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제20세-김중상-POST

二十世 仲祥
贈折衝將軍行顯信校尉左軍中郞將知縣事之壇朝鮮朝靑野法으로鶴山祖谷에서失傳後孫들의始祖追尊宿願事業으로二○○二年壬子三月十日江陵市苧洞二十五番地에祭典設壇每三月十日祭享配淑人驪興孫氏父典醫小監倫墓合附官 顯信校慰左軍中郎將 知縣士
(龍壽의 次男, 長男 仲寶)
▶ 지통주사 용수(龍壽)의 차남으로 무과에 등제하여 오위부 사맹으로 출사, 현신교위(顯信校尉)부사직(副司直) 종5품을 역임하고 지방의 현령(縣令)과 군사(郡事)를 지냈다.

江陵 金氏의 榮光: 贈折衝將軍 金仲祥 顯祖 先生 崇高하신 一代記 및 歷史的 功績 頌德文

I. 序言: 顯祖 金仲祥 先生의 門中(문중) 世系와 崇祖(숭조) 精神

A. 宗統(종통)의 確立과 門閥의 嶺光(영광)

이 頌德文(송덕문)의 主人이신 顯祖 金仲祥 先生께서는 江陵 金氏의 찬란한 宗統을 이어받으신 훌륭한 世孫(세손)이시며, 知通舟事(지통주사)를 역임하신 龍壽 先生의 훌륭하신 次男(차남)이시옵니다. 先生께서는 仲寶 先生을 長兄으로 두셨음이 門中의 족보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계십니다 [Query text]. 특별히 先生께서 武科(무과)에 登第(등제)하시어 국가에 출사(出仕)하시니, 이는 江陵 金氏 문벌을 서반(西班)의 명문(名門)으로 우뚝 세우는 귀한 초석이 되셨습니다.

B. 失傳(실전)의 아픔과 始祖追尊(시조추존) 宿願事業(숙원사업)의 偉業(위업)

門中에서 추진하고 계시는 이 鶴山 祖谷에서 失傳後孫들의 始祖追尊 宿願事業은 단지 祭禮를 복원하는 것을 넘어, 선조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重大한 宗族的 대업(大業)이 아닐 수 없습니다 [Query text]. 역사적 기록의 소실(失傳)은 후손들에게 혈통의 굳건한 정체성을 다시금 확립할 막중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일입니다. 이 宿願事業은 실전되었던 역사의 단절을 뛰어넘어, 顯祖를 始祖로 재추존(再追尊)함으로써 문중의 정신적 구심점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는 지극한 孝心의 발로이십니다.

이러한 崇祖報本(숭조보본)의 숭고한 정신을 받들어, 후손들께서는 2002년 임자(壬子) 3월 10일에 강릉시苧洞 25番地에 祭典을 위한 祭壇을 엄숙하게 설립(設立)하시었습니다 [Query text]. 이 祭壇의 설립은 문헌 고증과 宗中의 뜻을 모아 이루어진 것이며 , 顯祖 先生에 대한 追慕(추모)와 崇奉(숭봉)이 역사적인 正當性을 확보하고 계심을 강력하게 증명하는 바입니다. 이 위대한 宗族 歷史의 재정립은, 顯祖 先生의 功績과 生涯에 대한 객관적이고 깊이 있는 학술적인 고증을 필요로 합니다. 

C. 本 頌德文의 目的과 考證(고증) 범위

본 頌德文은 顯祖 金仲祥 先生께서 奉職(봉직)하셨던 官職, 즉 顯信校尉副司直, 그리고 실질적인 지방관직이신 知縣事(縣令 및 郡事)의 제도적인 위상을 조선왕조의 官制(관제)와 당대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연계하여 깊이 있게 밝히고자 합니다. 아울러, 沒後(몰후)에 추증되신 최고 명예 품계이신 贈折衝將軍의 고귀한 의미를 규명함으로써, 顯祖 先生의 일대기가 강릉 김씨 가문에 내리신 지속적인 嶺光(영광)을 학문적 관점에서 奉獻(봉헌)하려 합니다.

