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8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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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긴 호흡으로 보고 있는 책이 두 권 있습니다. 한 권은《성경 (The Bible)》이고, 또 한 권은 우리 집안의 족보(族譜)입니다.

족보 얘기가 나오면 ‘가짜 기록’을 주장하거나, 조선시대 중기부터 만들어졌기에 그 이전의 족보는 왜곡된 소설이라고 폄훼하는 고매한 분들을 만납니다. 그분들의 주장이나 형성된 역사관을 존중합니다.

족보에 ‘청보(淸譜)’와 ‘탁보(濁譜)’가 있다면서, 청보는 그 내용이 사실적인 족보이고, 탁보는 과장되고 거짓이 많은 족보, 즉 ‘가짜 족보’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의 많은 성씨들의 문중 족보를 보면 시조(始祖)가 대부분 고려시대에 등장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부 성씨는 신라·백제·고구려 시대, 심지어 삼국시대 이전인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면서, 과연 그 아득한 옛날부터 문자를 제대로 활용해 족보를 작성한 집안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지적도 대부분 족보와 관련된 일을 하거나 직함을 가진 분들이 자행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의 손자는 고조할아버지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증명하거나 가늠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지,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기록하지 않은 것을 두고, 남들이 기록한 것을 부정하거나, 남들이 기록하려는 시도를 거짓과 소설쓰기로 치부하는 것은 식자의 도리라 할 수 없습니다.

족보를 부정하는 그분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고조할아버지는 우주인이십니까?

저는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손자이기도 합니다. 고조할아버지 역시 손주인 할아버지를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고조할아버지의 아들인 저의 증조할아버지를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저의 아들(1991년생)과 고조할아버지(1904년졸) 사이? 아마도 서로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지만 혈육으로 이어진 관계를 분명하게 기록으로 연결해서 볼 수 있는 것이 족보입니다. 사실이 아니라면 어느 대까지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지 하나 하나 따져가는 일도 흥미롭지 않을까요? 어렵다고 포기하기엔 우리에게 투자한 부모님의 교육비가 너무 아깝습니다.

흥미로운 역사의 인물과 우리 조상과의 만남으로 관심을 끌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역사 인물 이순신 장군에 관한 얘기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녹둔도(鹿屯島: 조선 시대 당시 함경도 경흥부 소속으로 두만강 하구에 존재했던 퇴적토로 만들어진 섬)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여러분의 조상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선조실록(宣祖實錄) 21권 》선조 20년 12월 26일, 경진 1번째 기사 1587년, 명 만력(萬曆) 15년에 실린 내용입니다. 설마 《조선왕조실록》을 부인하지는 않겠지요?

○庚辰/北兵使李鎰馳啓, 大槪鹿屯島陷沒事。 傳曰: “觀此狀辭, 極爲慘酷痛憤。” 其書狀云: “軍官金夢虎手本內: ‘去九月二十四日, 鹿屯島接戰時, 力戰被殺人新及第吳亨、林景藩等十一人。’ 臣設壇致祭, 沐浴香水看審, 則吳亨面上橫斬, 頭項左邊橫截, 背中逢箭。 林景藩左腋中箭, 面上逢箭。 伏見鹿屯之敗, 將士軍民, 一皆風靡而束手, 就縳者幾人, 獨此吳亨等十一人, 俱以勇銳之士, 身嬰賊鋒, 抵死抗戰。 或身逢數箭, 面被刀劍, 甚至喪首攫目, 終不屈膝。 膏血(强) 場, 暴骨沙礫。 其爲奮忠死戰之義, 澟澟可想。 恤典施行。”

번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북병사(北兵使, 조선 시대에 함경도의 북병영에 두었던 병마절도사) 이일(李鎰, 1538년~1601년)이 녹둔도가 함락되었다고 치계(馳啓: 말을 달려와 보고하다)하였는데, 요약하자면 녹둔도(鹿屯島)가 함락되었다는 일이었습니다.

