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제7세-김춘용-1-POST

七世 春用 官 豊州兵馬使 兼 安集監倉使 ◎ 김춘용(春用), 강릉김씨 7세손으로 아버지 김식희(式希)의 장남(長男) (式希의 長男, 次男 肯用은 戶長) 풍천(豊州) 병마사(兵馬使) 와(兼 겸) 안집(安集) 감창사(監倉使)를 지내시고 환제(還第 고향으로 돌아옴). 부친의 뒤를 이어 명주(溟州)를 다스리시다. 공(公 춘용)의 따님이 강릉(江陵) 최씨(崔氏) 필달(必達) 공(公)의 증손(曾孫) 최숭언에 출가하였다.

존경하는 강릉 김씨(江陵 金氏) 7세손 김춘용(金春用) 공(公)의 일대기

김춘용 공의 정확한 생몰 연대는 기록에서 확인이 어렵지만, 강릉 김씨 7세손이라는 점과 풍주병마사 겸 안집감창사라는 관직으로 미루어 볼 때, 대체로 고려 전기(高麗 前期), 특히 문종(文宗) 전후 시기에 활동하셨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1. 시대적 배경: 고려 전기의 지방 통치와 안정을 향한 노력

김춘용 공께서 활동하셨을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는 고려 전기, 중앙 집권 체제가 점차 확립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강화되던 때입니다. 특히 태조(太祖)가 사심관(事審官) 제도를 두어 지방 토호(土豪)들을 중앙 통제 아래 두려 했고, 성종(成宗) 이후 10도(道)와 양계(兩界) 체제가 정비되면서 지방 행정 및 군사 체계가 갖춰지고 있었습니다.

    • 정치: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지방의 군사·행정을 총괄하며, 지방 세력(향리)을 견제하는 이원적인 통치 구조가 특징이었습니다. 김춘용 공의 가문처럼 지역의 유력한 호족 출신이 중앙 관직을 받고 다시 고향의 행정을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중앙과 지방의 결합을 도모하는 고려 초기 특유의 정치적 풍경이었습니다.
    • 사회: 지방의 호족 세력은 점차 향리(鄕吏)로 편입되어 세습적인 지배층을 형성했습니다. 김춘용 공의 동생 김긍용(金肯用)이 호장(戶長)을 지냈다는 기록은, 이 시기 강릉 김씨 가문이 여전히 명주(溟州, 강릉의 옛 이름) 지역의 최고 유력 향리 가문으로서 사회적 지위를 유지했음을 보여줍니다.

2. 김춘용 공의 공직 생활: 국방과 민생을 아우르다

김춘용 공께서는 풍주병마사(豊州兵馬使) 겸 안집감창사(安集監倉使)라는 중요한 외직(外職)을 역임하셨습니다. 이 관직들은 당시 고려의 국방과 **경제(민생)**라는 두 축을 담당하는 핵심적인 자리였습니다.

(1) 풍주병마사(豊州兵馬使)

    • 병마사양계(兩界) 지역에 파견되어 군사 및 민사 행정을 총괄하던 지방 장관입니다. 풍주(豊州, 지금의 황해도 풍천)가 동계(東界)나 서계(西界) 중 어디에 속했는지에 따라 임무의 성격이 달라지나, 일반적으로 병마사는 해당 지역의 군사 통솔권민사(행정) 기능을 함께 수행했습니다.
    • 공께서는 북방의 침입에 대비하는 군사적 책임을 지셨으며, 동시에 그 지역의 일반 행정과 질서 유지까지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셨습니다. 유사시 국왕의 명령 없이도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편의종사(便宜從事)의 권한까지 행사할 수 있었던 권력의 정점에 서 계셨습니다.