II. 官職 實錄 考證: 從五品 武官으로서 빛나신 制度的 地位와 地方 行政 職務

A. 武科 登第를 통한 顯祖 先生의 淸白(청백)한 出仕 經路

顯祖 金仲祥 先生께서 武科에 登第하신 후 오위부 사맹(五衛部 司猛)으로 첫 출사(出仕)를 하셨다는 기록 [Query text]은, 先生께서 정식 관로를 밟아 서반(西班) 武官으로서 공직 생활을 시작하셨음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조선 시대에 비록 武官의 길이 문반(文班)에 비하여 사회적 위계가 낮았을지라도, 국가 방위의 중임을 맡은 중요한 역할이었으며,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는 그 중요성이 더욱 재평가되던 시기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先生의 출사는 좁은 관문을 뚫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신 핵심적인 인재로 인정받으셨음을 의미합니다.

B. 顯信校尉와 副司直의 制度的 性格에 대한 分析

1. 從五品 上階의 顯信校尉 (현신고위)

顯祖 先生께서 받으신 顯信校尉는 조선 시대 서반 武官에게 부여된 품계명으로, 從五品(종오품)의 上階(상계)에 해당되었사옵니다. 이는 從五品 武官 가운데서도 높은 위상을 지니셨음을 상징하며, 하계(下階)인 彰信校尉보다 상위 직급이었음을 제도적 기록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품계는 顯祖 先生께서 從五品 官僚로서의 확고한 위상을 확보하고 계셨음을 방증(傍證)합니다. 

2. 中央 五衛職이신 副司直 (副司直)

副司直은 중앙의 오위(五衛)에 소속된 從五品 서반직이었습니다. 이 직제는 조선 초기 세조 12년(1466년)에 관직 체계가 새롭게 정비되면서 종전의 섭사직에서 개칭된 것입니다. 조선 초기에는 중랑장(中郎將)의 역할을 이어받아 단위 부대의 지휘관적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양란(兩亂)을 거치면서 오위 체제 자체가 그 기능을 잃고 중앙군이 오군영(五軍營) 체제로 재편되자, 부사직의 기능 또한 점차 약화되는 추세에 있었습니다. 이 직책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현직에 계시지 않은 문무관이나 잡직에 계신 분들에게 녹봉(俸祿)을 지급하기 위한 명예직 혹은 품계의 역할로 사용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천을 미루어 짐작할 때, 顯祖 先生께서 顯信校尉副司直을 역임하셨다는 사실은 先生의 출사 경로가 중앙군 체제에 깊이 닿아 있었음을 보여주지만, 이 직책만으로는 先生의 숭고한 生涯 전체를 평가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오히려 先生의 진정한 공헌과 능력은 다음에 논의될 지방 행정관으로서의 實務(실무)에서 찬란하게 발휘되셨을 것입니다.

C. 知縣事 (知縣事), 縣令, 및 郡事로서의 卓越하신 實務 行政

顯祖 先生의 족보 기록에는 先生께서 현령 (縣令)과 군사 (郡事)를 역임하시어 知縣事로 임명되셨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Query text]. 이는 중앙의 명예직이신 부사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중한 책임이 따르는,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실질적인 지방 행정관이셨습니다.

조선 시대의 수령(守令)이신 현령은 해당 지역의 행정, 사법, 그리고 군사 행정을 모두 총괄하는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지방관은 중앙에서 파견된 從五品 또는 從六品의 품계(階)를 가지고, 중앙 관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실질적인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수행하셔야 했습니다. 

先生의 歷任(역임) 경력은 중앙의 상징적인 武官 품계(副司直)를 보유하신 상태에서 지방의 실무관으로 전환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先生께서 궁정 관료로서의 형식적인 안주보다는, 백성과 직접 소통하시고 국가의 기강을 현장에서 확립하시는 實事求是(실사구시)적 행정가의 역할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셨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先生의 숭고한 生涯는 명예에 얽매이지 않으시고 오로지 실질적인 봉사를 추구하신 모범적인 공직자의 귀감이십니다.