전교하기를, “이 서장(書狀)을 보니, 너무도 참혹스럽고 통분하옵니다.”하였습니다. 서장에 이르기를, “군관(軍官) 김몽호(金夢虎, 1557년 2월 21일~ 1637년 3월 14일)의 손으로 쓴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9월 24일(선조 20년, 김몽호가 31세 되던 해) 녹둔도의 접전(接戰)에서 힘껏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은 신급제(新及第: 과거에 새로 급제함) 오형(吳亨)과 임경번(林景藩) 등 11인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때 향수(香水)로 목욕시키며 자세히 살펴보니, 오형은 얼굴이 가로 잘리고 목덜미 왼쪽도 비스듬히 절단되었으며 등에는 화살을 맞았습니다. 임경번은 왼쪽 겨드랑이에 화살을 맞았고 얼굴에도 화살을 맞았습니다. 삼가 살피건대, 녹둔도가 함락될 적에 장사(將士)와 군민(軍民)들은 한결같이 모두 바람에 쓰러지듯 속수무책으로 잡혀간 사람이 여러 사람이었지만 오직 오형 등 11인만이 모두 용맹스럽고 날랜 군사로서 몸으로 적의 칼날을 막으며 죽을 때까지 항전(抗戰)하였습니다. 여러 대의 화살을 몸에 맞기도 하고 칼날에 얼굴이 베어지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잘리고 눈알이 뽑혔지만, 끝까지 무릎을 꿇지 아니하였습니다. 피가 전장(戰場)을 뒤덮었고 뼈가 모래와 자갈밭 위에 널렸었습니다. 그 충성을 다해 목숨을 바쳐 싸운 의거는 너무나 늠름하여 기릴 만하니, 휼전(恤典: 정부에서 이재민 등을 구제하기 위하여 내리는 특별 보상)을 내려주소서’. 하였습니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분이 김몽호가 저의 26대조이십니다.

녹둔도는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1598년 12월 16일)이 1587년(선조 20년)에 조산만호 겸 녹보둔전관 (造山萬戶兼鹿堡屯田官)으로 부임해 와 변방 여진족을 물리친 곳입니다. 오랑캐가 둔전(屯田)의 곡식이 익은 것을 보고 쳐들어와 목책(木柵)을 에워싸고 병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하자 이순신이 진(鎭)에 올라 북쪽으로 3리쯤에 있는 높은 봉우리에서 방어하며 적이 다니는 길목에 기병(奇兵)을 나누어 매복시켜 크게 승리하였으며, 후대 사람들이 그 봉우리를 승전대(勝戰臺)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는 기록이 〈녹보파호비(鹿堡破胡碑)〉를 통해 전해집니다.

뱀띠 김몽호 군관(31세, 1557년생)이 띠동갑 형님인 이순신 장군(43세, 1545년생)을 변방 끝자락 녹둔도에서 1587년 직접 만나게 됩니다. 강릉김씨 40세손인 제가 우러르는 26세손 조상님이 전장에서 역사적 인물과 같이 만나는 장면을 역사서 검증을 통해서 확인하게 되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저의 조상 김몽호는 언제 어떻게 이순신 장군을 만났을까요? 김몽호는 본관이 강릉으로 26세인 선조 15년인 1582년 2월 28일 임오(壬午) 식년시에 진사 3등(三等, 53위)으로 합격했습니다. 이 기록은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券之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혹시 동명이인은 아닐까요? 당시 합격자 신상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여 충분히 검증할 수 있습니다. 합격자 인적 사항에는 ‘부모구존 구경하(父母俱存 具慶下: 부모가 모두 살아 있어 복된 사람)’로 아버지는 김수(金銹, 품계 將仕郞: 조선시대 품계 중 30번쩨 계급으로 제일 말단 품계, 지금으로 보면 9급 공무원 수준), 처부(妻父) 장민(張旻), 안행(雁行: 남자의 형제를 높인 말) 형(兄) 김응호(金應虎) 제(弟) 김경호(金景虎), 제(弟) 김의호(金義虎)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심지어 1, 2차 시험관의 이름도 남아있습니다. 당시의 기록수준을 교차검증하면 더더욱 놀라지 않을 수밖에 없을 정도의 완벽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튼 당시 김몽호는 1582년 임오사마시에 합격 후 초임 관리가 되면 국경에서 근무하던 관례대로 그 중 하나인 두만강 끝자락인 녹둔도로 배치되어 근무하면서 1587년 이순신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족보와 실록을 엮어보면, 임진왜란이 끝난 후 동향이면서 띠동갑 후배인 허균(許筠, 1569년생)과도 광해군 7년인 1615년 5월 22일, 같은 날 사령장을 받는 장면이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90권 정묘 1번째 기사에 등장합니다. 이날 후배 허균은 동부승지(同副承旨, 정 3품)로, 김몽호는 장령(掌令, 정 4품)으로 한 단계 낮은 관직에 임명됩니다.