 

(2) 겸 안집감창사(兼 安集監倉使)

    • **감창사(監倉使)**는 주로 **양계(兩界)**에 두었던 5~6품 관직으로, 지역의 창고와 조세를 관리하고 감독하는 경제적인 임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양계 지역으로 수송되는 군량미와 관련된 부정을 막고, **기근(饑饉) 시에는 구휼(救恤)**을 시행하여 민생을 안정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여기에 **안집(安集)**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단순히 창고 관리뿐 아니라 백성들을 편안하게 모으고 정착시키는 민생 안정의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공께서는 병마사의 군사적 능력에 더하여, 세금 면제, 구휼, 그리고 지방 관리의 비리 감찰 등 민생 안정책까지 동시에 수행하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3. 고향 명주(溟州)에서의 역할과 가문의 전통

중앙 관직인 풍주병마사 겸 안집감창사를 지내신 후 **환제(還第, 고향으로 돌아옴)**하신 김춘용 공께서는, “부친의 뒤를 이어 명주(溟州)를 다스리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공께서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단순히 은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명주 지역의 사심관이나 **실질적인 향직(鄕職)**을 맡아 지역 사회를 이끄셨음을 의미합니다.

    • 강릉 지역 사회 및 경제: 고려 초기의 강릉(명주)은 중앙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해상 교역농업을 기반으로 한 자립적인 경제 구조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공께서 다스리실 당시 명주는 농업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안정적인 조세 징수와 군량미 확보를 통해 지역 경제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데 기여하셨을 것입니다.
    • 풍속: 당시 강릉 지역은 신라의 문화와 함께 고려 초기의 새로운 통치 질서가 혼재된 풍속을 보여주었습니다. 유교적인 통치 이념이 확산되는 가운데서도 향리의 자제는 기인(其人)으로 중앙에 머물며 인질의 역할을 했고, 지역 내에서는 전통적인 **향도(香徒)**와 같은 향촌 공동체 문화가 유지되었을 것입니다.

 

4. 후대의 연결: 강릉 최씨와의 혼인

기록에 따르면, 공의 따님은 강릉 최씨(江陵 崔氏) 필달(必達) 공의 증손(曾孫) 최숭언(崔崇彦)에게 출가하셨습니다.

이 혼인은 김춘용 공 가문이 단순한 지방 토호를 넘어, 중앙 관직을 역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최고 명문 가문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했음을 보여줍니다. 당시 유력 가문들은 정략적인 혼인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결속력을 다졌으며, 강릉의 양대 유력 가문인 김씨와 최씨의 결합은 지역 사회에서 두 가문의 지위와 영향력을 더욱 확고히 하는 중대한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김춘용 공께서는 격변하는 고려 초기에 국가의 **군사(병마사)**와 **재정(감창사)**이라는 핵심 요직을 맡아 국경의 안정과 민생 구휼에 공헌하셨습니다. 또한, 고향 명주로 돌아와 부친의 뒤를 이어 지역을 다스림으로써 중앙과 지방을 잇는 명망 높은 지도자로서 강릉 김씨 가문의 영예를 드높이신 위대한 인물이셨습니다.

병마사: 고려시대 중앙군의 지휘관.

    • [고려시대중앙군지휘관]
    • [북경방위최고사령관](javascript:goSearchList(‘list’, ‘%EB%B6%81%EA%B2%BD%EB%B0%A9%EC%9C%84%EC%B5%9C%EA%B3%A0%EC%82%AC%EB%A0%B9%EA%B4%80’))

병마사에는 중앙군의 전투동원을 위해 조직된 5군(五軍)의 지휘관인 각기 중·전·후·좌·우군 병마사, 임시변통〔臨機〕으로 조직된 부대의 지휘관인 행영(行營)병마사, 사태에 따라 추가 파견된 부대의 지휘관인 가발(加發)병마사 등이 있었다.

이들은 평시에는 임명되지 않고, 비상시 군의 출동이 필요할 때 임명되었다. 이 제도는 북방의 특수지역인 동계(東界)·북계(北界)의 양계(兩界)에 각기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두어졌다. 구성은 병마사(3품) 1인, 지병마사(知兵馬事, 3품) 1인, 병마부사(兵馬副使, 4품) 2인, 병마판관(兵馬判官, 5∼6품) 3인, 병마녹사(兵馬錄事) 4인이었다.

