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라스베이거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첨단 기술을 현장에서 배우고자 ‘컴덱스(Comdex)’라는 이름의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출장길에 올랐습니다. 멀찍이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리눅스의 개발자인 리누스 토발스, HP의 회장 컬러 피오리나 등 유명 인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타지에서 영어에 서툰 타사 출신 출장자 넷은 바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컴덱스 행사가 진행된 라스베이거스는 공항 곳곳에 슬롯머신이 자리를 잡아 ‘도박이 건전한 놀이’라는 것을 중독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공항뿐만 아니라, 대부분 호텔의 로비는 온통 도박장이었습니다. 본래 의도에도 맞지 않고, 도박에 대한 실행 경험이 짧고 소심했던 우리는 $5 정도씩 25센트 동전으로 바꾸어 호텔 로비 ‘슬롯머신’ 앞에 A, B, C, D 넷이 서로 멀리 흩어져 앉아 ‘당기는 게임’을 시도했습니다.
혹시나 슬롯머신 위에 번쩍이는 전광판에는 7-7-7이 한꺼번에 나오면 잭팟(Jack-pod)이 터졌다고 환호하면서 거지였던 주인공이 부자가 되는 영화 속에 나오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행운이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A, B, C 셋 모두는 채 10분을 넘기지 못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주머니에 있던 동전들은 모두 슬롯머신에 먹힌 채로 체념했습니다. ‘다시는 안 한다.’ A, B, C의 공통된 감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다른 한 친구 D의 자리에선 듣어본 적이 없는 동전이 폭포처럼 쏟아지는 소리가 났습니다. 잭팟은 아니지만, 그 친구 D의 슬롯머신 화면은 ‘체리와 과일’이 연속 나타나는 그림이 보였습니다. 두세 번 ‘잭팟’을 기대하며 ‘베팅’을 시도했지만, 당시로서는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25센트 동전 세례를 받았으니, 즉시 ‘종이돈’으로 교환을 했습니다. 기억으로는 어림잡아 $500 정도였습니다. 적지 않은 돈이었고,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따자마자 떠나는 배짱’이 아주 현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억이 선명한 것은 그 친구 D는 지폐로 바꾼 돈을 가지고 명품점으로 데리고 가 우리 A, B, C에게 ‘$100짜리 넥타이’를 하나씩 선물로 사주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한국에선 기성 양복 한 벌 값이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선물을 사주었을까?’ 어리둥절 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친구 D는 슬롯머신에서 딴 돈에 환전해 왔던 돈을 더해서 대담하게 지갑과 벨트를 샀습니다. 족히 $7~800을 그 매장에서 샀던 것 같았습니다.
당시에는 해외 출장이 흔치 않아서 다녀오게 되면 직장 상사에게는 고급 양주 한 병, 그 밑의 선배에게는 면세 담배, 그리고 동료에게는 파카 볼펜 정도는 사와야 하는 관례가 있었고, 초콜릿 몇 상자는 회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주변 부서 직원들에게 ‘해외 출장 맛’을 나누어야 뒷소리를 듣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 관행적 선물 때문에 해외 출장은 적자가 되기 일쑤였기에 사사로운 욕심을 부릴 수 없었습니다.
귀국길 비행기에서 친구 D는 우리 A, B, C에게 $50씩 빌려서 직원들 선물을 빼먹었다며 ‘볼펜’을 사 담았습니다. 아마 D는 도박에서 딴 돈을 처음 본 다른 회사 출장자 A, B, C에게 선심으로 써버린 태도가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돈은 어떻게 얻었든 모두 똑같이 생각해야 하는데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돈을 어떻게 생각하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식으로 다룹니다. 돈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옷을 휘감고 나타납니다.
질문을 한 가지 드려봅니다. 당신은 1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모았습니다. 연말이 되니 당신의 계좌에는 연초보다 1천만 원이 더 들어와 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1) 돈은 모두 안전한 은행 계좌에 넣어 둔다. 2) 돈을 펀드에 투자한다. 3) 돈을 낡은 자동차 교체 비용에 사용한다. 4) 돈을 호화 해외여행을 위해서 쓴다.
만약에 당신이 대다수의 사람처럼 생각한다면 1)이나, 2) 또는 3)으로 결정할 것입니다.
다른 질문입니다. 당신은 1천 원짜리 복권에 당첨되었습니다. 당신은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1) 돈은 모두 안전한 은행 계좌에 넣어 둔다. 2) 돈을 펀드에 투자한다. 3) 돈을 낡은 자동차 교체 비용에 사용한다. 4) 돈을 호화 해외여행을 위해서 쓴다.
아마도 당신을 비롯한 대다수의 사람은 이제 3)이나 4)를 선택할 것입니다. 그리고 선택이 달라짐으로써 생각의 오류가 있음을 자인하게 됩니다. 어떤 경우라도 1천만 원이 생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1천만 원은 어쨌거나 1천만 원인데도 선택은 달라졌습니다.
우리는 도박으로 얻은 돈, 상속받은 돈은 자기 스스로 일해서 번 돈보다 더 가볍게 취급합니다. 201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경제학자 리처드 탈러(Richard H. Thaler)는 이러한 현상을 ‘하우스 머니 효과(House Money Effect)’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쉽게 얻었거나 예상치 않게 들어온 돈은 아껴 쓰지 않고 위험부담이 큰 계획이나 자산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즉 투기로 혹은 우연히 얻은 이익은 소비에 관대해지거나 위험성을 감당할 용의가 커진다는 것입니다. ‘쉽게 번 돈은 쉽게 쓴다’는 속설을 이론적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퇴직이 급증하면서 시중에 ‘퇴직금’이 태산처럼 쌓여가니 ‘시니어 비즈니스의 황금기’는 ‘바로 오늘, 현재’라고 대서특필로 홍보성 기사를 쏟아내는 것을 목격하곤 합니다.
‘퇴직금’ 또는 ‘연금’은 ‘하우스 머니 효과’의 정반대인 ‘소유 효과(Endowment Effect)’에 속하는 돈입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는 심리적 현상’을 의미합니다. ‘호화 해외여행을 매월 떠나는 시니어를 알고 계신다면, 아마도 그 분은 재벌이거나 물려받은 재산이 많은 분’이기 쉽상입니다.
돈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옷을 휘감고 나타납니다.
그 감정에 따라 ‘하우스 머니 효과’와 ‘소유 효과’로 갈리어서 행동하게 됩니다. 시니어가 은퇴하면서 품에 안고 있는 돈은 ‘소유 효과’라는 것을 아셔야 사업의 헛다리를 짚지 않으실 것입니다. 퇴직금을 펑펑 쓰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