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쉽지 않은 삶이 이어지고 굴곡이 커질수록 ‘오늘을 즐겨라!’ 또는 ‘오늘만 존재하는 날이다!’ 하면서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현재의 삶이 왜 중요하고 집중해야 하는지로 대화가 마무리되곤 합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문장은 ‘까르페 디엠(Carpe diem)’입니다. 이 라틴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Seize the day(오늘을 잡아라)’입니다. 《Seize the day》는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상자인 캐나다 출신 미국 작가 솔 벨로(Saul Bellow, 1915~2005)가 1965년에 쓴 짧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에는 “과거는 아무 소용이 없어. 미래는 불안으로 가득 차 있지. 오직 현재만이 실재하는 거야. 바로 지금, 오늘을 잡아야 해.”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씨즈 더 데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빈 윌리엄스(키팅 선생님) 주연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도 ‘Seize the day’의 뜻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때와 계절과 상관없이 고전영화가 되어버린 피터 위어 감독의 1989년 작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는 전통과 규율을 강조하는 명문 웰튼 고등학교에 새로 부임한 문학교사 키팅 선생님의 등장으로 시작됩니다. 그가 대면한 이 학교의 학생들은 자기 소질을 잊어버린 채 부모에 의사, 변호사로의 인생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키팅 선생님은 이 학생들이 묶여 있는 틀을 깨고 꿈을 찾아주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학생들은 키팅 선생님을 따르고 미래를 위해서 정해진 길을 따라가기보다는, 현재를 즐기라는 선생님의 역설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단어가 되며 자신들이 잊고 지내던 것들을 하나둘씩 찾을 수 있게 해 줍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숲속 동굴에 모여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비밀클럽을 조직하고 시(詩)를 낭송합니다. 하지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극공연을 했던 닐이 권총으로 스스로를 결정하면서 이들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합니다. 학교는 닐의 결정 배후에 키팅 선생님이 있다고 지목하면서 웰튼에서 추방합니다.
꽉 막친 답답함, 그리고 저항과 도전, 그리고 혁명. 이러한 주제라면 베토벤의 음악들이 어울립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곳곳에는 베토벤의 음악이 포진해 있습니다. 대표적인 ‘환희의 송가’가 있는 9번 교향곡 〈합창〉뿐만 아니라,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이 뒤를 잇습니다. 바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Piano Concerto No. 5 in E flat major, op 73 〈Emperor〉》
나폴레옹이 빈을 점령하던 혼란의 시대에 완성한 걸작입니다. 베토벤 자신이 제목을 붙이진 않았지만, 악상이 화려하고 장대하며 숭고하다고 해서 〈황제〉라는 별칭이 붙여진 이 곡은 그의 교향곡 3번 〈영웅〉과 함께 대표적 정치적인 작품입니다.
널리 알려진 대로 베토벤은 한때 나폴레옹을 ‘혁명’의 실현자로 크게 흠모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혁명의 정신을 저버리고 ‘황제’로 등극하자, 실망한 나머지 “야망만 채우는 폭군이 되겠군”하면서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했던 〈영웅〉교향곡 원고를 찢어버렸습니다. 나폴레옹에 대한 베토벤의 흠모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피아노 협주곡 〈황제〉역시 나폴레옹과 인연이 깊은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탄생할 무렵이던 1808년. 나폴레옹의 세 번째 동생인 제롬 보나파트가 베토벤에게 일생 연금을 지불하겠다는 조건으로 독일 궁정악장에 초빙하겠다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빈의 귀족들의 부랴부랴 베토벤을 떠나지 않도록 연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덕택으로 베토벤은 사랑하는 도시 빈에 머무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듬에 나폴레옹 군대가 빈을 침공하면서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집니다. 물론 약속했던 연 4000 플로린의 연금 지급 약속도 무산되면서, 경제적인 궁핍은 극에 달했고, 신변도 불안했으며, 전쟁 소음으로 청력은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베토벤이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 바로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후원자이자 제자인 루돌프공을 위해 작곡한 〈고별 〉이라고 알려진 《피아노 소나타 26번 op. 81a》그리고 《피아노 협주곡 5번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73〈황제〉Piano Concerto No. 5 in E flat major, op 73 〈Emperor〉》입니다. 추앙하던 나폴레옹의 침략. 아름다운 빈의 황폐해진 모습을 바라보는 베토벤의 마음은 그 얼마나 착잡했을까요? 분노하기엔 너무 늦은 만큼…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5번 내림마장조, 작품번호 73 〈황제〉
L V Beethoven: Piano Concerto No. 5 in E flat major, op 73 〈Emperor〉
베토벤은 민중의 해방자를 자처했다가 황제가 된 나폴레옹을 위선자라고 비난하면서 몹시 싫어했기 때문에 이 작품이 황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다만 이 곡의 큰 규모와 화려한 피아니즘 및 곡 전체에 흐르는 남성적이고 영웅적인 분위기가 ‘황제’라는 별명과 나름 어울리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언젠가부터 출판업자들이 황제라는 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현재에도 이 별명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황제〉는 그러한 상황에서 태어난 작품입니다. 어둡고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현실이지만 그렇다고 절대 주저앉을 수 없는 베토벤의 강인한 투지가 다시금 솟구치는 음악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기약할 순 없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진정한 혁명’을 향한 간절함이 얹혀있는 선율로 말입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마지막 장면. 웰튼에서 추방당해 떠나는 키팅 선생님을 바라보던 학생들은 권위와 압박의 상징을 ‘책상’ 위에 올라가 “캡틴, 마이 캡틴”을 외치며 눈물의 작별을 고합니다.
‘내 마음혹의 동굴을 찾아 떠나라.
현실과 만날 때 영혼은 언제나 죽어가는 것이다.
현실의 높은 울타리를 넘어 내 마음 속 동굴을 찾아 영혼을 적셔라’
베토벤 역시 살아있다면 그런 인사를 보냈을 것입니다. 외로웠던 자신의 일생을 이해하고, 그의 음악을 사랑해주는 후대 사람들에게. 그리고 당부할 것입니다. 실에 안주하거나 굴복하지 말고 ‘끊임없이 일어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