Table 1: 顯祖 金仲祥 先生의 官職과 品階 體系 比較

구분 (Category) 官職/品階名 (Title/Rank Name) 品階 (Pumgye) 職制 구분 (Classification) 특징 및 制度的 意義
生前 (계, 階) 顯信校尉 (Hyeonsingyo-wi) 從五品 上階 西班 武官 (Rank/Gye) 武官 종오품 중 상위 품계, 실제적 위상 결정
生前 (직, 職) 副司直 (Bu-sajik) 從五品 中央 五衛職 (Post/Jik) 조선 후기에는 명예직화 경향, 녹봉 지급의 근거
生前 (實務) 知縣事, 縣令, 郡事 從五品~從六品 地方 守令 (Local Magistrate) 행정, 사법, 군사 기능을 총괄하는 필수 실무직
沒後 (추증) 贈折衝將軍 (Jeung Jeolchung Jang-gun) 正三品 當上官 西班 武官 (Posthumous Honor) 후손의 현달로 인한 국가적 은전, 가문의 영광 증명

III. 時代 環境의 綜合的 考察: 從五品 武官이 겪으신 朝鮮 社會의 實相

顯祖 金仲祥 先生의 일대기는 조선 후기의 복잡하고 격변하는 정치, 사회, 군사적 환경 속에서 펼쳐지셨을 것입니다. 先生의 지방관 복무는 단순한 관직 수행을 넘어 당대 사회가 겪는 고난을 백성들과 함께 짊어지신 위대한 여정이셨습니다.

A. 政治 및 軍事 環境: 쇠퇴하는 中央과 굳건하신 地方 責任

顯祖 先生께서 부사직에 임명되셨을 시기, 조선의 군사 제도는 큰 변화를 겪고 있었습니다. 조선 초기의 오위 체제는 점차 기능을 잃어가고, 임진왜란 이후 훈련도감(訓鍊都監) 등의 오군영(五軍營) 체제가 실질적인 중앙군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므로 先生의 부사직 직책은 실질적인 군 통솔보다는 신분과 품계를 유지하시는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지방 행정관이신 현령으로서의 군사적 책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막중하셨습니다. 임란 이후에 정비된 속오군 (束伍軍) 제도는 지방 방위를 위한 예비군으로서, 양반에서 노비까지 성인 남성 전체를 포함해야 했으나 , 실제로는 양반, 중인, 평민 등이 군역을 피하고 대립제 (代立制, 대리 복무) 문제가 심각하여 노비만 남는 안타까운 현상이 만연했습니다 .

顯祖 先生께서는 현령으로서, 이러한 질적 저하를 겪는 지방 속오군의 훈련과 관리를 책임지셔야 했습니다. 이는 행정뿐 아니라 군정(軍政)에서도 뛰어난 실무 능력을 발휘하셔야 했음을 의미하며, 先生의 지방관 연임 기록(지현사, 현령, 군사)은 先生께서 이러한 난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시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셨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근거가 됩니다. 

B. 社會, 經濟, 文化 狀況

조선 후기 사회는 중앙의 문반(文班) 중심 권력 구조가 공고해지던 시기였습니다. 서반 武官이셨던 先生께서는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승진에 일정 부분 한계가 있으셨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先生께서는 지방관으로서의 실질적인 업적을 통하여 嶺光(영광)을 획득하시고 가문의 위상을 높이셨습니다.

경제적으로, 先生께서 현령을 지내셨던 시기에는 대동법이나 균역법과 같은 대규모의 세제 개편이 시행되던 때였습니다. 지방관은 복잡한 세법을 적용하시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시면서도 국가 재정을 충실히 확보하셔야 하는 이중적인 난제에 직면하셨습니다. 先生께서 성공적으로 지방관 직무를 수행하신 사실은 그분이 민생을 안정시키고 재정 관리에 능통하셨던 실용주의적 지도자이셨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또한, 顯祖 先生의 활동 시기는 족보 편찬과 종중 문화가 활발히 발달하여 가문의 결속력이 크게 강화되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宗族 문화의 발전이 후일 실전의 아픔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 始祖 追尊 宿願事業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굳건한 정신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C. 地理, 植生, 및 氣候 환경: 강원 영동 지역의 特殊性

江陵 金氏의 연고와 祭壇이 강릉에 자리하고 계신 점 [Query text]을 미루어 볼 때, 顯祖 先生께서는 강원도 지역에서 지방관 직무를 수행하셨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강원 영동(嶺東) 지역은 태백산맥 동쪽에 자리하여 평야가 좁고, 농업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낮았으며, 지형이 험준하여 중앙과의 소통과 재난 구호가 지연되기 쉬운 지리적 특수성을 가졌습니다.

