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一歩間違うと( いっぽまちがうと, 이뽀 마치가우토, 한 걸음만 잘못 디뎌도 — 목이 날아간다)
일본의 무사 중심 봉건 시대(1100년대 말~1868년)에는 막부(幕府)와 각 번(藩)에서 제정한 법률뿐 아니라 수많은 불문율과 관습이 존재했으며, 이들은 대단히 가혹하고 절대적인 힘으로 집행되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잘못된 행동이나 예법에 어긋난 언행은 ‘승인받지 못한 행위’로 간주되어 생명까지도 위태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도쿠가와 막부, 1603–1868)가 성립된 직후, 막부는 사무라이가 평민을 법정 심문 없이 즉시 처단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령을 제정했습니다.
이 규정을 ‘切捨御免(きりすてごめん, 키리스테 고멘)’, 즉 “베어 죽이고 ‘유감이오’ 한마디 남기고 떠난다”는 의미의 잔혹한 제도라 불렀습니다.
이후 일본 전국의 약 270개 번(藩)의 무사들이 이 관행을 따르면서, 평화로운 시대의 도시는 피로 물들게 되었습니다.
에도(江戸, 현재의 도쿄) 시내에는 전쟁이 사라져 심심해진 무사들이 새 칼을 시험하거나 검술 실력을 자랑하기 위해 행인들을 베는 사건이 빈번히 일어났습니다.
막부는 법령을 폐지하는 대신, 살인 사건을 줄이기 위해 ‘交番(こうばん, Koban)’, 즉 거리 모퉁이에 설치된 ‘치안 초소’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일본 경찰의 상징인 ‘파출소’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기리수테 고멘’ 사건은 1862년, 요코하마에 주재하던 영국 영사관 직원 세 명(남자 둘, 여자 하나)이 말을 타고 가다가 가고시마 번(薩摩藩)의 영주 행렬을 만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영국인들은 길을 비켜 내리지 않고 절하지 않았고, 이에 영주의 호위 무사들이 공격하여 남자 한 명을 즉사시키고 다른 남자를 부상시켰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영국 함대의 3일간 가고시마 폭격으로 이어졌으며, 도시의 상당 부분이 파괴되고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 이전부터 일본 사회는 이미 ‘예법을 지키는 것’이 곧 도덕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정해진 예절을 조금만 어겨도 중대한 결례로 여겨졌으며, 심각한 위반은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이처럼 일본인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 걸음의 실수(一歩間違うと, Ippo Machigau To)” 가 치명적일 수 있다는 두려움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수를 피하기 위해 말을 애매하게 돌리고, 상대를 칭찬하며, 집단 속에 묻혀 책임을 회피하고, 독창적으로 이끄는 것보다 모방하고 따르는 것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실수 공포’는 일본인의 개인적·직업적 행동양식에 깊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서구와의 비즈니스 관계에서 외국인들은 일본인들의 **‘실수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과 그로 인한 복잡한 행동 패턴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한다면, 일본의 의사결정 방식이나 신중함을 조금은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