이분의 관직은 1582년 진사(進士)를 시작으로 전설사별좌(典設司別坐), 금오랑(金吾郞),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郞), 호조좌랑(戶曹佐郞)를 맡으셨고, 말년에는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을 비롯해서 왕세자의 교육을 맡은 세자시강원필선(世子侍講院弼善) 등의 직책을 맡으신 것이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각각 입증할 역사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위에 열거한 조상 한 분의 기록을 찾아 엮어가는 족보 편찬 작업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연결성에 방대한 자료가 엮여 있기에 아주 긴 호흡을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기록의 정리는 또 다른 ‘우리 집안 한국어 번역본 족보’가 될 것 같습니다.

족보를 들추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도 다시 익히고, 한국어로 옮기면서 앞으로 자녀들에게 전해줄 ‘집안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와 묶어 집안의 동화가 되고, 한자를 한국어로 풀어내는 일은 마치 다른 언어를 번역하는 것 같아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배우고 익히는 즐거움을 안겨줍니다.

족보를 추적하면서 갖게된 희망 여행지 중 하나가 ‘녹둔도’입니다. 왜 가보고 싶은지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족보를 아예 가짜라고 치부하거나 단편으로 정리된 내용에 한자 표기라는 장벽으로 외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편으로는 고려시대와 삼국시대의 조상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우리 개인의 역사와 가족의 존재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뿌리를 찾고, 그 뿌리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갑니다.

나와 아들이 서로 존재함을 보고 느껴서 증명할 수 있듯,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는 분명 존재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이어가며, 가족의 이야기를 만들어왔습니다. 비록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삶은 나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개인의 역사란 단순히 문서에 기록된 사실만으로 구성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억, 구술 전통, 그리고 가족 간의 관계 속에서 살아 숨쉬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역사란 거대한 사건이나 인물만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개인의 역사도 그만큼 중요합니다. 내 조상들은 그 시대의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고난과 역경을 극복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그들의 유산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꿈꿉니다.

이러한 점에서 족보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을 찾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족보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것은 나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과거의 조상들과 연결되는 경험입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나의 존재 이유를 찾는 과정입니다. 내 조상들의 존재는 나에게 힘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삶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족보가 조작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나는 나의 역사를 발견하고, 나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족보가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두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역사입니다. 나의 조상들은 나에게 귀중한 유산을 남겼고, 나는 그 유산을 바탕으로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이러한 여정을 통해 나는 내 역사를 찾아가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의, 우리 아버지의, 우리 할아버지의 역사인데, 알아보는 게 왜 두렵고 불편한 대상입니까? 비판만 할 것이 아니라 한 세대라도 찾아보기를 시도해 본다면 은퇴 후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하는 두려움이 한꺼번에 사라질 것입니다. 족보는 살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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