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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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제국의 확장 이후 되풀이된 내부 갈등은 아랍 역사의 근본적 구조라 할 수 있는 ‘통일과 분열의 순환(The Wheel and The Hourglass)’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현상입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카리스마와 이슬람이 창출한 새로운 종교적 결속력(’asabiyyah)은 한때 아랍 사회를 통합했으나, 제국의 팽창과 함께 부와 권력이 집중되자 이슬람 이전 시대의 고질적인 부족 분열(fitnah)과 정치·군사적 갈등이 다시금 고개를 들었습니다. 결국 통일은 덧없는 일시적 현상으로 드러났고, 아랍 세계는 반복되는 분열의 수레바퀴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I. 통일의 취약성과 제국 형성 초기의 분열 (제1차 피트나)

무함마드 사후, 제국이 급속히 확장되는 동안 통일은 이미 정치적 불안정의 씨앗을 품고 있었습니다.

첫째, 배교 전쟁(Riddah)은 공동체(ummah)의 취약한 기반을 드러냈습니다. 많은 부족들이 메디나에 세금을 내는 것을 거부하고 독립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종교적 신념(iman)보다는 정치적 복종(islam)에 머물렀던 유목민(a’rab)의 불안정한 충성심을 상징했습니다.

둘째, 권력 승계 문제는 곧 내전으로 번졌습니다. 제3대 칼리프 우스만(Uthman)은 친족 중심의 통치를 통해 평등주의 이상을 훼손했고, 그 결과 알리(Ali)와 무아위야(Mu’awiyah) 간의 시핀이 벌어져 아랍 세계를 다시 피로 물들였습니다.

셋째, 661년 무아위야가 권력을 장악한 해가 ‘통일의 해(’Am al-Jama’ah)’로 불렸다는 사실은 당시 통일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상징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II. 우마이야 왕조의 부족주의적 분열 관리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우마이야 왕조는 이슬람 이전부터 존재한 부족 갈등 구조를 제국 통치의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첫째, 부족 파벌의 이용이 대표적이었습니다. 왕조는 정착민(hadar)과 유목민(badw) 간, 북부와 남부 부족 간의 경쟁을 조장하여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초기에는 효과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호라산 지역의 불안과 내부 반란을 낳아 결국 왕조 몰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둘째, 종파적 갈등은 알리의 아들 알 후세인(al-Husayn)의 순교로 심화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시아파의 정체성을 굳히는 상징이 되었고, 이후 아랍 사회의 분열을 영구화했습니다.

셋째, 잔혹한 통치와 폭력적 억압은 분열을 잠재우는 대신 더욱 깊게 만들었습니다. 총독 알하지즈 이븐 유수프(al-Hajjaj ibn Yusuf)는 이라크 반란을 진압하며 수만 명을 학살했고, 제국의 통합은 피와 공포 위에 세워졌습니다.

III. 압바스 왕조의 붕괴와 군사력에 의한 분열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 중심주의를 거부하고 등장한 압바스 왕조 또한 곧 내부 통제력을 상실하며 같은 순환의 함정에 빠졌습니다.

첫째, 비아랍 군사세력의 부상이 치명적이었습니다. 9세기 이후 튀르크계 맘루크(노예 병사)들이 실질적 권력을 장악하였고, 칼리프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퇴위당하거나 시력을 잃거나 살해당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둘째, 아랍 정체성의 몰락이 뒤따랐습니다. 10세기 칼리프 알라디(al-Radi)가 튀르크 장군 바즈캄(Bajkam)에게 실권을 빼앗기고, 그의 얼굴이 새겨진 주화가 발행된 사건은 아랍 통치의 종말을 상징했습니다. 이븐 할둔의 통찰처럼, 비아랍 세력이 주도하는 곳에서 문명은 쇠퇴했습니다.

결론: 순환 속의 지속적 부족 갈등

아랍 제국의 역사는 언어적 통일성(’arabiyyah)을 유지하면서도 정치적 분열(qabilah 대 sha’b)을 반복하는 순환의 역사로 요약됩니다. 제국이 가장 번성했을 때조차 그 내부에서는 이미 해체의 씨앗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예멘 내전과 시리아 분쟁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갈등은, 고대 부족 간 분열과 내전(fitnah)의 전통이 여전히 ‘영원히 현재하는 과거(ever-present past)’로서 아랍 세계의 운명을 규정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