또한 양계 병마사에는 위치가 미상인 고정적인 영(營)이 있었고, 영리(營吏)도 있었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관직의 이름이면서 관제의 이름이기도 하였다. 양계 병마사는 989년(성종 8)에 처음 설치되었고, 현종 때에는 군사적 기능 외에 행정적 기능이 추가되었다. 정종(靖宗) 초에 6개월 임기제가 정해지면서 지방제도로 확정된 것 같다.

1039년(정종 5)에 병마녹사 가운데 1원을 감축하였다. 무신란 이후에는 문반 위주였던 양계 병마사·지병마사 등에 무반출신자들이 임명되었다. 또한 양계의 방수장군(防戍將軍)에게 병마판관을 겸대하게 했다가, 1198년(신종 1)에 병마부사로 승격하였다.

이후 몽고의 침략으로 이들 지역의 대부분을 상실함으로써, 양계 병마사 제도의 존재의의가 거의 상실되었다. 1290년(충렬왕 16)의 북계 수복과 1356년(공민왕 5)의 동계 쌍성(雙城) 수복 이후 양계 병마사가 다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이들 지방에 제사(諸使)가 빈번하게 임명, 파견되는 상황이어서, 그들의 지위와 기능은 자연히 격하·약화되었다. 공민왕 때에는 왜구와 홍건적 등의 침입으로 전국이 전쟁터로 되었다. 이에 따라 1362년(공민왕 11)에 동경도(東京道) 등 12도에, 이듬해에는 안동도(安東道) 등 13도에 병마사를 파견, 병마사의 전국적인 배치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양계의 병마사는 그 명칭이 군사적 기능을 나타내고 있는 점, 강력한 지방병력이 배치된 북방 변경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점, 『고려사』 백관지의 ‘[*곤외(閫外)](javascript:void(0);)주 01)*를 전제(專制)한다’는 기록 등으로, 흔히 북경(北境) 방위사령부 및 그 최고사령관인 것으로 생각되어왔다.

그러나 제도(諸道)의 일반 지방관·안찰사(按察使) 등의 군사행동과 비교해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며, 지방장관으로서의 행정면의 기능은 명확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양계 병마사는 군사·행정 양면의 기능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병마사(兵馬使))]

감창사: (監倉使)

고려시대 양계지방에 두었던 6품 내지 7품 관직.

금석문(金石文)에는 감세사(監稅使)로 나오기도 한다. 처음 설치된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1049년(문종 3)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감창사는 춘추외산제고사(春秋外山祭告使)를 겸임하였기 때문에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정기적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일정한 임기 없이 관할지역을 순행하고 개경에 돌아와 복명(復命)해 임무를 마쳤는지, 또는 봄·가을에 파견되어 6개월이라는 일정한 기간 동안 임지에 주재했다가 후임자와 교대하는 지방관의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품직은 대개의 경우 6품직 내지 7품직이 임명되었으며, 서북계의 운중도(雲中道)·흥화도(興化道)와 동북계의 연해도(沿海道)·명주도(溟州道)·삭방도(朔方道)와 동북로(東北路) 등에 파견되었다.직무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것은 없으나, 관직의 명칭으로 미루어 볼 때 주로 창고와 조세의 관리 및 감독에 관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조세의 재면(災免), 기근의 구휼, 양계로의 군량수송과 관련된 부정을 막는 임무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방관원을 포폄해 아뢰고, 지방에서 횡포를 부리는 권세가의 처벌, 사민(徙民)을 위한 미개척지 탐사 등의 임무도 수행해 지방장관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한 일면도 보인다.

같은 지방장관으로서 감창사와 병마사는 각각 중앙과 직접 연결되어 전자는 후자에 대한 견제책으로 파악한 이원적 통치체계라는 주장과 병마사 외에 민사를 주로 하는 감창사를 설치해 이중체제를 이루고 있었으나, 병마사에 예속되는 분직원이라고 파악하는 주장이 있다.변천과 현황이러한 감창사제는 1269년(원종 10) 이후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고, 또 1270년 서경에 원나라의 동녕부(東寧府)가 설치됨으로써 고려의 양계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가 없어진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이 무렵에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감창사(監倉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