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시(寅時) 정각. 서주분궤(西州分櫃)의 마당에는 아직 별이 남아 있었다.
시구화(施構和)는 열쇠 꾸러미를 허리에 차고 창고 앞을 달렸다. 마흔한 개의 열쇠였다. 소년은 그것들의 순서를 모두 외우고 있었다. 셋째 창고는 위에서 다섯 번째 열쇠, 일곱째 창고는 아홉 번째 열쇠, 뒤편 소금 창고만은 맨 끝의 짧고 뭉툭한 것. 아무도 시키지 않았으나 열세 살 소년은 그 순서를 외우는 것이 제 몫의 재주라 여겼다.
“구화야.”
마당 끝에서 아비 시일목(施一木)이 불렀다. 서주분궤의 대리(代理)로 삼십 년을 지낸 사람이었다.
“외우지 마라. 적어라.”
늘 같은 말이었다. 소년은 늘 같은 서운함을 느꼈다. 외울 수 있는 것을 굳이 적으라 하니, 제 재주를 인정하지 않는 말로만 들렸던 것이다. 소년은 대답 없이 자물쇠를 땄다.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새벽 마당에 맑게 울렸다.
그 시각, 천 리 밖 본궤(本櫃)에서는 한 사람이 숨을 거두고 있었다.
천년상단(千年商團)은 삼백 년을 이어온 상단이었다.
창고가 사백 칸, 지방의 분궤가 스물아홉, 거래를 트고 있는 상회가 천이백. 강남의 비단과 북방의 모피, 남해의 향료가 모두 이 상단의 수레에 실려 움직였다. 그리고 그 사백 칸과 스물아홉 곳과 천이백 상회를 오직 한 사람이 머릿속에 담고 있었다.
대총관(大總管) 기만(奇萬).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기만 어른 없이는 상단이 하루도 못 돌지.”
그 말을 하는 이도, 듣는 이도 그것을 자랑으로 여겼다. 어느 창고의 어느 물건이 언제 들어와 언제 나가는지, 어느 상회에 얼마를 깎아주기로 약조했는지, 어느 뱃길이 언제 얼어붙는지를 그는 장부를 펴보지 않고도 읊었다. 삼십 년을 그리하였다. 상단 사람들은 그것을 신묘한 재주라 불렀고, 그 재주에 기대어 잠들었다.
기만은 자시(子時)에 눕고 축시(丑時)에 갔다. 곁을 지킨 이의 말로는, 마지막에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달싹였다 한다. 그러나 아무도 알아듣지 못했다.
날이 밝자 상단이 멎었다.
먼저 창고가 열리지 않았다. 사백 칸의 열쇠는 모두 한 궤짝에 들어 있었으나, 어느 열쇠가 어느 문의 것인지 아는 자가 없었다. 열쇠에는 번호가 없었다. 기만의 머릿속에만 번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장부가 읽히지 않았다. 장부는 분명히 있었다. 삼십 년치가 서고에 가지런했다. 그러나 펼친 자들은 곧 손을 놓았다. 온통 약호(略號)였다. 동그라미 옆에 점 하나, 갈고리 옆에 빗금 둘. 기만은 제 손이 빠르도록 제 나름의 부호를 만들어 썼고, 그것을 누구에게도 풀어주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풀어달라 청하지 않았다. 어른이 알고 계시니 되었다고들 하였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오지 않았다. 그날은 강남 비단상 열한 곳에 대금을 치르는 날이었다. 그러나 누구에게 얼마를 주기로 했는지 문서에 남은 것이 없었다. 값을 깎아주기로 한 약조도, 기일을 미뤄주기로 한 약조도 모두 기만의 입으로만 오갔다.
해가 중천에 이르기 전에, 삼백 년을 굴러온 수레바퀴가 멈추어 섰다. 반나절이었다.
본궤 대청에는 세 번째 단주 천무결(千無決)이 앉아 있었다.
장로들이 다섯 가지 방책을 올렸다. 창고를 부수자는 것, 거래처에 사람을 보내 사정을 묻자는 것, 관아에 알리자는 것, 옛 장부를 처음부터 다시 맞추자는 것, 우선 대금 지급을 미루자는 것.
천무결은 다섯 장을 나란히 펴놓고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라는 평을 들었다. 서두르지 않고 두루 살핀다 하여, 아버지 대의 노신들도 그 점만은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오시(午時)에도 신중하였고 미시(未時)에도 신중하였다. 하나를 고르면 나머지 넷을 버려야 하는데, 그 넷 가운데 옳은 것이 있으면 어쩌겠는가.
신시(申時)가 되자 채권자들이 문 앞에 모였다. 처음에는 열둘이었고, 저녁에는 예순이 넘었다.
천무결은 그때까지도 다섯 장을 앞에 두고 있었다.
서주분궤에 급보가 닿은 것은 사흘 뒤였다.
시일목은 서찰을 다 읽고도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아들이 뒤에서 그 굳은 등을 보았다. 아비의 등이 그처럼 좁아 보인 적은 처음이었다.
“아버지.”
“…삼십 년을 청하였다.”
시일목의 목소리는 낮았다.
“본궤에 갈 때마다 청하였다. 어른 머릿속의 것을 종이에 옮겨 적어 두시라고. 그리하여 아랫사람도 읽게 하시라고. 그때마다 같은 대답을 들었다. 적어두면 아무나 알게 되지 않느냐고.”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구화야. 노하우(勞下雨)라는 말이 있다. 노고[勞]가 비[雨]처럼 아래[下]로 내려야 비로소 땅에 쌓인다는 뜻이다. 기만 어른은 삼십 년 동안 단 한 방울도 아래로 내리지 않으셨다.”
아비는 마당 너머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았다.
“비가 오지 않은 땅은, 구름이 걷히는 그날로 사막이 된다.”
소년은 그 말을 다 알아듣지 못하였다. 다만 제 허리춤이 문득 무겁게 느껴져 손을 내렸다. 마흔한 개의 열쇠가 손끝에 닿았다.
셋째 창고는 다섯 번째 열쇠, 일곱째 창고는 아홉 번째 열쇠, 소금 창고는 맨 끝의 뭉툭한 것.
그것을 아는 사람은 이 분궤에서 저 하나뿐이었다.
소년은 처음으로, 그것이 자랑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날 밤 삼경(三更).
닫아건 서주분궤의 대문 아래로 서찰 한 통이 소리 없이 밀려 들어왔다. 인기척은 없었다.
봉인에는 낯선 문양이 찍혀 있었다. 사람 인(人) 자를 둥글게 말아 제 꼬리를 물게 한 모양이었다.
시일목은 그 문양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등잔불을 끄지 못한 채 밤을 새웠다.
〈다음 회 예고〉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은, 없어지면 끝난다는 말 — 서찰이 내건 조건은 단 하나였다.
이 회의 강호경영어
– 기만(奇萬, key man) 없으면 안 되는 사람. 뒤집어 읽으면 기만(欺瞞)이다.
– 노하우(勞下雨, know-how) 노고[勞]가 비[雨]처럼 아래[下]로 내려야 땅에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