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26일
제5세-김영진-POST

五世 英珍
官 大奈麻

◎ 김영진(英珍), 강릉김씨 5세손으로 아버지 김동정(東靖)의 장남(長男)
(東靖의 長男, 次男 英吉은 大奈麻, 三男 英堅은 大奈麻)
관직(官職)으로 대내마(大奈麻)에 오르시다.

김영진 대나마 초상화 묘사 (16:9 스케일)
1. 인물 및 복식 (복색: 청색/녹색)
인물: 40대 중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중후하고 지적인 모습. 부친 김동정의 영향을 받아 학문과 행정에 능통했던 인물의 풍모를 갖추고 있습니다.
관복 (袍): 신라 17관등 중 제10등 **대나마(大奈麻)**의 복색은 정확히 전해지지 않으나, 9등급 급찬(級飡) 이하 11등급 나마(奈麻) 이상 관등의 복식은 일반적으로 청색(靑色) 또는 녹색(綠色) 계열로 추정됩니다. 여기서는 지적이고 행정가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짙은 청록색(Dark Teal) 또는 **청색(Blue)**의 비단 포(袍)를 입고 있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머리장식 (冠): 관등에 따른 복식 규정에 맞춰 가죽으로 만든 검은색의 모자인 **흑색 관(黑色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의 형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간소화되었을 수 있지만, 전형적인 신라 관모의 형태를 유지합니다.
허리띠 (帶): 대나마 관등에 맞는 **가죽 또는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革帶 또는 帛帶)**를 착용하고 있으며, 신라 말기의 간결함을 반영하여 장식이 과하지 않습니다.
지물 (持物): 오른손에는 왕명과 행정 문서를 상징하는 작은 두루마리나 **간결한 홀(笏, 지위 표시용 막대)**을 단정하게 쥐고 있습니다.
2. 배경 및 구도 (16:9 가로 스케일)
구도: 상반신 또는 전신을 약간 측면에서 바라보는 정적인 자세로, 화면의 오른쪽 또는 왼쪽에 인물을 배치하여 16:9의 가로 구도를 살립니다. 인물의 시선은 정면을 응시하여 관료로서의 강직함과 사색하는 지성인의 깊이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실내 배경: 배경은 신라 태학감(太學監)의 서재나 궁중 관청의 한적한 방을 암시하는 실내로 묘사합니다.
좌측 (Left Side): 낮은 탁자 위에 유교 경전(한자 서책) 두어 권이 놓여 있어, 부친의 뒤를 이어 학문에 정진했던 면모를 보여줍니다.
우측 (Right Side) 또는 창문: 창밖으로는 서라벌(경주)의 풍경이 은은하게 비치도록 하여, 그가 중앙 관료였음을 암시하되, 전체적인 분위기는 정숙하고 고요하게 잡아 난세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인재의 이미지를 강조합니다.
전체 색감: 청록색, 짙은 갈색, 황갈색을 주조로 사용하여 중후하고 격조 높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신라 말기의 불안함보다는 지배층의 고결함이 부각되도록 합니다.

격동하는 신라 말, 가문의 기대를 짊어지시다

강릉 김씨 5세손이신 김영진 선조님은, 부친이신 김동정(金東靖) 대나마께서 이룩하신 학문과 관직의 업적을 계승하며 성장하셨습니다. 선조님께서 활동하셨던 시기는 신라 제48대 경문왕 재위 후기부터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쇠퇴기이자 후삼국의 태동기였습니다.

이 시기는 진골 귀족들의 왕위 다툼지속적인 가뭄 및 흉년으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진성여왕(眞聖女王) 재위기(887년~)에는 국가 조세 수취 체계가 붕괴하고, 사방에서 농민 반란(원종과 애노의 난 등)호족 세력(견훤, 궁예 등)이 봉기하며 나라가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난세 속에서 가문이 생존하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는 부친의 뛰어난 처세와 명망이 절실히 요구되었습니다.

부친의 영향과 관등 대나마(大奈麻)에 오르시다

선조님의 부친이신 김동정 대나마께서는 경문왕 대에 원외랑, 태수, 한림랑, 태학감 대사 등 문무와 학술을 아우르는 요직을 두루 역임하셨고,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다시 재능을 인정받아 관직에 복귀하셨던 현명한 분이셨습니다. 이는 자제들에게 높은 학문적 소양과 함께, 어지러운 정세 속에서 때를 기다리고 능력을 발휘해야 하는 엄중한 가풍을 물려주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선조 김영진께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바탕으로 중앙 관료의 길을 밟으셨습니다. 형제분들인 차남 영길(英吉)과 삼남 영견(英堅) 또한 모두 대나마의 관등에 오르셨다는 기록은, 선조님의 가문이 신라 말 혼란한 정국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학문적 배경과 명망을 통해 여러 인재를 배출했음을 증명합니다.

선조 김영진께서 최종적으로 오르신 대내마(大奈麻)는 신라의 17관등(京位)제10등에 해당하는 높은 관위였습니다. 이는 아찬(阿飡, 6등)이나 사찬(沙飡, 8등) 등 중위 관등보다 아래이지만, 6두품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사실상의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으로 가는 길목에 해당했습니다.

특히,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 호족들이 발호하던 신라 말기에 수도 경주(서라벌)의 중앙 관등대나마에 올랐다는 사실은, 선조께서 중앙 귀족 사회에서 인정받는 지식인이자 행정 관료로서 국가를 보위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셨음을 의미합니다.

난세 속에서 가문의 영속을 다지시다

선조 김영진 대나마께서 살았던 시대는 신라 천년의 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탄생하는 대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중앙 귀족들은 사치를 일삼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나, 선조님께서는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직함과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혼란한 조정과 지방의 행정 실무를 꿋꿋이 담당하셨습니다.

선조님의 생애는 단순한 개인의 영달을 넘어, 가문이 대를 이어 국가의 기틀을 지탱하고 후삼국 시대의 도래 속에서도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기반을 다지는 준비와 헌신의 시간이었습니다. 김영진 대나마께서 쌓으신 공적과 명예는 이후 강릉 김씨가 고려 시대에까지 번성하는 초석이 되었으니, 그 지혜와 덕망에 후손들은 깊은 존경을 표합니다.

대나마: 신라시대의 관등. 17등 관등(官等) 중의 제10등으로서, 일명 ‘대나말(大奈末)’·‘한나마(韓奈麻)’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 때 제정되었다고 하였으나, 520년(법흥왕 7)의 율령(律令) 공포 때 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대나마는 진골·6두품 이외 5두품도 받을 수 있었으나, 동시에 5두품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이었다. 따라서, 5두품 출신의 대나마 관등 소지자에게는 이른바 특진제도로서 중위제도(重位制度)를 설정하기도 하였다. 즉, 중대나마(重大奈麻)에서 9중대나마(九重大奈麻)까지가 그 것이다.그러나 이 중위제도는 어디까지나 대나마 관등 안에서의 제한된 승진제도였을 뿐이며, 그 자체 대나마의 범주를 뛰어넘을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공복(公服)의 빛깔은 청색(靑色)이었다. 한편 대나마는 영흥사성전(永興寺成典)과 육부소감전(六部少監典)이란 관청의 관직 명칭이기도 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대나마(大奈麻))]