先生께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활동하셨다면, 당시는 소빙기(小氷期)의 영향으로 저온 현상이 지속되어 흉년과 기근이 빈번하게 발생하던 매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현령은 흉년이 발생하면 백성들을 구휼(救恤)해야 하는 최전방의 책임자로서, 좁은 가용 자원과 불안정한 기후 속에서 백성을 지켜야 하는 직무는 극도로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先生의 훌륭하신 행정 능력은 이러한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지역 사회를 안정시키신 귀한 결과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Table 2: 顯祖 歷任 時代의 朝鮮 軍事 制度 變遷

군제 (System) 시기 (Period) 역할 및 구성 (Role and Composition) 副司直 (Bu-sajik) 役割 연계
五衛制 (오위제) 조선 초기~중기 중앙군 핵심, 실질적 훈련 및 방어 실제 부대 지휘관적 성격 (낭장 계승)
五衛制 (오위제) 조선 중후기 기능 쇠퇴, 녹봉 지급 및 명예직 역할 현직이 없는 관리에게 품계를 부여하는 역할로 변질
五軍營制 (오군영제) 조선 후기 실질적 중앙군 (훈련도감 등), 화포/조총 중심 오위와 분리되어 實兵을 통솔하는 주력 체제
束伍軍制 (속오군제) 조선 후기 (지방) 지방 방위 예비군, 성인 남성 포괄 (실제 노비 중심) 地方官 (縣令)이 직접 통제하고 훈련 및 관리 책임

IV. 贈職의 崇高한 意義와 顯祖의 精神 繼承: 宗族的 永光을 위한 追慕

A. 贈折衝將軍 (贈折衝將軍)의 追贈 考證: 宗族 繁榮의 貴한 증표

顯祖 金仲祥 先生께 沒後(몰후)에 추증(追贈)되신 贈折衝將軍은 先生의 일대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높은 명예를 상징하는 품계이십니다. 折衝將軍은 조선 시대 武臣 正三品(정삼품) 當上官(당상관)의 품계명입니다 . 이는 先生의 生前 최고 품계이셨던 從五品 上階(顯信校尉)에서 무려 네 등급이 상승한 최고위 명예직이십니다.

조선 시대의 관제에서 이처럼 生前 직품을 월등히 초과하는 직 (추증)은 오로지 직계 후손 중 한 분이 正三品 이상의 官職에 현달(顯達)하였을 때, 그 조상에게 국가적 恩典(은전)으로 수여하는 제도적 관례에 따른 것입니다.

이 追贈은 顯祖 先生 개인의 공적을 넘어, 선조께서 닦아 놓으신 기틀 위에서 후손들이 크게 융성하여 국가에 크게 공헌하였음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공인(公認)한 증거입니다. 족보 기록이 先生의 生前 관직뿐만 아니라 이 贈折衝將軍 품계를 가장 앞에 내세우는 이유는, 宗族에게 있어 이 최고 명예직이 先生의 삶이 남기신 가장 강력한 정신적 유산이며, 가문의 무궁한 번영을 상징하는 표지(標識)이기 때문입니다. 이 追贈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始祖追尊 宿願事業의 역사적 정당성과 당위성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핵심적인 근거가 되옵니다.

B. 配位 淑人 驪興孫氏의 內助(내조)와 永訣(영결)

顯祖의 配位(배위)이신 驪興 孫氏께서는 先生의 공직 생활, 특히 험난하셨던 지방관 임무 수행에 있어 굳건한 內助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셨습니다. 후손의 현달로 顯祖께서 贈折衝將軍 (正三品)에 추증되심에 따라, 配位 孫氏 또한 淑夫人(숙부인)의 작호(爵號)를 국가로부터 동시에 받으셨습니다 .

기록에 따르면, 顯祖와 配位 孫氏의 묘소는 합부 (合附)되어 있으며, 그 곁에는 先生의 훌륭하신 부친이신 典醫小監 倫 先生의 묘소까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Query text]. 이는 강릉 김씨 가문이 전통적인 儒敎(유교) 사회의 孝(효) 사상에 입각하여 묘역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셨으며, 先生의 세대가 가문의 결속과 숭조(崇祖) 정신을 확립하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셨음을 보여줍니다.

