무함마드가 세운 통일은 언어적이면서 신학적인 기반 위에 형성되었으며, 이는 이슬람 이전 부족 중심의 느슨한 연합과는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무함마드는 고급 아랍어를 중심으로 한 ’arabiyyah의 언어적 힘을 통해 부족 간의 분열을 극복하고 강력한 집단 결속력(’asabiyyah)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메시지인 꾸란은 언어의 정수로 표현되었고, 이 언어를 가장 깊이 이해하는 부족 아랍인들에게 향했습니다.
그가 제시한 통일의 모델은 단순한 신앙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의 통치체와 하나의 신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신학적 일체성을 추구했습니다. 꾸란의 “알라의 끈(habl Allah)”이라는 개념은 고대 사바 문명에서 존재하던 ‘신성한 조약(hbl)’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보이며, 언어와 신앙을 매개로 한 새로운 사회계약의 형태로 작용했습니다.
무함마드는 또한 기존 부족 연대의 한계를 넘어 초부족적 공동체인 움마(ummah)를 창설했습니다. 그는 정착민 사회(hadar)의 조직력과 유목민 사회(badw)의 전투적 역동성을 결합하여, 정치적 공동체이자 신앙 공동체로서의 초기 이슬람 국가를 완성했습니다.
II. 내재된 이중성과의 갈등: 분열의 씨앗
그러나 무함마드가 세운 통일은 아랍 사회에 깊게 뿌리내린 이중성, 즉 정착과 유목, 집합과 분열의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했습니다.
유목민(a’rab)에 대한 꾸란의 언급은 이러한 긴장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꾸란은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는 믿는 자이다’ 하거든, ‘아니다. 너희는 단지 복종했을 뿐이다. 믿음은 아직 너희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라”는 구절을 통해, 정치적 복종(islam)과 진정한 신앙(iman)의 간극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는 무함마드의 통일이 신앙보다는 복종의 체계 위에 놓여 있었음을 시사합니다.
또한 당시의 약탈 전쟁(ghazw)은 여전히 유목적 생활양식의 일부로 남아 있었습니다. 무함마드는 메디나 국가를 세운 이후에도 국경을 넘어 무력 습격을 감행했으며, 이는 통일된 국가의 확장 동력이 되었지만 동시에 이슬람 이전의 관습이 잔존함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III. 통일의 붕괴와 순환의 재개
무함마드 사후, 아라비아 반도는 곧 분열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습니다.
배교 전쟁(Riddah)은 이러한 붕괴의 상징이었습니다. 무함마드가 세운 정치적·종교적 질서가 사라지자, 각 부족은 메디나에 대한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독자적인 자치권을 주장했습니다. 이는 통일이 신앙보다는 정치적 복종 위에 세워졌음을 다시금 드러냈습니다.
이 시기에는 무사일리마(Musaylimah), 알 아스와드 알 안시(al-Aswad al-’Ansi) 등 자칭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무함마드의 권위를 모방했습니다. 이는 종교적 권위의 근원이 흔들릴 때, 곧바로 분열과 혼란이 뒤따름을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아부 바크르는 국가의 존립을 건 전쟁, 즉 리다 전쟁(Riddah wars)을 치르며 통일의 명맥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아랍 사회의 분열적 본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우마이야 왕조의 북부·남부 부족 간 갈등,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등은 모두 이 초기의 내적 균열에서 비롯된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무함마드는 언어와 신앙을 바탕으로 부족 중심의 분열을 극복하고 정착 문명으로의 전환을 이끌었으나, 아랍 사회의 근저에 자리한 유목적 분열의 힘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습니다. 그의 통일은 찰나의 조화였으며, 그의 사후 곧바로 재개된 분열의 순환은 아랍 역사의 본질적 리듬이자 영속적인 주제임을 보여주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