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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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이슬람 시대는 아라비아반도에서 부족 간의 분쟁과 통일 시도가 공존하던 시기로, 정착민 사회(hadari)와 유목민 사회(badawi)의 이중성이 뚜렷하게 드러났던 시기였습니다. 이때 여러 도시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문화, 경제, 정치적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며 아랍 문명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우선 페트라(Petra)는 나바테아인의 수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나바테아인들은 뛰어난 물 관리 기술을 바탕으로 장엄한 무덤들을 건설했으며, 무역의 중개인으로 활동하며 인도의 향신료와 같은 사치품을 북쪽으로 운송했습니다. 페트라는 기원후 106년에 로마 제국에 합병되었고, 이는 아라비아 무역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또한 나바테아인들은 아랍어의 한 형태를 구사했으며, 그들의 문자인 나바테아 문자는 초기 아랍 문자의 선구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페트라는 무역과 정착 생활을 통해 번성한 북부 아라비아의 대표적 중심지였습니다.

알 히라(Al-Hirah)는 이름 자체가 시리아어 ‘hirta’에서 비롯된 것으로 “야영지”라는 뜻을 지니며, 이는 이곳이 준유목민 사회에 적합한 장소였음을 보여줍니다. 이 도시는 문화가 교차하는 경계 지역으로, 락흐미드 왕조의 통치 아래 페르시아와 비잔틴의 영향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왕권의 상징인 ‘왕관(taj)’은 페르시아에서 유래했으며, 종교적으로는 네스토리우스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알 히라는 유목과 정착의 생활양식이 융합된 공간으로, 아랍어를 구사하면서도 시리아어와 나바테아 문자를 기록에 사용했습니다. 또한 무역과 약탈 활동 모두에 참여하며 지역의 정치적 갈등에 중심적으로 관여했는데, 특히 7세기 초 사산조 페르시아에 맞선 두 카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예루살렘(Jerusalem)은 자료에서 지도상에 여러 차례 언급되었으나, 선이슬람 시대의 정치적·문화적 세부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부족합니다. 다만 메카의 카바에 예수와 마리아의 이미지가 있었다는 기록이나 주변 지역에서 기독교의 존재가 드러나는 간접적 언급이 있을 뿐입니다.

담맘(Dammam)의 경우 선이슬람 시대와 관련된 어떠한 직접적 정보도 자료에서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언급은 현대 산업 시설인 다흐란(Dhahran)에 관한 내용으로, 이는 고대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종합하면, 페트라와 알 히라는 아랍 사회가 단순히 유목 부족 중심의 체계가 아니라 무역과 농업을 기반으로 한 정착 문명도 이미 번성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페트라는 무역의 중심지였고, 알 히라는 문화와 종교, 정치가 교차한 복합적인 중심지였습니다. 이 두 도시는 아랍어 사용과 더불어 다양한 문자가 공존했던 시대적 배경을 증명하며, 이슬람 통일 이전에도 아라비아반도가 이미 다층적이고 복잡한 사회 구조를 이루고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반면 예루살렘과 담맘은 자료에서 제한적인 정보만 제공되어, 이 시기의 도시 경관을 이해하는 데 보조적인 참고점으로만 작용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