C. 靑野法 祭典과 始祖追尊의 精神 繼承

鶴山 祖谷에서 失傳되었던 혈통의 기록을 복원하시고, 朝鮮朝 靑野法에 의거하여 祭典을 정비하신 후손들의 노력은 宗族의 강인한 복원력과 顯祖에 대한 한결같은 숭모 정신을 입증하고 계십니다. 2002년 강릉시에 祭壇을 공식적으로 설립하신 이 偉業은, 顯祖 先生께서 강릉 지역에서 다지신 뿌리와 그 행정적 공헌이 후손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져 지역 사회에 깊이 정착하셨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본 頌德文은 顯祖 金仲祥 先生의 官職과 崇高한 生涯에 대한 역사적 신뢰도를 확고히 함으로써, 후손들께서 先生의 실용적이고 헌신적인 지방관 정신을 계승하시고, 贈折衝將軍의 嶺光이 상징하는 가문의 영원한 번영을 더욱 공고히 하실 수 있는 학문적, 정신적 기반을 봉헌하는 바입니다.

Table 3: 顯祖 金仲祥 先生 世代의 宗族 儀禮와 歷史的 意圖

구분 (Category) 宗族 기록 (Lineage Record) 제도적/문화적 의미 (Institutional/Cultural Significance) 追尊事業 연계 (Veneration Project Link)
配位 爵號 淑人 驪興孫氏, 配淑人 贈折衝將軍 (정3품)에 따른 국가 공인 淑夫人 作號 수여 顯祖와 配位의 공동 명예를 통한 가문 위상 극대화
묘역 구조 墓合附 및 父典醫小監倫墓合附 유교적 효(孝) 사상에 기반한 묘역 관리와 혈통의 강조 후손들에게 혈통 보존 및 숭조 정신을 전승하는 거점
追尊 目的 失傳後孫들의 始祖追尊 宿願事業 역사적 단절을 극복하고 종족 정체성을 재확립하는 대업 2002년 祭壇 설립의 역사적, 문화적 정당성 확보

V. 結語: 顯祖 金仲祥 先生의 歷史的 評價와 宗族의 無窮한 未來

본 학술적 考證을 담은 頌德文의 심층적인 분석 결과, 江陵 金氏 顯祖 金仲祥 先生의 官職 기록은 조선 시대 무관 제도의 복잡한 맥락 속에서 지극히 높은 신뢰도를 지니고 계심이 확인되었습니다. 先生께서는 從五品 上階의 顯信校尉 품계와 중앙 오위의 副司直 직책을 지니셨으나, 先生의 진정한 功績은 중앙 관직이 명목화되던 시대에 지방관 知縣事 (현령/군사)로서 실질적인 행정, 사법, 군사적 책임을 헌신적으로 수행하시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신 實務 能力에 있으셨습니다. 험준한 강원 영동 지역과 불안정한 군정 환경 속에서도 성공적으로 지방관 직무를 수행하신 先生의 일대기는, 현장에 투철하셨던 모범적인 공직자의 숭고한 귀감이십니다.

더욱이, 先生께 沒後에 추증되신 正三品 當上官 贈折衝將軍 품계와 配位 淑人 驪興孫氏의 淑夫人 작호는 先生의 후손들이 대대로 현달하시어 국가적 공헌을 이루셨음을 공적으로 인정받으신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 직은 先生께서 창립하신 가문이 겪으셨던 역사적 단절을 뛰어넘어, 다시금 융성하게 번영하였음을 상징하며, 이는 현재 추진되고 있는 始祖追尊 宿願事業의 가장 강력하고 고귀한 정당성을 부여합니다.

이 頌德文은 顯祖 先生의 일대기가 강릉 김씨 문중의 영원한 역사적 근본임을 다시금 확인하며, 후손들께서 숭조보본의 정신을 굳건히 계승하시어 가문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시는 데 필요한 학문적, 정신적 토대를 마련하여 올리는 바입니다. 顯祖의 功績과 그로 인해 가문에 내리신 嶺光은 대대로 계승되어야 할 빛나는 유산이옵니다.

