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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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슬람 시대의 초기 유목민 부족인 ‘아랍(ʿarab)’의 출현은 단순한 민족 이동의 결과가 아니라, 언어·문화·정치·종교가 얽힌 복합적인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선, 외부인의 시각에서 아랍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853년 아시리아 왕 살만에세르 3세가 남긴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가 사용한 ‘아리비(Aribi)’라는 명칭은 사막 깊숙이 거주하며 감독이나 지배로부터 벗어나 있던 사람들을 가리켰고, 특히 낙타를 소유한 집단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러한 외부 기록은 아랍을 ‘정착 사회와는 다른 유목적 정체성’을 지닌 집단으로 규정하는 단초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아랍 부족은 낙타 사육과 목초지 탐색, 낙타 운송업 등을 기반으로 한 공유된 유목 생활을 이어갔으며, 이는 그들 사이에 문화적 동질성을 형성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부족 이름이 ‘칼브(개)’, ‘아사드(사자)’ 등 동물에서 유래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토템적 성격과 전투적 가치관을 드러내는 요소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언어적 기원 또한 중요합니다. 아랍어는 셈족어군 가운데 ‘북아라비아 방언 묶음’에서 유래했으며, 사파이트어·타무드어와 같은 다양한 낙서 언어가 그 증거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초기 기록은 이름과 족보 중심의 내용이었으나, 점차 1세기 이후에는 아람어 문서 속에 아랍어 표현이 등장하면서 독자적 언어 정체성이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슬람 이전 수세기 동안 예언과 시를 통해 사용된 ‘고급 아랍어’는 구어체가 아니라 방언 요소를 종합해 정형화된 언어적 틀을 형성했으며, 이는 문화적 구심점으로 기능했습니다.

정착 사회와의 관계 또한 아랍인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이었습니다. 유목민과 정착민은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었고, 아시리아 제국이 아랍인들을 운송업자로 활용한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줍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남아라비아 지역의 정착민들마저 점차 아랍화되었고, 9세기 알-자히즈는 아랍인을 “언어, 기질, 가치에서 하나”라고 묘사할 정도로 통합적 정체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외부 제국의 시선도 아랍인의 내부 응집을 강화했습니다. 로마와 페르시아는 아랍을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했고, 4세기 이므루 알-카이스가 ‘모든 아랍인의 왕’으로 불린 사례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시와 구전 전통은 이러한 정체성 강화에 핵심적이었는데, 시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역사와 지혜, 명예를 기록하는 수단이었고, 부족 간의 소통과 정체성 공유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다신교적 성격과 함께 유일신을 추구하는 흐름이 공존했습니다. 메카의 카바 신전은 다신 숭배의 중심이었으나, 하니프라 불린 소수의 유일신 신앙인들은 무함마드의 메시지와 유사한 경건성을 지녔습니다. 또한 남아라비아의 사바 왕국은 특정 신 숭배를 통해 정치적 통일을 유지했는데, 이는 훗날 이슬람의 종교적 통합 사상과 연결될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종합하면, ‘아랍’의 출현은 단순한 혈통적 개념이 아니라 언어적 다양성 속에서 ‘고급 아랍어’라는 문화적 끈을 중심으로 응집하고, 정착 사회와 유목 사회의 상호작용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며, 외부 제국의 시각을 통해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다층적 과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은 이슬람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