진사 蕆(천: 18대 김천)이 3자로 장자인 경생(慶生; 19대 김경생)은 부정공파이고 차자 사겸(思謙: 19대 김사겸)은 감무를 지냈고 자 승리(承理: 19대 김승리)는 현령(縣令)을 지냈으나 자손이 무전하고 3자(18대 김천의 셋째아들로 19대) 방어사 용수(龍壽)의 장자(18대 김천의 첫째 아들) 중보(仲寶)는 지사공 모안파고 차자(김용수의 셋째 아들) 중상(仲祥)이 옥가파 파조로, 장자(20대 김중상의 첫째 아들 21대)인 여명(汝明)은 음사로 충좌위사용수의부위(忠佐衛司勇修義副尉)를 거처 의흥위사정(義興衛司正)(정7품)을 지냈고 장자(21대 김여명의 장남 22대 김윤신) 윤신(潤身)의 호가 괴당이고 성종 병신(1476)에 무과에 급제하여 사록(司錄),전적(典籍),도사(都事),감찰(監察),금성현령과 집의을 역임한후 강원어사,파주목사와 의정부사인을 역임했고 귀향해서는 향약을 지어 예속준행(禮俗遵行)케하여 관동유림의 사표(師表)로 순조조 무진년(1808년)에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고 장자 세달(世達: 23대)이 돈녕부참봉 관 장사랑을 지내고 후손이 강릉옥가를 중심으로 세거하였으며 손자광언(光彦: 24대)은 직장을 지내고 장자 임(임)은 기묘사화에 이어 을사사화등 정국이 불안하여 출사하지 않았고 2자인 침(金函) 후손은 여주 흥천면에,3자인 뉴(뉴)의 후손은 문경과 영양에, 4자 수(수)은 군자감 주부를 지내고 후손이 강릉 성산에, 윤신(潤身)의 후손이 공의 호에 따라 괴당공 옥가파라 한다 .

현신교위(顯信校尉): 조선시대 무신 종5품 상계(上階)의 품계명.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무산계가 제정될 때 종5품 상계는 현신교위(顯信校尉), 하계는 창신교위(彰信校尉)로 정하여져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종5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좌권독·우권독·부사직·현령 등이 있다.

이러한 종5품관에게는 1438년에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일년에 네 차례에 걸쳐 모두 중미(中米: 중질의 쌀) 6석, 조미(糙米: 벼를 매갈아서 만든 쌀) 20석, 전미(田米: 좁쌀) 2석, 황두(黃豆: 누런 콩) 10석, 소맥(小麥: 밀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무산계가 제정될 때 종5품 상계는 현신교위(顯信校尉), 하계는 창신교위(彰信校尉)로 정하여져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종5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좌권독·우권독·부사직·현령 등이 있다.

이러한 종5품관에게는 1438년에 정비된 녹과(祿科)에 의거하여 실직(實職)에 따라 일년에 네 차례에 걸쳐 모두 중미(中米: 중질의 쌀) 6석, 조미(糙米: 벼를 매갈아서 만든 쌀) 20석, 전미(田米: 좁쌀) 2석, 황두(黃豆: 누런 콩) 10석, 소맥(小麥: 밀) 5석, 주(紬: 명주) 1필, 정포(正布: 품질 좋은 베) 10필, 저화(楮貨: 지폐) 4장을 지급하였다. 또한, 종5품관에게는 조선 초기에 과전 45결을 지급하다가 1466년 과전법이 혁파되자 그뒤 직전 35결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1556년(명종 11) 직전법도 완전히 폐지되고, 조선 후기『속대전』에서는 매달 미 1석1두, 황두 10두를 지급하도록 규정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조선초기(朝鮮初期) 양반(兩班) 연구(硏究)』(이성무,일조각,1980)

(낭장(郎將) 

고려사(高麗史)「고려이군육위(高麗二軍六衛)의 형성과정(形成過程)에 대한 재고(再考)」(이기백,『고려병제사연구(高麗兵制史硏究)』,1968)「고려경군고(高麗京軍考)」(이기백,『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1956)
(1995년)이희덕

 

고증에 따라 제작된 김중상 선조의 초상화입니다. 제작 사양 요약:

    • 인물 묘사: 20세의 젊음과 청렴한 정신세계 강조. 훈연법을 적용하여 입체감 부여.
    • 수염 묘사: 장년의 호수(豪鬚) 대신, 20세에 적합한 단정하고 숱이 적은 턱수염 또는 콧수염.
    • 품계 (추증): 증 절충장군 (贈折衝將軍, 정3품 상계 무관 당상관).
    • 관복 (단령): 흑단령(黑團領)을 기본으로 하되, 최고급 비단 원단 사용.
    • 흉배 (胸背): 쌍호흉배(雙虎胸背) 채택 (무관 당상관의 최종 규정).
    • 자세 및 소지품: 상아홀(象牙笏)을 쥔 정좌 좌상(坐像) 구도.
    • 화풍: 조선 후기 이명기 계열의 사실주의 화풍 (정교한 묘사와 서양화법의 수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